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로마 4,1-8; 루카 12,1-7 /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2023.10.20.; 이기우 신부
예수님 시대에는 주식인 빵을 만드는 데 누룩을 사용했습니다. 조금만 넣어도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은 밀이나 쌀 같은 곡물을 발효시키는 곰팡이입니다. 이를 밀가루 반죽 속에 넣으면 부풀려진 빵이 되고, 쌀을 익힌 밥 속에 넣으면 막걸리가 됩니다. 밀가루 반죽 속에 넣어진 누룩은 작은 미생물인 효모의 작용으로 탄산가스를 만들어서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반면에, 쌀을 익힌 밥 속에서는 알코올을 만들어서 술이 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누룩이 바리사이들의 행태에 담긴 위선을 뜻합니다. 부풀어오른 밀가룩 반죽은 누룩 때문임을 알게 되듯이,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킨다고 자부했지만, 그들의 행태 속에 담긴 위선은 숨겨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도 알려지기 마련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선(僞善)이란 말은 선을 가장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위선의 반대말은 선을 그대로 간직한 진심(眞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행동 속에 담긴 진심을 하느님께서는 잘 알고 계심을 상기시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말은 개인이 자기만 알게 진심어린 행동을 해도 결국은 얼마 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데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루카 12,3ㄱ)이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되리라”(루카 12,ㄴ)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가르침이나 복음선포 행동이 머지않아 공개적으로 세상 곳곳에 널리 퍼져나가리라는 일종의 예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판단하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숨은 진심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당부말씀을 하신 것이고, 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복음을 널리 전하라는 격려를 하신 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당부와 격려의 말씀을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 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알려진 로마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특히 유다교를 신봉하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을 주로 염두에 두고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믿음을 예로 들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한복판인 로마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들을 발판으로 삼아 그 문화권의 이방인들을 믿음에로 초대하려고 이렇듯 과감하고 원대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유다인들을 상대로 한 말씀인데도 복음과 독서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정신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리고 경제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을 물려받아 살면서, 시대적으로는 과학시대를 살고, 정치적으로는 분단시대를 사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자본만능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 시대 한국인들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의예지신과 같이 아름답고 고귀한 유교적 전통에 대해서는 우리 신앙 선조들이 채택한 보유론(補儒論) 적 입장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는 천박한 서구 사회의 개인주의 풍조를 넘어서서 인간성이 풍요로운 공동체적인 문화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과학의 대전제는 인과율(因果律)입니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조장했던 공리공념(空理空念)이나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성행하는 유럽의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사조는 모두 이 인과율에 어긋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모든 만물과 생명의 원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시대를 사는 현대의 한국인들에게는 창조 신앙에 입각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학풍을 주창했던 우리 신앙 선조들의 전통을 계승해야 마땅합니다. 창조주를 부인하는 과학만능주의적 오류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로 배격해야 합니다. 오히려 신앙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대 쇄신이 필요합니다.
분단시대를 사는 남녘의 동포들에게는 한민족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선하고 의로운 빛을 숭상해 온 반만년 역사를 상기시키고, 북녘의 동포들에게는 철 지난 공산주의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민주주의의 성숙한 매력을 풍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지구상 남은 마지막 냉전지대의 희생양이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미워했던 과거를 흘려 보내고, 민족이 화해하며 통일을 이룩하는 ‘정상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온 인류 안에서 보편적 공감대를 얻고 있는 한류 현상이야말로 정상국가가 되어 우리 민족의 역량으로 온전한 광복을 이룩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쾌거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자본만능적 가치관과 그 풍조입니다. 이 덕분에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규모 순위로 10위권의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도 심각합니다. 빈부격차의 심화, 빈부의 대물림, 이로 인한 무한대로 증폭되고 있는 사회 갈등 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서로 섬기고 가진 것을 나누는 복음적 가치관을 증거함으로써, 민족 고유의 가치관인 대동세상(大同世上)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을 우리 믿는 이들이 마련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참으로 과학적인 태도는 세상과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되 특히 약한 생명을 아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강조했던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