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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강한 민족
민족이 하나 된 마음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 압박과 설움에서
대한 독립을 위해 고이고이 접어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높이 높이 들고 온 민족이 하나된 마음으로 외친 3.1 운동
난 그 때 태어 나지도 안 했다
그리고 1945년 815 광복
,어린 내가 뭘 알았겠나 어른들이 좋아 하니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마냥 따라 즐거웠다
내 나이 41년생 먼 길 걸어오면서 다사다난했던 일들 볼 것도 못 볼 것도 보고 듣고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여기에 나열해 본다
일제 치하 언니 오빠들은 학교에서 간솔 을 따오라고 해서
산에 가서 간솔(소나무 괭이) 따서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일본 보국대 가시고 고사리손으로 농사일을 돕기도 했다
언니들은 학교에서 해 오라는 일도 많았다 간솔로 기름을 만든다고 했다
가정에서는 밥그릇 숟가락 할 것 없이 놋그릇은 모두 공출을 내야 했다,
모두 공출 내고 열합껍질로 밥을 먹고 박 바기지에 밥을 담아 먹었다,
그당시는 스텐이 없고 그릇 모두 놋그릇 뿐
더러는 놋그릇을 땅에 묻어 숨기기도 놋그릇에 녹이 쓸면 기와장을 부수어서 짚 수새미로 닦아 썻다
농사지은 것도 가을마당에서 모두 공출 내고 식량이 없어
초근목피(풀뿌리나무껍질)로 목숨을 부지하고
파란 보리가 누렇게 익기를 기다리던 보릿고개란 춘궁기를 보냈다,
밤에는 두 방 봉창 사이에 호롱불 하나를 켜고 살았다.
그때는 불을 켜는 기름을 왜기름이라 했는데 지금의 석유
왜기름은 배급이 나왔다
어른들은 일본 사람을 왜놈이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작을 왜 일본사람 아주 작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기름은 일본 기름이란 소리다
그 당시 땔감은 산에서 나무를 해서 밥을 짓고 그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온 역사가 채 백 년도 안 되었으니
너무나 빠른 역동의 시대를 살았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팔 부자다
호롱불 밑에서 꼬챙이에 몽당연필을 끼워 또박또박 글을 쓰던 아이 지금은 호호 할머니
전등불 애래서 컴퓨터로 이 글을 쓴다. 즉 말하자면 시대의 증인이다,
그 당시 내 나이 게우 다섯 살인가? 대여섯 된 아이가 뭘 았겠나만
그래도 일본식 이름이 있었다 내 일본식 이름 가하모도 에이준
어린눈으로 본 기억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하얀 쌀밥
이팝꽃 허들지게 피면 나는 아햔 쌀밥이 생각난다
지금이야 있어도 많이 못 먹지만 생명이고 명줄인 한톨의 쌀
농민의 손이 팔십 여덟번 간다는 쌀 (米 위에 팔 가운데 열 아래팔)
나는 지금도 어릴 때 생각하면 보석보다 하얀 쌀이 더 귀하게 보인다
평생을 살면서 하얀 쌀밥을 귀히 여기고 밥알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음식 쓰레기통에 버려진 하얀 밥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않는다 하늘이 부끄러워서 너무 겁없이 사는 사람을 보면
보릿고개 다시올까 두렵다
우리나라는 양대국 미국과중국 사에에 샌드위치 나라
힘이 보배라 했다 힘을 길러야 한다 아무도 넘보지 않게
우리 민족이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살면서 멸시 당한 일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내 어릴 때 아버지는 일 가시고 쌀이 없어
언니 오빠는 나를 담장 높은 집에 쌀 빌리로 보낸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집에 들어 가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자 있다가
어둡살에 울면서 그대로 돌아 온 일 학교 갔다 오면 책보따리는 던져 놓고
땅 속에서 겨우 고개 내민 쑥 뜯으려고 언덕 아래를 헤맸다
쑥은 이른 봄이면 우리 생명을 지켜 주는 명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쑥을 좋아 한다
나는 언제나 식사 시간이면 식사 기도를 한다
식탁에 올라온 푸성귀 하나도 수고 하신 농민이 있어
오늘 이 식탁이 풍성하다는 감사기도 작은 것 하나하나에 감사하면 늘 즐겁고 행복하다
내게는 두가지 원칙이 있다 생활에는 과유불급 인생사는 불광불급
그 원칙에 준해 살았기에 지금은 어릴 때 비하면 부자로 잘 살고 있다
지난 날이 오늘의 밑거름이라고 생각 하며 어제를 돌아보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살자
나를 유혹하는 물건을 보면 언제 부터 잘 살았다고 그런 마음으로 생각을 돌린다
쌀알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긴 여정
초침이 분침을 끌고
분침은
시침을 끌고
세월 속을 달리는데
세월이란 놈은 날 끌고 가다가
여기 던져 놓았다
정신이 멍하다,
바람이 분다
저 바람은
날 어디로 가자는 건지
인생 사막 길
아직
오아시스를 찾지 못했는데
외침과 내란
우리는 구 백 삼십여 차례 외침을 받고 살아온 민족 이다
그래서 더 강한 민족
자유가 뭔지도 모르면서 자유를 잃고 살았다
지난날, 아이가 울면 순사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로 무서웠다.
