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즉위 년도, 재위 기간 |
왕 | 출생년도 | 즉위년도 | 즉위 시 나이 | 즉위 장소 | 재위 기간 |
1대 태조 | 1335 | 1398 | 58세 | 개성 수창궁 | 7년 |
2대 정종 | 1357 | 1398 | 42세 | 경복궁 근정전 | 2년 |
3대 태종 | 1367 | 1400 | 34세 | 개성 수창궁 | 18년 |
4대 세종 | 1397 | 1418 | 22세 | 경복궁 근정전 | 32년 |
5대 문종 | 1414년 | 1450 | 37세 | 동별궁 빈전 | 2년 |
6대 단종 | 1441 | 1452 | 12세 | 경복궁 근정문 | 3년 |
7대 세조 | 1417 | 1455 | 39세 | 경복궁 근정전 | 13년 |
8대 예종 | 1450 | 1468 | 19세 | 수강궁(현재 창경궁 중문) | 1년 |
9대 성종 | 1457 | 1469 | 13세 | 경복궁 근정문 | 25년 |
10대 연산군 | 1476 | 1494 | 19세 | 창덕궁 인정전 | 11년 |
11대 중종 | 1488년 | 1506 | 19세 | 경복궁 근정전 | 39년 |
12대 인종 | 1515 | 1544 | 30세 | 창경궁 명정전 | 8개월 |
13대 명종 | 1534 | 1545 | 12세 | 경복궁 근정문 | 22년 |
14대 선조 | 1552 | 1567 | 16세 | 경복궁 근정전 | 41년 |
15대 광해군 | 1575 | 1608 | 34세 | 정릉동 행궁(현재 덕수궁) 서청 | 15년 |
16대 인조 | 1595 | 1623 | 29세 | 경운궁(현재 덕수궁) | 27년 |
17대 효종 | 1619 | 1649 | 31세 | 창덕궁 인정문 | 10년 |
18대 현종 | 1641 | 1659 | 19세 | 창덕궁 인정문 | 15년 |
19대 숙종 | 1661 | 1674 | 14세 | 창덕궁 인정문 | 46년 |
20대 경종 | 1688 | 1720 | 33세 | 경덕궁(현재 경희궁) 숭정문 | 4년 |
21대 영조 | 1694 | 1724 | 31세 | 창덕궁 인정문 | 52년 |
22대 정조 | 1752 | 1776 | 25세 | 경희궁 숭정문 | 24년 |
23대 순조 | 1790 | 1800 | 11세 | 창덕궁 인정전 | 35년 |
24대 헌종 | 1827 | 1834 | 8세 | 경희궁 숭정문 | 15년 |
25대 철종 | 1831 | 1849 | 19세 | 창덕궁 인정문 | 14년 |
26대 고종 | 1852 | 1863 | 12세 | 창덕궁 인정문 | 34년 |
대한제국 1대 고종 | 1852 | 1897 | 46세 | 환구당 | 9년 |
대한제국 2대 순종 | 1874 | 1907 | 34세 | 경운궁 돈덕전 | 3년 |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왕조로 첫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 하고 수도를 개성으로 두었다. 이후 1394년 국호를 조선으로 명명하고 1398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한 뒤, 총 26명의 국왕이 505년 동안 통치하였고, 숭유억불 정책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황제국으로 선포하였으며 총 2대 황제가 13년 동안 통치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막을 내렸다.
조선 왕조는 태조 이성계부터 순서대로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순이다. 흔히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종이라고 외운다.
태정태세문단세
1대 태조는 이성계, 2대 정종은 태조의 2남인 이방과이다. 3대 태종은 이방원으로 정종과 태종 모두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들이다. 4대 세종 이도는 태종의 3남으로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태어났다. 5대 문종 이향은 세종의 1남으로 소헌왕후 태생이다.
6대 단종 이홍휘는 문종의 1남으로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이며, 7대 세조 이유는 세종의 2남으로 문종의 동생이다.
예성연중인명선
8대 예종 이황은 세조의 2남으로 정희왕후가 낳았으며, 9대 성종 이혈은 세조의 손자로 소혜왕후 한씨 태생이다.
10대 연산군 이융은 성종의 장남으로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연산군의 뒤로 11대 중종 이역은 정현왕후 윤씨가 낳았으며 성종의 차남으로 연산군과는 배다른 형제이다.
12대 인종 이호는 중종의 장남으로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이며, 13대 명종 이환은 중종의 2남으로 문정왕후 윤씨의 다들이다. 14대 선조 이연은 중종의 손자로 하동부대부인 정씨가 낳았다.
광인효현숙경영
15대 광해군 이혼은 선조의 2남으로 공빈 김씨가 낳았으며, 16대 인조 이종은 선조의 손자로 인헌왕후 구씨의 아들이다.
17대 효종 이호는 인조의 2남으로 인열왕후 태생이며, 18대 현종 이연은 효종의 1남으로 인선왕후 장씨 태생이다. 19대 숙종은 현종의 1남으로 명성왕후 김씨가 낳았다. 20대 경종 이윤은 숙종의 1남으로 희빈 장씨의 아들이다. 21대 영조 이금은 숙종의 2남으로 숙빈 최씨가 낳았으며 경종과는 이복형제이다.
