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1사무 4,1ㄴ-11; 마르 1,40-45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2024.1.11.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몸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나병은 피부가 손상되는 병으로서 천형(天刑)으로 일컬어질만큼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가족과도 격리되어 지내야 하는 몹쓸 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는 세상에서는 받을 수 없는 큰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을 악성 피부병으로 불렀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죽음의 맏자식이 사지를 갉아먹는”(욥 18,13)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부정한 자’로 여겨져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하고 낫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마을로 복귀할 수 없는 저주를 받았습니다(레위 13,45-46).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회적 약자였던 셈입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대개는 가족들이 음식을 조달해 주었겠지만 어쩌다 그것도 어려워져서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와야 할 때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멀리 떨어지시오!” 하고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그 수치심이야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을 테지요. 예수님 당시에 어떤 나병 환자가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낫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무릎을 꿇고 치유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일로 손꼽히던 이 나병 환자 치유 사도직에 소명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발휘하신 신적인 치유 능력은 없었어도 가엾은 마음만은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던 용감한 사도들이었습니다.
가장 이른 시기에 나병 환자를 도왔던 선구자는 프란치스코였는데, 그도 사실은 클라라를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12세기 이태리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는 아씨시 근처에 있던 나병 환자 마을에 음식을 날라다주는 일을 하며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보이신 가엾은 마음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프란치스칸 수도자들은 사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병 환자를 돌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은 20세기 벨기에 출신 다미안 신부입니다. 그는 미국 하와이의 몰로카이 섬에다 나병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고 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렸지만 섬을 떠나 치료하지 않고 함께 나병 환자로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한국의 다미안으로 불리던 사람은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입니다. 그는 1950년대 초부터 경기도 의왕에 라자로 마을에 들어가 28년 동안 나병 환자들을 전문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도움을 받은 나병 환자가 무려 52만여 명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채로 격리시키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던 1960년대 중반에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인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도 평신도 선교사로서 한국의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전남 고흥의 소록도에 들어가 40여 년간 월급도 받지 않고 도왔습니다. 그 두 사람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우들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자신들도 그 안에서 정화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을 한센인들이라고도 부르는데, 한센인들은 살이 썩고 지체가 떨어져 나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한 고통 속에서, 언젠가 죽어 헤어질 몸과 미리 이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뼈저리게 잘 아는 한센인들은 땅처럼 겸손했고, 아주 작은 호의에도 크게 감사했으며,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그 두 사람은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왕 시녀회’라는 재속 평신도 단체의 회원답게 예수님을 모시듯이 나환우들을 돌보았습니다. 결절과 고름으로 처참한 상태인 환자들의 다리를 때로는 자신의 무릎 위 앞치마에 얹어놓고, 꼭 애지중지하는 보물 다루듯이 이리 만져보고 저리 만져보며 치료하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온 몸에 물집이 생겨 상처가 연신 터지고 진물이 흐르는 환자들의 전신치료를 하려면 몇 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긴 시간을 온전히 집중하면서 환자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이들은 환자들의 대소변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냈고, 솔이 안 보일 때면 맨손으로 변기를 닦기도 했습니다. 자기 몸이 무쇠라도 되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그들이 노쇠했음을 알았을 때, 그 두 사람은 편지 한 통만을 달랑 남겨놓고 고국으로 떠났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독서에서 필리스티아인들을 대적하여 싸웠던 이스라엘 군사들은 계약의 궤를 모셔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몸을 바쳐 싸울 뜻이 없었기 때문에 패전하고 말았습니다만, 위에 언급한 나병 환자 치유 사도직에 종사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다미안, 이경재 그리고 마리안느와 마가렛 등 나병 환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이들을 돌보았던 이들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ㄴ)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굳게 믿고 일생동안 헌신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나병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사도직 투신이 진정한 연대성의 발로라 할 것입니다.
이들은 공의회 직후 반포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이 가르친 바, 연대성에 입각한 투신으로 일생을 바친 선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포함하여 복음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바오로 6세는 이 회칙의 말미에서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 바 있었습니다.
“74. 평신도들의 선교 활동을 권장하신 비오 12세의 요청을 많은 젊은이들이 벌써부터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기에 호응하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이 자원으로 후진국의 발전을 위한 공적 사적 여러 기관에 참가하여 협력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떤 국가에서는 “병역” 의무를 “사회 봉사” 또는 더 짧게 표현해서 “봉사”로 부분적으로나마 대체하고 있음을 알고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이런 계획과 이것을 실천하는 선의의 사람들을 본인은 마음으로부터 축복하는 바이다.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모든 이 들이 그리스도의 애타는 호소에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 아주었다”(마태 25,35-36). 아직도 가난 속에서 배움에 굶주리고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는 형제들의 운명을 보고도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 군중이 보기에 참 안되었다.”(마르 6,34) 하신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이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마음도 고통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하겠다.
75. 인류 전체가 이같이 큰 불행을 의식하고 지력과 마음을 다하여 불행 제거에 노력하 도록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이가 기도해야 하겠다. 이런 기도에는 각자의 역량대로 인류의 저개발 상태를 거슬러 싸우려는 단호한 결심이 따라야 한다. 개인이나 사회 단체나 국가가 모두 다 형제처럼 서로 손을 맞잡고 강자는 약자의 성장을 도와주고 그러기 위하여 모든 재능과 열의를 다하고 사심 없는 사랑으로 협력하기 바란다. 진실한 사랑에 지배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빈곤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서 마침 내 결정적으로 빈곤을 쳐이길 줄 안다. 이 사람이야말로 이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 음속에 기쁨의 등불을 밝혀주고 빛과 호의를 쏟아주며 모든 국경을 넘어서 가는 곳마다 형 제다운 얼굴과 친구다운 얼굴을 보여주며 스스로의 여정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86. 빈곤에 신음하는 민족들의 호소를 들었으니 이제 우리는 모두 다 그들의 요구를 들 어주어야 하겠다. 우리는 모두 다 참되고 유익한 진보를 촉진하는 사도들이다. 이러한 발전 은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여 얻어지는 재화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경제관이 수립되고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이 제공되고 형제적 사랑이 꽃피어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할 때에 참된 발전이 성취될 것이다.
87. 마지막으로 본인은 신자 여러분에게 마음으로부터 축복을 보내는 동시에 모든 선의 의 사람들이 형제적 사랑으로 우리가 하는 일에 힘을 합해주기 바라는 바이다. 오늘에 있어 서 발전은 곧 평화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니 발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누가 아끼려 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외치는 애절한 호소에 기꺼이 응답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