초목이 벌벌 떨도록 무서운 순사 지금은 경찰 하면 얼마나 정이 많은가
길 잃은 아이 부모 찾아 주는 다정한 사람 그래서 민중의 지팡이라고 말을 하지
내 어릴 때는 주재소라고 했는 주재소 앞을 못 지나 다녔다 순사가 무서워서
일제치하 말기에 태어난 나는
귀막고 입 벌리고 보리 밭에 업드리라는 방공 훈련 받은 기억이 난다
광복후 내란은 얼마나 많았는가,
1945년 독립되고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50년 625가 일어났다,
내 나이 9홉살 5년 동안 치열한 전투 온 국민은 전쟁고아처럼 살았다
밤에는 불빛 새어 나오면 안되다고 불도 켜지 못하고 살다가
1955년 휴전이 되었다, 우리는 종전 아닌 아직 휴전 상태에 살고 있다,
적을 적으로 알지 못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허리 굽고 흰 털 나고 쭈글쭈글하고 다소 추해 보이는 7080세대
오늘날 우리를 이 자리에 서게 한 역군이다
잘살아 보자고 후손에게는 지긋지긋 한 가난만은 물러주지 말자고 허리띠 졸라매고
초가집도 없게 하고 마을 길도 넓히고 밤낮 없이 죽을 판 살 판 일만한 7080세대
혹자는 열대 사막에서 목숨 걸고 후손 위해 일을 했고
먼 이국 전선에서 오직 잘살아 보자는 일념으로 청춘을 불사르기도
다소 추하고 초라한 늙은이 보고 웃지 말거라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우리 부모님이다
6.25 당시 어느날 군에간 외삼촌이 찾아 왔는데 사람을 몰라 보았다
까마 얼굴에 눈과 이빨만 하얀 사람 나는 반가움 보다 무섭기 까지 했다
나는 625를 작접 격은 사람 학교는 인민군이 점령해 놓고 동네를 찾아 다니며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곡식과 반찬을 다 내놓으라 하기도
한날은 우리집에 인민군이 찾아 와서 밥을 해 달라 하는데 여름이라 인민군이 나무밑에
있을때 냄새는 와그리 나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찌든 땀 냄새 일 것이다
나는 들었다 인민군이 하는 소리를 비행기가 날아 가는 것을 보고 천봉사 종간나들
하는 소리를 다행이도 사람은 해고지 않고 갔다
일사 후퇴 이후에 학교에 갔는데 학교는 아수라장 우리는 나무 애래서 공부를 했다
공부라 해도 노래 부르는 것이 거의 전부
지금도 생각 난다 뭉처라 민족의 혼 받치자 충성 하면서 손 흔들던 일들
이땅에 다시는 전쟁 없이 살기를 늘 기도 한다 전쟁의 서러움을 너무 잘 알기에
내 고향 진주 대평
내가 살던 고향은 진주 남강댐 상류 수몰지구 넓은 들 대평
기름진 옥토는 물 밑에서 잠자고 지금은 바다 아닌 바다가 되어 버렸다
옛 시인의 말 처럼 짐생은 모르나니 고향이나마
사람은 못 잊는곳 고향입니다 말 했듯
나 역시 부모님 벼 묻힌 곳이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내고향 진주 대평
내 잔뼈가 자라던 곳 시골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동네
나스스로 생각해도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 이야기를 해 본다
두뫼 산골 외딴 마을 하로에 불씨를 묻어 놓고 아침이면 그 불씨를 살려 밥을 해 먹었으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아니고 뭐란 말이고
부싯돌이란 소리 들어 본 사람 몇이나 될까
부싯돌로 불을 부쳐 아버지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자랐다
불씨가 꺼지면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그건 아무나 못한다 아버지만 할 수 있었다
문명이 서서히 들어 오면서 성냥 을 알았다 아리랑 성냥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어릴 때 기억들을 왜 잊지 못하는가.
내가 생각해도 아주 어릴 때 일어난 일들 하나 같이 기억이 생생 하다
집에서 조금 먼 언덕아래 옹달샘이 있는데 그 물을 머리로 여다 먹었다
어린아이가 물을 이고 오면 반은 쏟고 집에 오면 반만 남았으니 옷은 물 투성이
그 와중에도 초등학교 들어기전에 천자책을 읽었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어머니 살아 겨실 땐 천재 났다고 신동 났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우리 집 바로 앞에 서당이 있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외딴곳이라
먼곳에서 아이들이 한문 배우려 오곤 했다
서당 선생님이 나를 무척 귀여워 하셨다 영리한 아이라고
그 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어릴 때는 사람들이 눈에 다래끼가 자주 났다 눈다래끼 낫게 하는 방법
눈위에 다래끼가 나면 발바닥에 한자로 천평(天平)이라고 쓰고
눈 아래 나면 지평(地平)이라고 쓰면 잘 낫는다고 하셨다
내 일곱살 때 선생님은 일곱 인자를 가르쳐 주셌다 人 人 人 人 人 人 人
1사람이 2사람을 3사람이라 하니 4사람이면 5사람인가 6사람이라야 7사람이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잊어 본일 없는 이 글자
그리고 직장 생활할 때에
에전에는 눈 대래끼 나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영양 싫조 아닐까 생각 한다
눈 다래끼 낫는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해 주고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는 것이 힘 아닌 약이 된 셈이다
사람 운명은 한치 앞을 모른다더니 어머니가 일찍 돌아시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이 험한 세파에 용케도 살아 남았다
어머니 보다 곱절로 살았으니 어머니 못다사신 명을 내가 받았을까
어머니 얼굴도 희미한 기억 뿐인데
그립다 어미의 어미가 되어도 어머님은 그립다
늑골 밑에 아픈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하얀 찔레꽃 피면
하얀 웃음 속에 노란 그리움을 담고
해마다 사랑의 향기로 찾아오는
찔레꽃 피는 계절
찔레꽃 하얗게 핀
음력 4월 초엿새
어머니는 하얀 꽃가마 타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난 아직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고
늑골 밑에 아픈 그리움으로 붙들고 있다
제대로 가시지도 않은
찔레꽃 향기보다 진한 어머니 젖 냄새
어미의 어미가 된 지금도
찔레꽃 피면 내 눈가엔 이슬이 맺힌다
소 물먹이는 가시네
팔십 평생을 살면서 중년에는 바쁘게 사느라고 어떻게 살았는지
고생은 했다만 기억이 벌반 나지 않는다
어릴 적 기억은 생생히 떠 오르니 무슨 조화 일까
시골에는 소 한마리가 재산 목록 1호
농사철엔 소가 큰 일 군 이다
그래서 사람은 한끼 안 먹어도 소는 잘해 먹였다
소죽 끓이면서 영양가 높은 콩을 넣어 주기도 하고
그 때는 여름 겨울 없이 작두에 짚을 써려 소죽을 끌어 먹엤다
손은 왜 그리 잘 터는지 소죽물에 손을 씻으면 낫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죽 끌일 때
쌀 겨를 넣어 끌인 영양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크림 한번 바르지 않고 일만 했으니 손등에 피가 나기도 어쩌다 시골 장에가서 동동 구리무 (크림)
한통 사다놓으면 온 식구가 명약처름 바르기도
언제 부터 북을 치며 팔로 다니는 동동 구리무 장사가 다니기도 꿈 같은 시절 이야기
여름철 아침에 자고 나면 소 풀 먹이려고 꼭 몰고 나가는데
소 풀 먹이는 것은 내 책임 이였다
소도 아침에는 오후처럼 많이 먹지 않는다
학교 갈 시간이 다 되어가고
소를 아무리 많이 먹이고 싶어도 양쪽 배가 빵빵 해지지 않아
