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샤를르 드 푸꼬
- 신앙 진리의 실천 명제 4: 보조성
아가 2,8-14; 루카 1,39-45 / 대림 제3주간 목요일; 2023.12.21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의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말은 우리가 바치는 성모송 전반부의 후반에 들어왔습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의 만남은 묵주기도에서 환희의 신비 제2단으로도 묵상합니다. 하느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잉태를 하게 된 두 여인의 만남이 본인들에게 어떠한 설렘으로 다가왔을지는 오늘 독서가 대변해 줍니다.
오늘 독서인 아가서에 나오는 대로 젊은 연인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사랑의 밀어(密語)를 서로 속삭이는 모습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그 어느 것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의 전갈을 받고 아기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는 엄청난 긴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이해받기 어려운 잉태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약혼은 했으나 혼인을 하지 않은 처지에서 덜컥 미혼모가 된 그 속사정을 알아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서 마리아는 그 모든 근심 걱정을 다 하느님께 내맡기고 엘리사벳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상황에서 자기에게 일어난 그 모든 사연을 털어놓을 사람도 엘리사벳 한 사람뿐이었고, 그 사연을 이해해 줄 사람도 역시 그 한 사람뿐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이 그 어떤 연인의 만남보다도 더 설레고 설레었을 이유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신 만남이 이러했습니다.
마리아가 살던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마을에서 엘리사벳이 살던 유다 산악 지방까지는 걸어서 사흘 거리 정도 됩니다. 그 거리를 서둘러 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 인사하였을 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는데도 엘리사벳은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알려주셨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엘리사벳의 인사말이 이렇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인물을 잉태하였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습니다.
이 만남에서 보여진 신앙의 신비를 묵상하며 한평생 살아간 인물이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사제로서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에서 살면서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샤를르 드 푸꼬(Charles de Foucauld, 1858~1916)입니다.
그가 활약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에는 프랑스가 알제리와 모로코를 비롯한 북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치루고 있어서, 대부분이 이슬람 신자들이었던 그곳 주민들은 정복자 백인들에 대한 반감에다가 정복자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까지 겹친 이중의 반감 속에서 선교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선교를 자원한 그는 사하라 사막이 가까운 마을에 자리를 잡고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서 더 가난하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말하거나 사회적 신분으로 사제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오직 생활로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이슬람 신자들이거나 무신론자인 사람들까지도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삶을 살고자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마리아처럼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필생의 묵상 화두가 이 ‘방문의 신비’였던 것입니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다 잃고 외롭게 성장한 그는 젊어서는 백작 신분으로 물려받은 유산 덕분에 화려하게 살았고 군인으로서 출세를 꿈ㄲ 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살이 된 샤를르에게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므로 일찍이 그 어떤 인간도 그보다 더 내려갈 수는 없다.”는 고해신부의 강론을 듣고 회심한 일입니다. 그제껏 높은 자리만을 추구해 왔던 그는 앞으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기 위해 가장 미천한 이들 속에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번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가난한 생활이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을 석달간 성지순례하면서 나자렛 예수님의 삶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단순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습니다. 이런 지향으로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 가난한 이슬람 교도 속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광신교도들에 의해 총을 맞고 쓸쓸히 죽어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쉰 여덟이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에 그의 영성을 본받고자 하는 수도회가 생겨났고, 10년 후에는 수녀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예수의 작은 자매회’가 그 이름입니다.
