법화경 제4장 신해품(信解品)
이 품의 제목인 ‘신해(信解)’의 ‘해(解)’란 이해(理解)라는 말로서 이유부터 따지고서 ‘과연 그렇구나!’하고 머릿속에서 명쾌하게 결론짓는 것을 말하며, ‘신(信)’이란 그 이해가 완전히 마음속에 정착하여 ‘옳다!’하고 조금도 의문을 갖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그 의미를 모르면서 오직 믿기만 한다면 어떤 계기로 인해 그 신앙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치도 모르고 어떤 가르침을 믿으면 병이 완치된다거나 환경도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고 가정합시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또 다시 그 병이 재발하였다면, 아! 이 가르침은 진실이 아니구나하는 의구심이 마음에 생기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입학시험에 떨어졌다면 지금까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고집하였던 굳은 신앙이 금세 맥없이 주저앉고 마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굳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완고한 신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종교는 반드시 ‘이론적으로도 알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론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을 ‘해(解)’하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를 이성적으로만 분석하는 것도 또한 ‘한쪽으로 치우신 신앙’입니다. 어느 곳까지는 도달하지만, 그 곳으로부터 더 깊이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분수를 배웠을 때 ‘3분의 1’과 1을 3으로 나누었을 때 값과는 서로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0.333....으로 몇 십행을 나누어도 나누어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정확한 답과의 사이에는 작은 틈이 남습니다. 그러나 3분의 1이나, 1을 3으로 나누는 거나 값은 똑같다고 배웠습니다. 매우 작은 틈이 분명 나고 뛰어넘으려야 뛰어 넘을 수 없는 분명 차이를 같다고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터득한 이치로 아무리 하여도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종이를 삼등분하였을 때 정확히 맞듯이 이것이 곧 진리이고 진실이며,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는 것이 ‘믿음(信)’입니다.
더욱이 이론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머리 속으로만 ‘알았다,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의 말로 하자면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한다는 의미로 타인을 끌어 올리는 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에는 힘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도 ‘신’만 있으면 끊임없이 남을 구원하고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과 ‘해’의 양쪽을 함께 갖추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처음부터 ‘오직 믿어라’라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설법을 듣고 경도 깊이 읽어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가 증진하면, 자연히 ‘신’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소박한 사람은 ‘해’는 거의 진보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가르침이다’라고 듣는 것만으로도 곧 ‘믿음’을 일으킵니다. <법화경>의 가르침에 관한 한 그것이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일심으로 생각하면서 점점 가르침의 내용을 듣거나 읽어 가는 동안에 ‘해’도 진보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로 들어가도 되고 ‘신’으로 들어가도 좋지만 반드시 그 양쪽을 함께 갖추지 않으면 진정으로 힘 있는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예비지식을 가지고 ‘신해품’의 본문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유품’의 설법에 의해 사리불존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수기를 받고 세존께서 ‘삼거화택’의 비유를 들어 그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하시자, 완전한 신해에 이fms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수보리존자, 마하가전연존자, 마하가섭존자, 마하목건련존자 등의 네 사람이었습니다. 이 네 사람이 무엇을 완전히 신해했는가 하면 ‘방편품’에서 잠깐 암시적으로 설해졌던 ‘인간은 한결같이 평등하게 불성을 갖추고 있으며, 누구나 다 같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부처님은 갖가지 방편으로써 가르침을 설하시나,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성을 발견하게 하여, 부처님의 경지를 깨닫게 해주는 한 가지의 일로 귀납된다.’고 하는 것을 신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네 분들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단정히 하고 정중히 세존께 예배하고 나서 여쭙기를『저희들은 대중 가운데 상수로서 나이가 들어 육신이 노쇠하니 저희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미 세속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를 얻었기 때문에 더 할 일이 없다.」하여 다시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존께서 오랜 전부터 저희들을 위해 법을 설해 주셨지만 저희들은 그때 설법을 듣는 자리에 있으면서 몸이 피곤하여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게으른 마음을 일으킨 나머지 다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오로지 공에 의해 생긴 것으로 원래부터 형상이 없으며 그 실상의 세계는 인연의 조작을 넘어선 상주 불변의 존재이다.」하는 따위의 생각에만 사로 잡혔을 뿐 보살의 법과 신통에 즐거워함과 불국토를 청정케 함과 중생을 성취시키는 일은 마음에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생각이 미흡하였으며,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부처님께서 저희와 같은 성문들에게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수기 주심을 직접 보고 지금까지 전혀 경험치 못한 기쁨을 얻었나이다. 지금 뜻밖에 아주 귀한 법을 들으니 매우 기쁘고 즐거우며, 크고 좋은 이익을 얻으니 구하지 아니한 한량없는 진귀한 보배를 저절로 얻은 것과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비유를 들어 이 뜻을 밝히겠나이다.』하며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를 말하였습니다.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쳐 나와 방랑의 몸이 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쉰 살이 넘도록 타국을 떠돌면서 가난한 일용 인부로 살아갔으나, 늙음의 그림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가오자 발길은 웬일인지 아버지가 계시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단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매우 슬퍼하며 사방으로 찾아 헤맸지만 아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어느 거리에 머물러 살게 되었는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산을 갖게 되어 훌륭한 저택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방랑 끝에 우연히 그 마을로 찾아들어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시켜 주지 않을까 하고 집안을 기웃거리자, 집안에 나라님(國王)처럼 보이는 훌륭한 분이 많은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앉아 있었으며 주위의 풍경은 매우 근엄하였습니다.
그 사나이는 왠지 모르게 무서워졌습니다. ‘도저히 나 따위가 일자리를 얻을 곳이 못 된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붙잡혀서 강제 노동이라도 당할지 모르겠다. 역시 나는 빈민굴 쪽이 더 알맞겠다.’라고 생각한 끝에 즉시 그곳을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아버지인 장자는 한시도 잊지 못한 그 얼굴이 있었습니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허기진 그 사내가 틀림없는 자기 자식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당장 옆에 있는 사람을 시켜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 궁자, 즉 가난한 아들은 혹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그 심부름꾼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기절하여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버지인 장자는 무리하게 데리고 오지 않도록 일렀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뒤, 빈민굴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 초라한 모습을 한 두 사람의 심부름꾼을 보내어 ‘더러운 곳을 청소하는 일자리지만, 그 삯은 두 배나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가지 않겠는가?’하고 유인하여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자 며칠 후 장자는 자기도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아들의 경계심을 풀게 하여 그에게 가까이 가서 친절한 말과 격려의 말을 건네어 친해진 뒤, 그를 양자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궁자 쪽에서는 그러한 대우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비천한 신분이라는 생각만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차츰 격이 높은 일을 시키다가 나중에는 자기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으로 삼았습니다. 궁자는 충실하게 일하며 훌륭하게 그 맡은 소임을 다하였으나, 그때까지도 항상 자기는 미천한 신분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가운데 궁자의 비굴한 마음도 차츰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자 자기의 임종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국왕을 비롯하여 고을의 벼슬아치 등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뒤 ‘이 사내야말로 나의 친아들입니다. 나의 전 재산은 모두 이 아들의 것입니다.’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궁자는 그때야 비로소 큰 장자가 진짜 자기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많은 재산이 고스란히 자기의 것임을 알게 되어 한없는 기쁨에 잠기었던 것입니다.』
장자궁자의 의미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연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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