몰고 오면서 물가에 가서 물을 먹이면 양쪽 배가 빵빵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말을 잘 한다
소를 물가에 데리고는 갈 수는 있어도
물은 먹이 지 못 한다고 소 제가 먹어야 한다고
부모가 자식 공부 아무리 시키고 싶어도 제가 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학교 갈 시간은 다 되어가고 소 배는 일어나지 않고
다급한 마음에 소를 물가로 끌고 갔다 소가 논에 물을 빨아 먹으면
주변에 물을 다 들어 마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소 풀을 먹이다 급하면 물가로 끌고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참 억척이었다
화살 같은 세월에 끌려 지금은 호호 할머니
그래도 그 때가 좋았 노라고 아팠던 추억도 추억이라
추억을 되새김질 해본다
돌아 갈 수 있다면 돌아가서
소일 삼아 소 풀도,물도 먹이고 이러고 살고싶다는 헛된 꿈울 꾸어 보다
시골에는 어린 아이도 일을 했다
농사 철에 고양이 손도 쓰인다는 말이 있듯
여자 아이도 소 몰고 풀 먹이려 다녔 으니
목동이 따로 있나 나도 한 때는 목동 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소 물 먹이던 가시네
어린날의 추억.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 대롱에 가지고 왔다는 목화
내 어릴 때는 목화를 심어서 길삼 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머니는 밤마다 물래을 돌려 실을뽑아 베를 짜고 우리는 그 무명실로 호롱불 애래서
뜨개질을 했다 양말도 짜고 장갑도 짜고 그 시절은 춥기는 얼마나 추웠는지 옷에 솜을 넣어 입었다
여자들은 윗옷은 솜을 넣어 입었지만 아랫도리는 늘 썰렁 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 삼칸 태운다는 말 들어 보았는가 에전에는 화확 제품을 안쓰니 빈대 벼룩이 이
사람 살을 파 먹고 사는 해충이 많았다 빈대는 하룻 밤에 고손자 까지 낳는 다는 말
그만큼 번식이 많다는 뜻이겼지 무명웃에 비누도 없고 자주 못 갈아 입었으니
이 벼룩이가 얼마나 많은지 저녁으로 옷을 벗어 밖에 내놓는디 이가 얼어 죽으라고
그리고 옷 솔피에 보면 이가 알을 씰어 놓은 것 씨깔이라고 했다
그 씨깔이를 호롱불이 찌지만 타닥타닥 하는 소리 지금도 귀에 생생 하다
짚을 땐 재를 시로에 담고 물을 시루에 부으면 노란 물이 나오는데
그물에 빨래를 주물러 푹푹 삶아서 냇과나 웅덩이에 이고 가서 겨울에는 방망이로 얼음을 까고
두들겨서 씻어 푸답해서 입었으니 아이들 손도 놀리지 않았다 고무장갑이 있나
맨손으로 그 많은 식구 옷을 씻고나면 동맹이가 된 손
젖가슴에 넣으면 눈에서 별이 보이더란 소리 전설이 아닌 어머니들이 격고 건너온 강이다
강에가서 빨래 씻고 그물을 들어다 식수로 쓰고 했다 화장실은 어쨌는지 이야기 하면 전례 동화 같다
그러나 내가 직접 격은 일이다 지방마다 화장실 이름이 다 다른데 경남 우리 시골에는 통시라고 불렸다
따지고보며 똥누고 시 한다는 뜻이 아닐 까 싶다 ㅎㅎ 화장지가 없었으니 짚 부드러운 곳을 추려 뒷 처리를 했으니
상상도 못할 일 화장실 똥물도 한방울 안 버리고 살아온 우리 보모님 세대
농사 지으려면 비료가 없어 똥장군으로 보리 밭에도 똥물 주고 여름채소도 똥물로 키웠으니
채독이란 병이 있었는데 얼굴이 누렇게 되고 손톱이 들어 가는 병 채독 약은 얼마나 독한지
지금 생각해 보면 채독이 바로 똥독이다 그래서 생무는 서리 오기 전에는 먹지 말라 했다
먹는 것이나 제대로 먹었나 아이들 머리에는 빠이독이란 부스름이 나서 파리가 우글거리고
그 때는 코피도 자주 났다 누른 코흘리개 아이들은 옷 소매로 코를 닦아 소매 끝이 소가죽 같이 되고
겨울에 그렇게 추워도 내복이 있나 그런 것 있는 줄도 모르고 가난 하게 살면서
우물안 개구리 같이 누구나 그렇게 사는것인 줄만 알았다
머리에 이는 어떻고 머리이는 까맣는데 교실에 앉아 있으면 앞의 아이 머리에 이가 스물스물 기어 다니기도
이야기 하기도 부끄러운 역사 아직 그시절 사람이 살아 있어 이 이야기를 쓴다
여름에 홍수는 왜 그렇게 많이 나는지 집이 떠 내려가고 지붕위에 사람 살려 달라고 손을 흔들어도 속수 무책
지금이야 119도 있고 소방 헬기도 있으니 살릴 수 있겠지
소가 떠 내려가고 돼지가 떠 내려가고 소는 수영을 할 줄 아는데 왜 물에서 못나 왰는지
물이 너무 많고 물살이 세어서가 아닐까 지금 생각 해 보니 그렇다
아무래도 산이 벌거숭이 민둥산이라서 홍수가 많이 났으리라 그래서 우리 어릴 때는 사방사업을 많이 했다
그때는 꼬마 학생들도 일을 해야 했으나 나도 산에 따라 다녔다
그러다가 625 이후에 문명이 서서히 들어 오기 시작 하면서 나일론 양말이 나오고
양초가 들어 오고 산골 외딴 마을에도 (방물장사) 보따리 장사가
문명을 물어다 나르면서 시골 생활이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다
나일론 양말이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호롱불만 켜고 살다가
양초로 불을 켜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아~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그리고 625 이후에 문맹 퇴치 운동이라고 마을 회관 회관이라 해도 창고 같은데
거기서 밤에 마을 여자들을 모아놓고 한글 공부를 시켰다 불이라야 호야 불 호롱 불보다 조금 밝은 것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어린 내가 한글 좀 안다고 글을 가르쳤다 참 재미 있는 일이다
낮에 일하고 밤이라 사람들 반은 자고 반을 듣고 난 그때 일이 잊을 수 없다
교재라야 이런 글 십리 절반 오리 나무 따끔따끔 가시나무 아장아장 자작 나무 가가보니 가당 나무 오다 보니 오동나무
나도 참으로 어린 아이 였다 마을에서 소문 날 정도로 공부 잘 했다고 반장이 와서 나를 시킨 일이다
지금 아프리카 를 보면 우리도 그 생활과 다를 바는 없다 그래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그랗게 살아 온 사람이 지금 이글을 쓰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고 넘어 가고 싶다
와라지를 아는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물어 보니 알고 십년만 작아도 모르는 소리
와라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와라지는 짚으로 삼은 슬리퍼 같은 것
어른은 짚신 삼아 신고 아이들은 와라지를 신었다
여름엔 나무로 만든 게다를 신다가 검정 고무신이 나오기 시작 했다
그 질긴 고무신이 구멍이 나도록 신었다 어쩌다 신어보는 나비 고무신
나비 하나 붙었다고 나비 고무신이라고 말을 했지
학교에 가면 아침 마다 책보를 풀어 놓고 그 보자기로 강가에 자갈을 담아 날랐다
예전에 도로를 신작로라 했다 비 포장 도로 비가 오면 진흙탕
날이 좋으면 먼지 투성이 고사리 손으로 주워다 나른 돌자갈
학교옆 산장로에 깔아 놓으면 비올 때가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원시적인 생활
곱슬머리에 눈이 크고 키작은 아이 그래도 인기는 있었는지
부자 집 아이는 내 곁에 않기를 원했다
가끔 연필도 지우개도 얻어 쓰기도 하고 그런 추억도 잠시잠깐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님이 돌아 가시고 백일도 되지 않은 동생을 키워야 했다
결국 그 동생은 별이 되었지만
부모님 덕으로 받은 교육 이라고는 초등학교 2학년이 전부였다
새 어머니가 들어 오시고 나는 도시로 나오면서 그 때부터 불나비가 되었다
불빛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찾아 갔으니
주경야독 낮에는 직장생활 하면서 야학을 했다
2학년 밖에 못한 나는 6학년에 들어가서 나올 때는 우등상을 받기도 했다
배움에 목마른 나는 직장을 부산에서 대구로 옮기고 야간 학교를 다녔다