정순헌철고순종
22대 정조 이상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영조의 손자이며 경의왕후가 낳았다. 23대 순조 이공은 정조의 2남으로 수빈 박씨가 낳았으며 24대 헌종 이환은 순조의 손자로 신정왕후 조씨가 낳았다. 25대 철종은 영조의 손자로 용성부대부인이 낳았다. 이어서 26대 고종은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대한제국의 초대황제가 되었는데,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아들로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낳았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2대 황제였던 순종은 고종의 2남이며 명성황후의 아들이다.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전주 이씨로 이성계의 6대조 이린은 고려 무신 집권자 중 한 사람인 이의방의 동생이었다. 이의방이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사망하자 이린의 아들 이양무와 손자 이안사는 삼척으로 피신하였는데, 그 이후 이안사의 일족이 고려의 동북 국경을 넘어 지금의 함경도 지방으로 들아가게 되었다.
이씨 집안은 이안사부터 4대에 걸쳐 원나라의 지방 관리를 지내면서 지역 세력을 확대하게 되는데, 이성계 부자 대에는 함흥 지방을 중심으로 제법 그 세력이 자리 잡게 된다. 이성계는 선대가 이룬 세력 기반 위에서 본인의 뛰어난 무공으로 고려 조정에 입성하고, 동북 지방 군사들로부터 강한 충성심을 얻게 된다.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쌓은 이성계는 1392년에 정도전, 조준 등의 추대를 받으며 새 왕조를 세웠다. 1393년에는 국가 명칭을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수도를 이전하게 된다.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를 보면 8명의 아들이 있는데, 2남이 정종, 5남이 태종으로 그 후위를 잇게 된다.
13대 왕인 명종이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11대 왕인 중종(부인이 10명이었고 슬하에 9남11녀를 두었다. 그중 2명의 아들이 각각 12대 왕인 인종, 13대 왕인 명종이다)의 막내아들인 덕흥군의 아들인 선조가 명종의 뒤를 잇게 된다. 즉 선조는 명종의 조카이지만, 왕이 되기 전에 세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낳게 되고 그 중 3남이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이다.
사도세자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1남이 바로 정조로 1776년 즉위해서 1800년까지 조선 왕실을 이끌게 된다. 정조는 정비와 후궁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고 수빈 박씨가 1남1녀를 두게 되었고, 이중 1남이었던 문효세자가 아버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여 23대 순조가 된다. 이로 인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3년 간 수렴청정을 했고, 수렴청정이 끝난 이후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에 의한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로맨티스트 헌종의 창덕궁 처소
창덕궁 한쪽에 따로 마련된 헌종의 처소는 아직도 헌종의 애닮은 사연(후사를 두지 못함)과 로맨티스트 흔적을 보여준다.
헌종은 조선 제24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며,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성황제(成皇帝), 휘는 환(烉), 자는 문응(文應)이다.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외아들이다. 아버지인 효명세자(사후, 아들 헌종에 의해 익종으로 추존됨)가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의 신분으로 8살 나이에 왕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안동 김씨 세도가에 이어 힘은 세지만 발톱을 숨기고 권력을 움켜쥐려는 풍양 조씨 집안 출신이다. 첫 왕비는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 김씨였으나 결혼 2년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고 이후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았다. 외가와 처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삼정의 문란이 극심)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가톨릭)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해 정하상(1839년 기해박해)과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부인 김대건이 순교했다.(1846년 병오박해)
더욱이 극심한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서는 서양 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커가는 시기였고 헌종은 친정이 시작된 이후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에 끝나고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1903년 졸)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경빈 김씨)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헌종은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 중의 실세인 김흥근을 탐오하고 대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궁위를 엿보아') 정치를 했다고 탄핵하고 귀양보내기도 했다. 또한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는 등 反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다.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은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렸으며 박규수를 조정으로 불러 중용할 뜻을 내비췄다. 반면 영의정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당한다. 5군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건 대표적.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보고 들으면서 국방력 강화와 척신 척결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역으로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세도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며 왕권을 힘겹게 다잡아가던 헌종은 1849년 7월 25일(음력 6월 6일) 향년 23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보통 헌종의 죽음은 잦은 성관계로 인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정확한 사인이 아니다. 헌종은 어느 순간부터 피를 토하며 소화 불량 증세를 자주 보였고 설사가 심해지고 갈수록 심한 얼굴 부종 증상이 나타나 의원을 통해 약을 조제하고 치료하면서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매번 반복하다가 사망하였다고 하며, 이는 현대 의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평소 녹용 등 한약재와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많이 복용하였다는 일화로 미루어 급성간염이나 간경변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기 직전 다급히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젊은 나이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헌종이 후사 없이 갑자기 죽자 할머니이자 순조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령 철종이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직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했으며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다. 전계군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복했다.
철종이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대비(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는 흥선군의 둘째아들을 익선군에 봉하고 왕으로 옹립했으며 즉위 초 10년간은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은 인조(16대 왕)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영조의 손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왕권과 가까워졌다. 철종(25대) 재위 당시에는 안동김씨가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왕권까지 위협하던 시기인데 이하응은 철저히 권력자들의 눈을 속이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철종이 후사도 없이 병세가 악화되자, 이하응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 신정왕후 조씨(효명세자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에게 접근하여 신임을 얻었다. 결국 철종이 사망하자 신정왕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고종)을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해 익성군의 군호를 내리고 왕위에 오르게 한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시대가 도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