죽은 지. 3주나 지나서 발견된 그의 주검은 사막에 묻혔고, 그가 살던 오두막에서 찾아낸 그의 일기장에 유언과도 같은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처럼 모든 사람을 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던 마리아처럼 살았던 그는 2005년에 복자품에, 2022년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가 “모든 이의 형제“(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 12항)로 불리우며 성인품에 올라 현대인들로부터 공경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닮고자 했기 때문으로서, 그도 역시 성령의 이끄심을 알아보았고 이에 헌신적으로 따랐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는,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섭리라고 기쁨에 차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이러한 예수님의 선택과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고자 가톨릭교회가 사회교리의 주요 원리로 가르치는 명제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명제입니다. 이 명제는 이치로 보자면 ‘재화의 보편성’ 에서 파생되었다고 하겠지만 실천 방법 면에서는 ‘보조성’ 원리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보조성 원리의 ‘보조성(補助性, subsidiarity)’이란 용어는 사회의 공동선에 대해서 정부보다는 보조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망정 가난한 이들 역시도 사회의 공동선에 대해 기여할 수 있어야 하므로, 그렇게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권력을 가진 정부를 비롯하여 재산을 가진 부자들과 지식을 가진 지식인들과 그밖에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교회의 신앙인들이 그들을 도와서 공동선에 기여하려는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노력을 도와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난한 이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면 사회가 공동체적으로 변화될 수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그 책임은 결코 보조적이지 않고 핵심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산을 주요 행복지표로 여기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들 부유한 이들을 사회적 성취의 모델인 양 쳐다보고 있어서 중산층도 자신들은 가난하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과 승용차가 재산의 전부인 중산층도 사회교리의 관점에서는 가난한 이들에 속합니다. 소수에 속하는 최상위 부유층의 총재산에 비해서는 중산층과 서민층의 재산을 다 합해도 모자랄 만큼 중산층 역시도 부유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빈부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져서 상위 10%가 나머지 90%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9대 1의 사회에서 점점 99대 1의 사회에 재산이 극소수에게 몰리는 빈익빈부익부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중산층도 서민층도 모두 다 가난한 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인 분포 비율로 볼 때 90%에 해당되는 이들이 사회 공동선에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매우 긴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회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척도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사회의 가장 가난한 이들부터 사회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자주성과 자율성이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에서 차별받고 무시당하여 소외된 이들을 만나실 적마다 반드시 빼놓지 않으셨던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만나러 온 사람의 눈을 쳐다보고 그의 말을 들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쳐다보나마나, 물어보나마나 뻔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항상 사람의 눈을 쳐다 보아 주시고, 그 사람의 입으로 말을 하게 하셨으며, 동의할 수 있도록 늘상 참여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눈을 쳐다 보거나 물어봐 준다든가 동의를 받는다든가 하는 행위는 인격적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처신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공동선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공동선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참여해서 기여해야 하지만, 비록 국가 정부가 공동선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보다야 훨씬 그 몫이 적고 보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몫을 인정해 주고 살려주며 우선시한다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로부터 발견되는 복음선포의 고유한 특징으로서, 인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주적이고 자율적이어야 하는 보조성 원리의 근거입니다.
보조성 원리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인격적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보잘것없는 이들이 소외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누구나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그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선이라 하더라도, 설사 그것이 사랑이라 하더라도 당사자가 모르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 원하지 않는 때에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주면 독이 됩니다.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늘 무언가를 청하는 기도를 하지만 때를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정작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필요한 정도로 도와주시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보조성 원리는 모든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체제를 반대합니다. 힘있는 소수가 끌고 가는 사회, 소수 엘리트들이 ‘묻지마 방식’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반대합니다. 그 대신에,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는 사회, 덜 똑똑하고 덜 배운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물어보아 주는 세상, 설사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더라도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더 귀하게 여기는 그런 사회 현실을 원합니다. 보조성 원리는 가톨릭 사회철학의 고유한 원리로서 능률과 완벽을 앞세우는 비정한 사조를 비추는 빛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오른손을 붙잡아주고 계시는 세상의 약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에 따라 이루어진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나, 아프리카의 이슬람 신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려 했던 샤를르 드 푸꼬의 선택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 만남과 선택은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결과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려던 예수님의 선택을 본받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보조성의 실천입니다. 이 명제가 목표로 하는 가치는 “더 나은 세계는 꿈이 아니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79항) 라고 호소했던 바오로 6세의 가르침입니다.
끝으로 오늘 성무일도 제2독서기도에 나오는 겅 암브로시오의 권고 중 한 소절을 전해 드립니다
“여러분 각자 안에 하느님을 찬송하는 마리아의 영혼이 깃들고 또 여러분 각자 안에 하느님 안에서 마음 기뻐 뛰노는 마리아의 영이 깃들었으면 합니다. 육신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한 분이시지만 신앙으로 볼 때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의 열매이십니다. 흠 없고 죄의 성향에서 벗어나 있으며 티없는 수줍음 가운데 정결을 보존하는 영혼이라면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영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