기숙사에 늦은 밤 전기 소등을 해 버려서
정원외등아래 하루살이 모기에게 내 살을 내 주면서 밤 이슬에 책장을 적시면서 공부 한
참 억척 같은 가시네 지금의 나다
직장생활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게는 새로운 철학이 있었다
자식들을 바르게 키워 사회 일원으로 내 보내겠다는 철학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잘 해 주어서 성적표 받는 날이면 잔치집 분위기
삼남매 모두 서울로 유학 보내놓고 내려다 보던 자식을 쳐다 보게 되면서 나도 같이 크자
늦깎이 공부를 시작 했다 경북대학교 명예 대학생으로 들어 가서
졸업후 270명중 27명이 대학원에 가서 2년 수료 하고 끝내 석사 모를 썼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나는 그 때 한 없이 울었다
세월은 빨라 어느듯 내 나이 팔십 고개를 넘었지만 나태 하게 살지 않을 것이라 다짐 해 본다
내일 없는 오늘 없듯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노는입에 염불
나는 학교 공부만 잘 하면
학원에는 안 보내도 된다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 었다
딸 아이 중학교 평균 성적 거의가 만점
이정도면 고등학교 가서도 잘 할 줄 알았다
고등학교 가서 첫 전국 시험을 쳤는데
수학은 잘 나왔는데 영어가 내 욕심에 차지 않았다
그 때서야 내 생각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어학은 일찍 부터 해야되는구나
그래서 중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집중 투자 하기로 했다
영어 테이프를 사주고 학원에도 보냈다
어느날 화장실에 들어가는 아들에게
노는입에 염불 한다고 했더니
금세 눈치 채고 카세트를 들고 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잘 돌아 가는데는 극성 스러운
어머니들이 한 몫 했으리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공부 하면서 그런대로 내 욕심을 꼭꼭 채워 주었다
나는 가끔 말 한다
나도 너희들 같은 엄마만 있었으면 나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노는입에 염불이라도
마음것 해 보고 싶다
사람 욕심 한이 없다 다시 아이들을 키운다면
후회 없이 키울 것 같다 후회란 단어 자체가
늦게 깨달았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은 대리 만족을 하고 있다
예쁘게 자라는 손자 손녀 들에게서 그래 이제는
대리 만족이나 하고 살자 노는입에 염불은 무슨 염불
가정의 달에
콩 심은 자리 콩 나고
팥 심은 자리 팥 난다는 말
자식을 평가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평가해 보자
나는 부모님께 어떤 자식인가를
무슨 일이든
멀리 찾을 것 하나도 없다
내 자식이 귀하면
부모님도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을까?
내리 사랑이라 했다
자신이 부모님 거울이다
가정의 달
효를 저울 위에 얹지 말자
자신이 바로 저울이다
아픈 세상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의 아픈 역사
일제 36년의 식민지 생활을 끝낸 후 건국 대한민국을 수립했으나
우리에게는 또 아픈 역사가 있었다
315 부정 선거 참을 수 없는 부정을 참지 못하고 대구로부터 시작한 젊음의 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419의거 학생들 희생에 힘입은 국민의 소리
서민들은 곳곳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는 아우성 치던 뼈아픈 역사
나는 그 당시 대구에서 직장 생활 할 때 선거 유세 장에도 가보았다
수성 천에서 야당 선거 유세 하는데 학생들 못가게
일요일데도 학교 등교를 시켰다 그 때 부터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데모를 했다
나는 그 때 신문을 받아 보았다 아침에 조간 저녁에 석간 이라 하면서 나오는데
어느날 부터 신문이 까맣게 나왔다 국민들이 못 보게
나는 그 때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야간 고등학교를 다닐 때다
그러다가 516 군사 혁명이 일어 나면서 민주당 정부가 무너지고
사로운 세상을 살았다 그런대로 살만하니 또 다른 1212 사건
우리 삶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으니 그래도 나는 배워야 겠다고
직장으로 학교로 내 청춘은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국민 가슴에 피로 물들인 518 광주 사건 이 모두가 아픈 역사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듯 그럴 때 마다 서민은 허기진 삶을 살아야 했다
언제나 가난에 몸부림치는 삶
부모는 자식 4년 대학 공부시켜 놓으면 취직 걱정
이 걱정 저 걱정 하다 보면 인생은 황혼 이제는 편한 길 걸을까 하는데
상상도 하기 싫은 코로나 역병 인생사 거친 파도가 몰아 닥쳤다 잔잔한 물나불이면 좋으련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삼세인 순자 손녀 건강하게 잘 크는 것 보는 것
지금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창살 없는 감옥 생활
코로나란 불청객이 부모 자식 간계도 거리 두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코로나는 세계의 벽을 더 높이 세우고 부모 자식과도 거리를 두게 한다
해는 서산으로 쉼 없이 달리고 있다. 서러워라. 슬픈 샌드위치 7080세대
이것이 아픈 역사지만 내 삶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고통
1997년 11월 우리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금융 위기 I M F
시골 촌로까지 I M F 란 영어를 알게 되었으니
그때는 온 국민이 하나 된 마음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아기 돌 반지도 들고 나갔다
금 모으기 운동 피땀으로 이루어 놓은 이 나라를 살려 보자고 허리끈을 또 졸라매었다,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이다
1996년도 우리집을 지으면서 욕심스럽게 크게 지어 세를 놓아 노후 생활 하려 했다
사람들이 월세가 부담스러워 전세를 선호 해서 전세를 놓았다 전세돈을 받았는데
형제 간도 돈 냄새를 맏고 빌려 달라 하기에 나는 생각 했다
이건 남의 돈인데 하면서 인근에 집을 한채 사서 원룸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세들어 살때 IMF 터졌다 세든 사람이 부모 집으로 합쳐야 한다고
너도 나도 나가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얼마나 고생을 했든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 처진다
우리는 저력있는 민족이다 그 어려운 와중에 1988년도에 꿈에도 그리던 올림픽을 유치했고
2002년도에 월드컵도 유치했다 우리 오두 하나 된 마음으로
오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그때는 아이 어른 너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했구나 싶기도 하고
거리마다 태극기 물결 힘찬 아우성 모두 하나 된 마음이었다
지금은 나라를 다스린다는 위정자들
이합집산 (離合集散) 국민 분열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 들이 서럽다.
