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아시아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 삼중의 대화 선교
1요한 3,7-10; 요한 1,35-42 / 주님 공현 전 목요일; 2024.1.4.
오늘은 주님 공현 4일 전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신자들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공현 전에 그 뜻을 성경 말씀으로 안내합니다.
공현(公現)이란 베들레헴에서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세상에서 공적으로 메시아로서 알아보게 된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으로 처음으로 메시아께서 탄생하셨음이 공현되기 시작했는데(마태 2,1-12 참조), 장성하신 후에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그분의 신성이 공현되었고(마태 3,13-17 참조), 카나 혼인잔치에서 그분이 첫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에는 제자들과 잔치 손님들을 통해 세상에 그분의 신적 능력이 공현되어 소문으로 퍼져나갔습니다(요한 2,1-12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ㄴ) 하고 그분의 신적인 신원(身元)을 알려주자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사실상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천거한 셈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안드레아였는데, 그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하고 고백하며 시몬을 예수님께 안내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게 된 경위는 그분의 생활양식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사시는 곳을 찾아가서 함께 묵었다고 전하면서 이 사실성을 강조하는 뜻으로 그 때가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룻밤을 묵는 동안에 그분의 가르침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드레아는 주님의 신원을 알아봄으로써 공현을 체험한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에페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교회 신자들에게 선과 악에 대해 영적으로 식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1요한 3,7-8).
이 권고에서 선악을 식별하는 기준은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지 혹은 죄를 저지르는지 하는 행동입니다. 즉, 실천에 따라서 선과 악, 의로움과 죄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품은 지향만이 아니라(필요 조건) 실제로 행한 실천만이 선과 악의 식별 기준이 된다(충분 조건)는 뜻이지요. 이렇게 보면,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거친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는 등 극히 청빈한 생활양식으로 살아가면서 유다인 군중에게 의로움을 행실로써 회개하라고 가르쳤는데, 안드레아가 그의 제자로 있다가 예수님의 생활양식을 직접 체험하고 가르침까지 듣고 나서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도 요한이 스승으로서 보여주고 가르친 바 의로움의 안목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안드레아를 비롯한 제자들이 보여준 바 현세적 메시아니즘에 사로잡혔던 행실로 짐작해 보자면,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메시아로 제대로 알아본 때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 보내주신 성령을 받은 다음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 그분이 지니신 신성을 알아보는 일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림시기 강론 시리즈를 통해 전해 드린 바처럼, 천주 존재 교리가 신앙 진리의 공리라면, 강생과 부활, 삼위일체 교리는 공리에서 파생되는 신앙 진리의 공식과도 같기 때문이요, 부활은 십자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삼위일체는 성령을 하느님으로서 체험해야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상선벌악 교리에 따라 선과 악의 행실에 따른 상과 벌이 뒤따른다는 책임의식이 요청되는 법입니다.
아시아 복음화를 통하여 복음화 제3천년기에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재건 그리고 활성화를 기대하고 있는 보편교회는 아시아인들이 안드레아 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며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문헌에서 이런 신앙 쇄신 노선을 천명한 바에 따라서, 아시아 주교들은 25년 동안 숙고한 끝에 ‘아시아의 새로운 교회가 살아가야 할 존재양식’을 ‘삼중의 대화’로 간추렸습니다(제5차 아시아 주교 총회, 인도네시아 반둥, 1990).
첫째, 아시아 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빈곤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세를 늘리려는 노력으로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나누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외부의 시선으로 일방적으로 판단하기 보다 당사자들의 마음과 필요 그리고 입장이 충분히 고려되고 반영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미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가르침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공의회 노선입니다. 이 회칙에서는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에 사는 민족들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진정성 있게 돕는 일이야말로 선진국 민족들의 복음화임을 맨 첫 머리에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행동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가장 복음적인 방식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서구 신학의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양식으로써 하기 보다는 아시아인들의 영적인 감수성에 부합되도록 직관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양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문화적인 차원의 대화요 사회적인 강생의 신비를 따르는 선교 원리입니다. 그래야 유럽과 아시아, 서양과 동양, 합리적 사유와 직관적 사유가 종합되어, 전체 보편교회가 더 풍요로운 영적인 자산을 보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아시아 교회와 보편교회는 '교회의 선교사명'을 복음적으로 실천하는 출발선 상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아시아의 위대한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들과 진리를 추구하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위대한 종교들에게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배워야 한다.”는 공의회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태도입니다. 근세 이래 보여 온 대결적인 자세를 버리고 상호 공존하는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도 천명했듯이, 선교란 종교간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개종을 강요해서는 더더욱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선포자들은 선교활동에 종사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선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가난한 이들은 서구화된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보다 더 아시아적인 종교적 심성과 문화적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선포의 우선적인 수신인이자 수혜자들이 되어야 복음선포의 길이 열립니다.
교우 여러분!
이런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아시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한다고 아시아 주교들이 건의하였고,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에서 수용함으로써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실천 행동입니다. 그런 연후에라야 아시아인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이 아시아에서 공현되어야 할 경로가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