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고 있나이다
1사무 3,1-10.19-20; 마르 1,29-39
연중 제1주간 수요일; 2024.1.10.
오늘 독서에서는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은 장성하여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비롯한 갈릴래아의 여러 고을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상황이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던 일상의 하루를 집대성한 이 대목에서 병자들과 마귀들린 이들이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사도직은 의료와 원목활동입니다. 마귀 들린 이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성사 집행으로 가능합니다. 그밖에도 사회에 만연해 있는 구조악의 희생자들은 불평등한 차별의 현실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선을 증진시키려는 사도직 활동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무엘과 같은 처지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듣고 있는 부르심입니다.
사무엘이 성전에서 사제 엘리와 함께 봉직하고 있었을 때,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지만 그는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인 줄을 알지 못하고 엘리가 불렀는 줄 알았습니다. 두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서야 엘리는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계시는 줄로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응답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하는 응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마귀 들림 그리고 구조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상황은 그 자체가 상황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이를 시대의 징표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받는 고통은 그 고통을 만든 악의 세력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의 세력은 공동선의 힘을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 빛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불러들이지 않아도 어둠이 찾아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처럼, 악은 선의 부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이 시대에서 개별적이거나 구조적인 악을 잘 관찰해야 하고, 또 그 악이 어떠한 선의 결핍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를 잘 식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관찰과 식별에 따라서 사도직 실천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듯 관찰과 식별과 실천이 오늘날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분이심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에서 특기할 만한 한 가지 사실은 한낮과 해진 후에도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아직 캄캄한 새벽녘에 홀로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에게 시달리셔서 많이 피곤하셨을텐데도 새벽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몸을 충전하는 방법은 몸을 쉬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힘을 받아 영혼을 충전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영혼이 새로워지면 몸도 마음도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령이 사람들의 몸에만 손을 대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의 눈을 멀게 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의 죄에 빠뜨리기도 하고, 영적인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사랑할 줄 모르는 이기심의 죄에 물들게 하기도 합니다. 양심이 병들면 무책임의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기도 합니다. 지식이 모자라는 것은 무지라고 말하지만 진리에 눈먼 것은 무명이라 합니다. 또한 사랑할 줄 모르고 공감능력이 없는 것은 양심이 마비된 이기심의 발로이지요. 또한 하느님에 대해서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무신론(無神論), 진리나 사랑에서 나오는 가치가 아니라 이익과 권세 같은 힘을 떠받드는 우상숭배 풍조도 비슷합니다. 이 모두가 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이고, 따라서 정신적으로나 영적인 병리 현상입니다.
그러다가 진리를 깨닫는 정신적 치유나 사랑을 느끼는 영적 치유의 체험을 했을 때에도, 구마와 치유 기적 같은 신체적 체험에 못지않은 믿음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네 영혼이 온전치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전제 하에서 영성체 예식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보편교회가 복음화 제3천년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20세기 중엽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고 대희년을 앞둔 1998년에 아시아 주교 특별 시노드를 열었던 일은 교회의 공식적인 예언자 직무였습니다. 아시아의 서쪽 끝에서 선포되기 시작된 복음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이 21세기에는 광대하고 생동적인 대륙, 아시아에서 신앙의 큰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복음화 제3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가고자 했던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아시아 교회’, 1항. 아시아에서 하느님 계획의 경이로움).
이 문헌에서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아시아 대륙에 토착화시키려는 열망으로 아시아인들의 영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을 이렇게 열 가지로 진단한 바 있습니다.
- 첫째는 토착화의 수단은 가톨릭 사회교리로서, 그 목표이자 결론은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 둘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입니다. 아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던 대륙이지만, 아시아 몇명 나라는 지구상의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결핍과 가난 그리고 착취로 고통받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아시아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셋째는 피난민들, 망명자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전례 없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이 대륙에서 조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고 있는 이 이주민들이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과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전통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 넷째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낮은 경제 계층에 속해 있는 막대한 수의 원주민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 다섯째는 부패한 사회 구조로 말미암아 착취와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고통을 없앨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서두에서 강조한 바 있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노력을 돕는 일입니다.
- 여섯째는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심지어 법적 제도 안에 발생되는 온갖 형태의 불의와 차별에 대항하고 있는 아시아 여성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일곱째는 생명에 대한 봉사이고, 여덟째는 보건과 의료 사도직이며, 아홉째는 교육이고, 열째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신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치유와 구마 기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신 것처럼, 아시아에서 경이로운 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사도직에 대하여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밝힌 예언자적 발언이 이상과 같습니다.
이는 아시아 주교들이 이 대륙 복음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건의한 삼중의 선교적 대화, 즉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 문화와의 대화,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복음화 청사진입니다. 일찍이 어린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로 성장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 왕국을 세웠듯이, 이 청사진은 아시아 대륙에서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고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듣고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