하나 된 마음으로 다시 뭉치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이 아니냐
오늘이 있기까지 소 한 마리가 학사모를 만들고 부모님 개미허리가
박사를 만들고 연구원도 만들고 그렇게 그렇게 살았다,
그 덕에 지금은 얼마나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부모의 피땀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 속에 한국은 없다,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을 물리치자고 손 마디마디 굳은살을 만들고 낙타 등을 만들었다,
잊어서는 안 될 지난날 우리나라 아픈 역사
가슴 뛰게 하는 일들
오월 가정의 달
우리나라 1인당 국민 소득 3만 불 시대에 살고 있다
삶의 여유가 있기에 모두가 챙기는 오월 가정의 달
가족 간에 사랑을 다짐하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1919년 3,1운동 무렵 어린이날이 있었다고 하니 약 백 년의 역사
어린이는 꿈이고 희망이다,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우리를 가슴 뛰게 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어버이날이 있어 가슴 뛰게 한다,
효는 삶의 근본이다,
우리를 이 자리에 서게 한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어버이날
예전에는 그런 날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고 살았다
우선 먹고살기 힘들어서 요즘 사람들은 가난을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식 가난을 모르게 키웠으니까
부모님은 가난이 한이 되어서 자식에게는 되는 것만 가르치고 이기는 것만 가르쳤다.
그래서 작은 어려움도 못 참고 좌절하고 목숨을 쉽게 버리기도 한다. 자살 일등국
지금 가난은 모를지라도 더 어려운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 시대 또 다른 인생의 갈림길 삶이 어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살 것이지 일거수 일 투 족이 조심스럽다.
우리는 맨주먹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기적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노력의 결실이다. 노력 없는 기적은 없다.
지금은 첨단의 시대 경쟁의 범위는 더 넓어졌다, 세계와의 경쟁
가난을 물리칠 때보다 머리를 더 써야 한다, 탁월한 두뇌만이 살아남는다,
오늘의 부를 믿고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보리고개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뛰어야 한다, 더 멀리 보고 세계를 향해 달려야 한다,
가난을 이겨 낸 저력 있는 후손이다,
방심하지 말자 적은 곳곳에 있고 내 적은 내 안에 있다.
나를 이기지 못하면 어떤 일에도 이길 수 없다 인내 하는 힘 나를 이기는 힘을 길러야 한다
존재의 가치
한 사람의 탁월한 지혜가
십만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고인이 된
재벌총수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한 사람의 탁월한 지혜는
만민을 평화롭게 한다
한 사람의 리드가
사회를 끌고 가는데
큰 힘이란 사실을
어지러운 세상은 더 잘 알고 있다
변화의 시대
옛말에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고 나면 강산이 변해 있다,
아날로그 시대는 이미 지났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사람이 변해야 한다. 정신이 변해야 살아남는다.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고 했다. 우리는 제자리 걸음을 할 수 없다.
뛰어라 더 열심히 뛰어라
부모가 손바닥에 물집을 만들면서 망치질 한 그때보다 열배 백배 수천 배로 뛰어야 한다
이것이 조상님이 이 땅을 지켜온 보답이고 보은이다
부모세대는 공부 하고 싶어도 못했다 학교 가고 싶어도 못 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처럼 먹고살기 위해서 모두 그렇게 살았다.
나는 먹고 버리는 껌 하나 사서 씹어 본 일 없이 살았다.
지금 사람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가.
물고기는 물 없으면 못 살면서 물의 고마움을 모르듯
지난날을 너무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너무 급하게 하루속히 일락 천금을 노리는 것이 문제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속담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급하게 먹는 음식이 체하듯 현실을 직시하고 꿈은 크게 부모님 노고를 잘 알고
부모님이 뭘 바라는지 부모님 마음을 헤아려 주면 좋겠다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이다
그런데 왜 자살이 많은지 너무 호사스러워 죽을 생각을 한다.
지금은 노력하면 살 수 있다
저마다 타고난 자질대로 길은 천 갈래 만 갈래 사람 생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세대
일부 몰지각한 사람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지금 일어나는 사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심히 걱정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본다
어린 나이에 625 잿더미를 헤집고 높디높은 보릿고개를 넘어온 사람
설상가상으로 어머니 젖 냄새도 가시기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주경야독을 했다.
직장생활 하면서 기숙사 전등불이 꺼지면 정원 외등 아래서 하루살이 모기에게
내 살을 내주면서 밤이슬에 책장을 적시면서 공부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내게는 새로운 철학이 있었다,
자식만은 바르게 키워 사회 일 원으로 내보내겠다는 철학
자식들 다 키워 놓고 늦 깎기 공부를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7080세대가 살아온 역사를 바르게 알리고 싶은 욕심이다.
호롱불 아래서 몽당연필에 침을 무쳐가면서 숙제하던 아이가
문명의 힘입은 호호 할머니가 된 지금 전등불 아래서
먼 길 걸어오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담아
컴퓨터로 매일 한 편의 시를 쓴다. 후손들 잘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여한은 없다.
이런 일이
가난한 종가집 며느리는 할일도 많은기라 잡안 대소사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아무리 바빠도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어른들은 종가 며느리는 꼭 찾는다
우리가 종가 된 이유인즉
제일 큰집이 자손이 없었다는데 큰아버님을 양자를 드려야 하는데
종가 집이라고 식견이 있어야 된다고 큰아버님 아닌 둘째를 양자를 삼으셌단다
