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이야기
1사무 16,1-13; 마르 2,23-28 / 2024.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모두 다윗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에서는 사실상 이스라엘 왕국을 대표하는 임금이요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임금이었으며 하느님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던 임금이었습니다. 벤야민 지파 출신의 사울이 왕위를 자기 아들에게 계승시키지 못하고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일찍이 야곱이 열두 아들을 앞에 두고 장차의 운명을 예언했던 바가 실현되었습니다(창세 49,8).
성경에서 다윗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이룩한 명성에 그치지 않고, 메시아 대망 사상이 신앙 수준급으로 널리 퍼진 가운데 그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출현하시리라는 메시아 도래 예언의 정초(定礎)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즉 왕손 가운데에서 나타나리라는 예언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를 편찬하면서 제일 첫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소개했는데, 그 제목이 이러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아브라함은 다윗에게 까마득한 조상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떠받들리는 위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보다 다윗의 이름이 먼저 소개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 즉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를 보내시리라는 약속을 실현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 계명의 제 자리를 찾아주려고 예수님께서 다윗 일행이 겪은 고사(古事)를 인용하시기도 하셨지만(마르 2,25-26), 그분을 만나러 온 사람들도 그분을 부를 때 “다윗의 자손이시여!”(마르 10,47; 11,10; 12,36) 하고 예사로 일컬었으며 이는 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었다는 증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다윗과 같은 위대한 정치가로 기대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보다도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이 훨씬 더 위에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 중에서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다윗 반열의 현세적 통치자로서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일찍부터 야곱과 모세와 다윗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께서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심을 보여주시는 증표로서, 결국 이스라엘이 메시아적 백성이 되도록 변화시키시려던 섭리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위로는 지도자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도 못했고, 그분이 선포하신 복음에 따라 회개하지도 않았으며, 끝내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에 다윗과 그 왕조에 약속하신 하느님의 계약은 새 이스라엘이자 참이스라엘로 부르심 받은 교회에 넘어가게 되었고, 그로부터 2천 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거짓 목자로 지탄받는 지배층이 형성해 온 흐름(왕국의 성립과 분열, 멸망과 유배)과 힘이 없고 가난했으나 신심은 돈독했던 아나빔들이 형성해 온 흐름(메시아 대망 사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및 초대교회의 형성)이 있는데, 이 두 가지 흐름에서 다윗은 모두에게 자신들의 대명사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공화국과 미국 등지에서 유다교를 신봉하는 유다인들은 다윗을 메시아로 여기며, 다윗이 이룩한 정치적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다. 바리사이즘을 고수하고 있는 현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분은 다윗처럼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세기 프랑스에서 작가 에밀 졸라가 고발한 ‘드레피스 사건’ - 프랑스 육군 대위 드레피스가 유다인 조상을 둔 유다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그가 근무하던 정보국의 기밀을 독일에 빼돌렸다는 간첩 혐의를 받아 해외 오지 감옥에 수감된 사건 - 이후 유다인들의 나라를 세우자는 시오니즘 운동 - 혈통상으로 유다인인 사람은 누구든지 또 다른 드레피스로 몰려 탄압 받을 수 있으니, 아예 유다인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의 시온 언덕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 이 20세기 중반 이스라엘 건국으로 나타났고, 이보다 먼저 미국에 정착하여 성공한 유다인들이 미국 정부와 언론을 움직여서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배경인 현실입니다. 최근 가자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하마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를 꼭 빼닮은 행태를 보이고 있어도 미국 유대 권력은 무조건 지지하고 있습니다. 반유다이즘의 폭력에 시달렸던 피해의식 때문에 보편적 가치에는 눈이 멀어버린 형국입니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떠받들기보다 힘을 추구하는 경향은 여전한 듯 합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유다인들이 보이는 구태의연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 아나빔들의 맥을 잇고 있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윗의 이름은 여전히 희망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익명의 아나빔들이 형성해 놓은 시편 성서의 지은이는 다윗이라고 내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아나빔의 대표명사인 것입니다. 다윗이 활동하던 3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2천 년 전에 또 지금에 와서 유다인들이 다윗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윗을 대하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다윗과 이스라엘의 아나빔들에게 한없이 그리고 끝까지 충실하셨던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하며 다윗의 이름을 부릅니다. 특히 성무일도를 바칠 때마다 그렇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치는 연도에서는 다윗이 바친 참회의 시 130편과 51편을 읊는 것이 그렇고, 산 이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 8편으로 찬미드리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성령의 도움으로 메시아로 오신 당신을 주님이라고 불렀음을 기억하셨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태 22,45). 즉, 작금의 유다인들이 다윗을 메시아로 추종하는 것과는 반대로 정작 역사의 다윗은 메시아를 주님으로 불렀으며 이는 장차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께서 지니실 신성을 미리 고백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성으로는 예수님께서 양부 요셉의 혈통을 따라 유다 지파의 일원으로서 다윗의 후손이 되시지만, 신원상 더욱 중요한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요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로서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고사를 인용하셔야 했던 이유는 안식일 계명 때문이었습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지나가던 밀 밭의 밀 이삭을 뜯어 먹자, 이들을 뒤따르면서 감시하던 바리사이들이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알아보기는커녕 다윗의 자손으로도 인정하지 않던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마치 품앗이 추수행위로 보고 얼토당토 않게 트집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행태는 유다인들의 율법이 과연 무엇인지, 또 율법을 기둥으로 삼은 유다교라는 종교는 무엇인지 의문을 삼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마르 2,27ㄴ)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의 기능과 종교인들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바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와 도움 요청에 진정성 있게 임하시며 기적으로 당신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시는 처신이었습니다. 비록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나셨을 때나(마태 12,10),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곱사등이 여인을 만나셨을 때에는 물론(루카 13,16), 태생소경을 만나셨을 때에도(요한 9,14), 주저없이 그분은 그들의 고통을 헤아려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연륜을 간직한 위대한 종교들이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아시아 대륙에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일 역시 교리를 내세우거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공의회와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에 나타나고 있는 보편교회의 입장 역시 아시아의 여러 종교들과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대화의 자세로 진지한 구도정신을 발휘하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공동선의 요청에 부응하는 가운데, 자비와 애덕의 실천으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작부터 메시아를 기다려왔고 메시아를 탄생시켰으며 초대교회의 주축을 이루었고 다윗으로 대표된 아나빔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입니다.
첫댓글 솔직히 지금 이스라엘과 가자지구가 전쟁하는 이유를 막연하게 대충만 알고 있었는데, 신부님께서 알려 주시니 이제사 이해가 좀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떠받들기보다 힘을 추구하는 이유를 이제사 자세히 알았습니다.
연도할때 다윗이 바친 참회 가 시편 130 과 51편 인줄도 모르고 그냥 줄줄이 읽었으니 참 무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인성과 신성으로 구분 해서 다윗과 앙부요셉을 비교 설명 해 주시니 확실하게 이해 되었습니다.
자비와신성으로 애덕의 실천 으로 사랑하는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라는 것을 명심 하며 살수있게
주님께 맡기오니 이끌어주십사 기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네, 오랜 만에 댓글을 쓰셨군요.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