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4일 나해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루카 17,20-25)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어째서 외적 행복이 늘어날수록 내적 행복이 줄어들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다윗의 나라로 착각하였습니다.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외적인 행복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뤄지는 의로움과 마음의 기쁨과 평화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느끼는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성령으로 느끼는 행복을 맛보면 세상의 행복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는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멸시의 고통만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행복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반비례하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도 느끼며 육체의 행복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두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사랑’ 때문에 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연인이 상대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상대의 진심 때문에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연인이 주는 행복을 완전하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완전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영화 ‘위대한 캐츠비’에서 캐츠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데이지는 다른 행복을 끊을 줄 몰랐습니다. 캐츠비는 어렸을 때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돈과 명예도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안 캐츠비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이미 돈과 명예는 있지만, 바람둥이인 톰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톰은 자기 적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윤리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고 데이지도 어느 정도 이것을 압니다.
캐츠비는 데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허울뿐인 행복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자기 남편의 내연녀를 차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캐츠비는 그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데이지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랑에 온전히 몸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가 이와 같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행복을 신에게 맡겼습니다. 신이 전능하고 완전한 사랑임을 알기에 그는 유일하게 가진 두레박도 개가 입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했지만, 여전히 공허하였습니다. 자기를 믿으니 그만큼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 신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파홈은 욕심을 부리다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그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추장의 말에 그는 돌아올 시간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에 2미터도 안 되는 땅에 묻혔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그만큼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시작은 선악과, 곧 십일조를 바치므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을 끊는 만큼 더 완전한 사랑이 주는 행복을 누리게 됨을 의심하지 맙시다.
첫댓글 이 세상 행복을 끊는 만큼 더 완전한 사랑이 주는 행복을 누리게 됨을 의심하지 맙시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