그 덕에 우리집 양반이 종손이 되었다 나는 종부가 되고 땅떼기 하나 없는 가난한 종가에 들어 가서
시아버님이 무척 고생을 하셨다 한다 보다 못한 시집간 딸이 논마지기를 사 주시며 아바지 붙혀 먹으라 했단다
해필 그논을 아들 앞으로 등기를 하셨다 시아버님 돌아 가시고 내가 관리 한 것만 50 여년
우리 주인양반 누나인 시누이도 돌아 가시고 그러나 나는 곡식을 받아 반 씩 나누어 주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논을 경리정리 하면서 동네 입구로 오게 만들어 놓고 나는 매년 세금을 냈다
예전에서 시골까지 가서 세금을 냈지만 지금은 대구서도 낼 수 있어 놓다
그 때는 그랬다 그런데 우리집 양반 병중에 있으니 시누이 며느리가 찾아 와서
논을 돌려 달란다 시골 논 붙이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평당 십만원 정도 한다고 한다
절반인 천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냥 가셨다
며칠 전에 다시 찾아 와서는 이 천만원을 달란다 나는 말 했다 어떻게 된 사유인지 나는 모르지만 50여년을
내가 세금내고 관리 했으니 내게도 절반은 권리가 있다고 논 절반을 넘겨 줄테니
분할측양 해서 양도세 책임 지고 넘겨 가시라고 했다
내가 너무 단호 했나
한참 고추 먹은 표정을 하다가 계좌번호를 주면서 내가 하자 하는대로 하겠다면서 가셨다
양심에 가책 되는 일은 아닌것 같은데 그 큰돈이 아직 없어 못 부쳐 주고 있어 마음이 무겁다
잘 못은 아니겠지 난 내게 반문 해 본다
사대 종손 구 남매 맏며느리 그 높은 고개를 어떻게 넘어 왔을까 다시 생각해도 멀미 난다
인생사
가정이란 공동체는 너무나 소중한 것 그 가정을 이끌어 가려면 가장 책임이 막중 하다
삶의 첫번째가 경제적 문제 해결 그래서 사람은 노력한다
노력의 대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 운이 좋아 기대 이상의 결실을 보는 사람
거기서 빈부의 격차가 생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생각하고 노력은 다른 사람 곱절로하고 절약 하는 길을 선택했다
백원 쓰는 사람과 백원 저축 하는 사람은 훗날 두배 차이가 난다 그것은 내 철학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빠듯하게 사는 나는 그렇다 그래서 옛 말에도 있듯
돈 버는 자랑 말고 쓰는 자랑 하라 했다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 자식들도 그렇게 살란 소리는 안 한다
우리가 못한것 너희들은 하고 살아라 누릴 수 있으면 누리고 살아라 돈이란 쓰자고 버리는 것 나는 자식들을 믿는다
기본이 된 사람이니 낭비는 안 할 것이라 믿는다
가랑비 옷 젖는줄 모른다 했다 이것이 선조님들의 지혜다
돈벌기 위해 장사를 했다 집에 작은 공장을 차려 놓고 옷을 만들어 상인들께 공급하는 옷 도매 상을 23년을 했다
자식들은 민들레 씨앗처럼 훨훨 날아 다른 토양에서 자리 잡고 살고 있다
지금은 내 사고도 많이 변했다 이미 해는 저물어 서산으로 넘어가는데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살자
아웅다웅 하지 말자 물 흐르듯 순리에 순응 하자
지금까지는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이제는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서로 사랑 하며 베풀면서 살고 싶다
마음을 비우고나니 무거운 짐 내려 놓은 뜻 홀가분 하다
짧은 여생 깃털처럼 솜털처럼 부드럽게고 가볍게 살리라 다짐 해 본다
부모는 끝까지 자식 운전기사
요즘은 자가용 없는 사람 없다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 보다 귀한 세상
우리 아이들 학교 다닐 때 자동차 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았다
아들은 하루 학교 한 번 가는데 나는 세번을 갔다
아침에 등교 시켜주고 저녁에 밥해가지고 가고 늦은 밤엔 데리로 갔다
늦은 밤 자동차 없는 친구를 한차식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으니
운전기사 치고는 1급
요즘은 어머니 운전기사가 많다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를 학원 태워 주고 학교 등교 시켜 주고 어머니 할 일이 더 늘어 났다
자식들을 키우다 보면 언제나 심장은 붙들어 메고 살아야 했다
바람 쌩쌩 부는 날 늦게까지 일 하고 따뜻한 방에 들어 와서 눈 좀 붙이고 싶은데 아들 데리러 가야 했다
그 것도 하늘에 해 뜨는 날 일요일도 없었다 공부가 뭐 길래
자식 혹사 부모 혹사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난 일을 생각하며 그 때가 좋았다고 하나 보다
아이들은 꿈을 먹고 살고 어른은 추억을 먹고 산다
큰아들 중학교 때 영어 공부 시켜 놓았더니 고등학교 가서 엄한 일을 했다
영어 하는 학생끼리 모인 파인추리 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2 학년을 보내 더니 3학년이 되어 첫 모이고사 치는 날
3학년 선생님 어머니 회원 저녁 식사 같이 하자고 나오라 해서
나깏더니 선생님이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1.2 학년 때 잘 나가던 여석 시험 잘 못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 학교로 아들 델로 갔다
아들 역시 내 눈치를 본다 나는 그 때 말 했다 너 이번 시험 300점 넘으면
대학 못간다 그랬더니 아들이 어리둥절해 한다
한참 있다가 엄마 왜 하기에 300점 넘으면 또 방심 할 것 아니냐
아들 고등학교는 특설반이 있어서 나는 특설반 어머니 회장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1,2학년 때 엄한일 한 후유증으로 3학년이 되어서
죽도록 고생을 했을 것이다 대학 입학 원서를 내 놓고 마지막 학기
학교 책 가지려고 갔다 문제집을 한차 싣고 집에 와서 한권한권 살펴 보았더니
공부 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대학 입시는 큰 걱정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러나 부모 마음이 초조 하기는 매 일반 나는 몇 날을 연구 했다
상위 몇 % 중 각기 갈 학생을 분산 하니 원서 난 곳에 무난히
들어 가겠다 싶기도
발표 나는 날 까지 가슴 죄인 것 부모나 학생 당사자나 다르지 않았다.
발표나는날 아들 영어 회화 학원데리고 나는데 아들이 말한다 엄마 떨어지면 어쩌지
나는 두 말 하지 않고 시험이란 붙을 수도 떨어 질수도 있는 것
떨어지먄 이틀 뒤에 난셈 치면 되지 했다 2월 26일 생이니 3 월이면 한해 뒤에 입학 하니까
아들은 그해 무난히 합격 해서 잘 다니더니
일년을 넘게 다닌 어느날 전화가 왔다 학교 자퇴 하겠단다 전과를 하겠다고
하늘이 노랗다는 말 그 때 어떤 것이지 알았다 화장실에 갔더니 소변이 노랗다
불이 나게 나는 서울 올라 갔다 아들 고집을 꺽지 못하고 종로 학원에 찾아 갔다
살장님이란 사람이 단호 했다
여기 그 학교 못 들어 가서 많은 학생이 재수하고 있다고 거절 당하고
설득이 되었나 했는데 아들 고집도 단호 했다 어느과로 가고 싶냐 했더니
사회 학과를 가겠단다 그 당시 데모가 심할 때 나는 비로서 노발대발 했다
데모하로 갈거냐고 법대 하고도 안 바꾸고 싶은 과 인데 했더니 그럼 법대를 가겠단다
결국은 내가 지고 대성 학원에 갔다
대성학원 실장님이 나는 그 과에 못나온 것을 지금도 후회 한다고 거절 당하고 내려 오면서
휴학을 하라 했더니 자퇴를 하고 결국 시험처서 대성 학원에 들어 갔다
구비구비 부모는 간 떨어 질까 심장을 붙들어 매야 했다
난 처음 부터 머리 좋은 사람이 경제나 경영을 공부해야 나라가 잘 살 수 있다고 했다
아들이 고집을 부리도니 결국 탈을 냈다 내가 간곡히 원하니 딸이 그럼 내가 경제 학을 하겠다 하고
막내가 경영 학을 했다
그리고 그해 아들은 법대 합격 했다 그러던 아들이 50 줄이 가까와 오는데
이제 와서 엄마 말이 맞았다고 경영학을 하겠다고 회사 다니 면서 방통대 경영학을 하고 있다
삶이 참 파란 만장하다 시간은 흘러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모두가 추억 일 뿐이다
몸 하나에 할이은 많다
사람 사는 일이 하루 같은 일은 없다
나는 우리집에 작은 병실을 차려 놓고 병원 놀이를 한다
병원 놀이라 하니 참 좋다
우리 주인 양반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 간다는 중풍
뇌경색으로 투병생활 20 여년 와병 생활 3년여 되신 환자를 모시고 살고 있다
사람들은 병원에 모시지 왜 집에서 고생 하느냐고 한다
젊어 같이 고생한 사람 나이들어 병 들었다고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나는 일인 삼역 사역을 한다
형압기로 혈압 책크 형당기로 형당 책크 체온 기로 체온 책크
이발사 면도사 밥알 하나의 무게를 감지 하는 영양사
하루에 오 식 정확한 시간에 담백질 모자리면 안된다고
아침에는 계란 반찬 정심 때는 소고기
저녁에 간편 식사 양 간식은 과일을 드린다
당뇨 한자의 건강 유지 하는데는 영양사 손이 많은 비중을 차지 한다
나이들어 봉사 하며 살겠다고 배워 놓은 수지침으로 침술을 병행 하기도
삼시 세끼 식사는 일일이 내 손으로 떠서 먹인다
식사후 양치는 필 수 식사전 기도 식사후 감사기도
같은 공간에서 숨소리 듣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다
젊어 허튼 짓 하지 않고 바른 길만 걸어온 사람
사랑인지 의무인지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그래도 최선을 다 할 것이다
2018년 4월 1일 교회 모시고 간 후 열이 심해서
병원에 15일간 입원하고 부터 노환이라서 그런지 다리를 못 쓰신다
내 잘 못이다 재활 병원으로 모셔가서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집으로 바로 모시고온 것이 큰 실수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다
이 모두가 내가 짊어 져야 하는 십자가가 아니냐 환자를 모시고 살면서
내일은 없다 오늘 최선을 다 할 뿐 좋은 음식도 먼저 좋은 것은 오늘에
내일은 모른다 하늘의 뜻에 맏길 뿐
지팡이 짚고 다닐 때는 여름이면 도시락 싸들고 팔공산에 모시고 가서
케이불카로 타고 올라가서 시원한 방가루에 더위를 피하고 오기를 매일 같이 했다
좋다는 병원도 많이 모시고 다녔다
나도 팔십을 넘긴 고령이다 아픈 곳이 없다면 거짓 말이다 비가 오려하면 뼈 마디마디 날궂이를 한다
젊어 무거운것을 머리에 이고 다녀서 인지 허리 협착증 아픈 곳이 많다
그러나 병원가서 기다리는 시간이 무서워서 내손으로 내가 침을 낳는다 나이든 사람 병은 완치는 없다
병원에 가도 임시 방편이다 눈 상응점에 수지침으로 관리를 해서 눈 건강이 좋아 안경 안 쓰고 컴퓨터를
하루종일 봐도 눈 피로를 모르니 다른사람 글도 읽고 내 글도 쓰고
살아 오면서 후회되는 일은 더러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다했으니 여한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콩나물도 집에서 길러 반찬을 하고
채소도 베란다에 길러 음식을 만들어서 드린다
양반의 디엔에이를 받고 태어난 사람 젊어 말썽 한번 안 부린 사람 환자라도 얼마나 조용 하신지
그래서 늘 감사 기도 드린다 나는 그사람을 존경한다
아무쪼록 누워서 살더라도 건강 하시길 바라면서
감사 하면서 살자
자기의지 로는 오직 숨 쉬는 것 밖에 못하시는 환자를 모시고 살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단 하루도 못 산다
숨 쉬는 것 밖에 못한다 했지만 병원에 가보면 숨도 자기가 못 쉬고
기계에 의존해서 쉬는 사람이 있다
숨 쉴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하면
원망도 시기도 미움도 없다
난 하루하루가 기적 같은 삶을 살아 간다
기적이 별거야 아침에 눈을 떴다는 것이 기적이다
사람들은 바로 코앞을 못 보면서
너무 멀리 보고 큰 것을 원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기적이 생각 속에 있고 행복이 가슴에 있다고
환자의 숨소리가 안 들릴때 귀를 대고 살며시 들어 숨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것이 기적이구나 그 때 또다시 감사합니다
좋은 인연으로 만나 같은 공간에서 숨소리 들을 때 감사합다
어떤 사람이든 좋은 점만 찾아 보자
사람이 밉게 보면 끝이 없고 좋은점을 보면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환자에게 큰 볼일을 받아 내면서 변비 걸리지 않고 순산 할 수 있어 감사한다
환자 밥 한술 떠 넣어 드리고 설거지 하고 한술 드리고 빨래 널고
입안에 넣고 오래 오래 씹은 것이 체할 걱정없어 감사한다
환자 나이 89세 양치를 시키면서 늘 나는 말한다
금은 보화가 한 창고 있으면 뭐 하나
이 연세에 자기 치아를 가진 것이 보석이라고
소화 잘 시켜 주어서 감사한다
면도 시키면서 농담도 한다 농담이 내 마음의 여유다
없는 놈 돈 이자 깃든 잘 자란다고 면도 해 놓으면 이렇게 잘난 얼굴을
게으름 피우지 말자 내 잠시 움직이면 되는 일이다 하면서
무슨 일이든 일 할 수 있는 나에게 감사한다
큰 것에 감사보다 작은 일에 감사하자 감사가 있어 나 오늘이 있다
마음 문
용서가 신앙이고
사랑이 믿음이다
용서하는 마음이 사랑인 것을
용서 없는
사랑 없고
사랑 없는 용서 없다
마음 문 열고 보면
천국이 바로 여기인 것을
마음 문 닫고
지옥에 살지 말자
천당과 지옥은 내 마음속에 있다
내게는 참 좋은 친구가 있다
나이 들어 자식보다 더 효자 같은 녹색카드 즉 운전 면허증
난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어디라도 달린다
그리고 컴퓨터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엔
이 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다 아침에 해 뜨고 저녁에 해지는 매일 매일
인터넷으로 세계를 여행 할 수 있어 좋다
이 나이에 컴퓨터는 어떻게 배웠는가 돌이켜 보건대
내가 한 일 중에 최고로 잘 한 일이다
막내 아들 군에 가면서 컴퓨터를 집에 갔다 놓았다
만지면 큰일 나는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나도 켬퓨터 라도 배워 볼까 하고
인근에 있는 경북대학 전산실을 찾았다
선생님 하시는 말씀 1분에 몇타 치느냐고 묻는다
아 잘 못 왔구나 하면서 컴퓨터 만져 보지도 안했습니다
부끄러워 하지 말자 몰라서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니야
컴퓨터 전원켜는 것 부터 배우고 글자 만드는 것을 배웠다
다른 사람 뭘 하든 나는 내가 좋아 하는 시만 쓰면서 글자를 만들기로 했다
그날로 부터 서울 공부 하는 아들에게 전화로 배웠다
얼마나 잘 가르쳐 주던지 약 20일 수강 하고 종강 할 때
전산실에서 내주는 숙제를 낼 수 있었다
내 사고 방식은 불치 하문!
모르는 것은 아이에게도 알 때 까지 묻는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
살아가면서 난 속담을 잘 인용한다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 했으니 이왕 배울려고 한 일
끝까지 할 것이다 무슨 일이든 시작 했으면 끝을 내야지
나는 고집 같은 집념이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 하는 시조
태산이 높다 하데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그렇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 하는 것 같이 어리석은 짓은 없다
오늘 없는 내일은 없듯 오늘 최선을 다하자 나는 이런 각오로 내 인생을 살았다
사대 종손 구 남매 맏며느리
가정이란 이질 문화권에서 점목된 각기 개성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이루고
살아 가는 공동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내가 늘 감사 하는 것은 자식들이 내 철학을 능가 한다는 사실
그래서 늘 감사하면서 살아 간다 잘 산다는 것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보다
감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도 말씀 하셨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가족간에 사랑이 없으면 물 없는 사막이다
그 무엇 보다 믿음을 바탕에 깔고 난 년후에 사랑이다
사랑과 믿음 만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정은 특별한 것 없는 아주 평범한 가정이다
나는딸 같은 며느리를 바라지 않는다 며느리는 며느리어야
그러나 며느리도 자식입은 분명하다
캐캐 묵은 삼광 오룬은 따지지 않더라도
부모 자식간에도 신의는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나는 지난 어버이날 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온 가족의 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 사대종손 구 남매 맏 며느리로 살면서 내 선에서
모든 복잡한 일들을 정리 하고 싶었다
나는 불교 대학을 나온 불교 신자다 그러나 자식 따라 개종을 했다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기독교 교리를 따르기로 마음 다짐 했다
지난날 시장에서 장사 하면서
명절 제사를 포함해서 달달이 제사를 지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 자식에게는 그 번그려운 행사를 물러 주지 않기로 했다
윗대 제사는 정리 하고 당대 제사는 간단한 음식으로 기도하면서 정성을 다하자
그리고 사방 팔방 흩어져 있는 산소를
한 곳으로 모으면서 집안 산소도 같이 모으기로 했다
피아노 비석으로 모두 정리하고
낙원 동산이란 이름지어 한 곳에 정리 해 놓았다
이모든 일은 내가 총대를 메고
정리를 해 놓으니 모두 얼마나 좋아 하는지 이 일은 내 숙원 사업이다
집안 산소를 한 곳에 모셔 놓으니 아래대 자손이 한 마음이 되어 더 잘지내고 있다
이 일은 나 스스로가 나를 칭찬 하고 싶은 잘해 놓은 일이다
이제 내 할일을 다 해 놓았으니 사대 종손 구 남매 맏며느리 책임 다 했으니
걱정 한시름 놓아도 되려나
내가 죽어
사랑 할 수 없는 사랑
사랑 하고
용서 할 수 없는 용서
용서 하려면
나를 죽이는 용기가 있어야
내가 죽어
증오가 사랑으로 변한다면
난 나를 죽이는
그 용기로
사랑 할 수없는 사랑
사랑 하고
용서 할 수 없는 용서를
용서 하리라
국채보상운동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본으로 부터
빌려 쓴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거국적인 운동이 일어 났다
이 일은 내가 태어 나기 34년 전 일이니
이 글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처음 말 한 위기에 강한 민족이란
글제와 상관 관계가 있기에 서술해 본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중심 아니 세계의 중심
사방이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 급급해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너무 모르고 살았다 국력이 힘
잘 살아으면 어느누가 우리를 넘 보았겠는가
외침이 우리를 더 강하게 했다
일제 36년동안 아니 34년 11개월 우리는 얼마나 설움을 받았는지
그래서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굼틀 거린다고 했다
약소국 민족의 피가 뭉쳐 폭포수가된 것이
국채보상운동 3,1운동 금모으기 운동 하나된 마음이다
지금은 모두가 잊고 있다 잊어서는 안될 뼈 아픈 역사를
지금도 더러더러 들리는 소리 아기가 태어나면
빚을 얼마를 짊어 지고 태어 난다는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나라 살림이나 개인 삶이나 무서운 것이 빚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난날을 너무 모르고 살고 있다
한번쯤 뒤돌아 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 가는데 위기는 기회라 했다
반만년 역사를 가진 민족 그러나 화려하지 못한 역사
끊어질듯 끊어질듯 이어 온 슬픈 역사
외침과 내란 역시 가난이 원인이다
그때 마다 우리는 하나된 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국채보상운동이나 금모우기 운동이나 419 역시
대구에서 시작 했기에
대구 시민이란 자부심이 큰 힘이 된다 우리 모두 정신이 잠들었거든
잠에서 깨어나자 그리고 일어 나서 다시 뛰자
위기는 기회라 했다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
지금도 평정 시대는 아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 역병 때문에
큰 위기다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수 있다 했다 이 또한 조상님 선견지명의 교훈이다
습관이 참 무섭다.
나는 두 사람 삶을 산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 삶까지
그래서 내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이젠 버릇이 되어서 밤에 바스락 소리에도 잠을 깬다
밤에 환자 기저귀 몇 번 갈아야 하기에 혹시 잠이 깊이 들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 처음엔 생각 끝에 물을 많이 마시고 잤다
그 생활이 삼 년이 넘으니 내 몸이 자동이다
어쩜 그리도 제시간에 일어나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참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내 할 일 하는데 뭐가 대단하냐고 그 일 안 하고 사는 사람 있냐고
그리고 환자가 복 많은 사람이라서 나는 그분 덕에 잘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사실이다
식사는 나도 같이 먹는다. 그분 덕에 나도 잘 먹고 있다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넓은 집에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지금도 자식이 온다고 연락하면 면도할 때 좀 일찍어도
면도도 시키고 환자 몸단장을 시킨다. 환자 모습이 내 얼굴이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있으시니 자식들도 더 자주 내려온다
며느리는 내려오면 시어미 콧바람 시키려고 정성을 다하는 보습이 고맙고 예쁘다
그리고 아버지 용품은 삼 남매에게 분담을 시켜 놓았다
내 말이 떨어지는 즉시 사다 붙인다.
아버지 맛난 것 사드라고 용돈을 주면 환자보다 내가 더 많이 먹기도 한다
내게는 원칙이 있다. 식사는 한 끼도 소홀하지 않겠다는 원칙
며칠 전에도 친정 올케언니와 포항서 병원 하는 원장 조카가 와서
영양제를 놓아 드리려고 갔다
고모님이 환자 간호를 잘해드려서 얼굴이 좋다고 차에 가면서 몇 번을 말하더라고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람이 살면서 인정받고 산다는 것 보람 있는 일이다
요즘은 가정 간호를 정해 놓고 수시로 영양제를 놓아 드린다
힘든다 생각하지 않고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이 삶에 보람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 써 본다
자화상 시 하영순
양식되지 않은 자연산으로 자란
하찮은 잡초인 줄 알았다
산꼭대기에서
그 많은 계절풍을 맞았으니
온실에 자란 화초와 미색이야 어찌 비하랴
눈비 맞아
꺾인 자리
더러는 흠집도 있으리라
아무도 보지 않는 외진 곳에서
향기를 속으로만 채우다가
세상에 나왔으니 그 진가를 알아주는 이 있어
해를 보낸 만큼
값도 올라가는 산삼처럼
누가 흠집보고
흠이라 해도
최고의 가치는 그 속에 있다.
첫댓글 하시인언니는 ~~역사의 산 증인 이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