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탄과 다윗의 우정
1사무 18,6-9;19,1-7; 마르 3,7-12
연중 제2주간 목요일(일치주간 첫날); 2024.1.17
오늘 독서는 다윗이 필리스티아의 장수 골리앗을 돌팔매로 쳐부수고 온 다음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 하는 여인들의 환성에서 알 수 있듯이, 민심은 사울보다 다윗에게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더 인기를 얻고 있던 다윗을 시기한 나머지 사울은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살기어린 음모에서 그를 극력 감싸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평소에 앙숙처럼 지내던 헤로데 당원들과 야합하여 그분을 죽이려는 모의를 한 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기적적인 치유의 소문을 들은 군중은 남쪽의 예루살렘은 물론 동쪽 요르단강 건너편 이두메아 지방과 북쪽의 티로와 시돈 같은 해안 지방에서부터도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그분은 이 같이 모여든 큰 무리의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를 치유하시고 마귀 들린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독서와 복음의 상황을 종합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수도 있었던 왕자였는데도, 정치적 경쟁관계였던 다윗을 끔찍이 아꼈습니다. 어쩌면 사무엘의 예언을 듣고 하느님께서 다윗을 보살피고 계심을 눈치챘는지도 모릅니다만, 다윗을 아껴준 요나탄의 우정은 성서 전체를 통털어 가장 아름다운 관계였습니다. 그리하여 요나탄의 적극적인 보호로 다윗은 사울의 위협에서 살아남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둘의 우정을 야곱 시절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합니다. 벤야민과는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인 요셉이 이복 형들의 질투를 받아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었을 때 구덩이에 던져 넣어 굶겨 죽이려던 형제들을 설득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자고 제안하여 요셉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다름아닌 유다였습니다(창세 37,26). 자기 지파 조상들끼리 거의 5백 년 전에 주고 받은 이 옛날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던 벤야민 지파 출신 요나탄이 유다 지파 출신 다윗에게 아름다운 우정으로 되갚은 것이라는 해석인 것이지요.
그런데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 간에 5백 년 만에 은혜를 갚았다는 이 우정의 관계는 다시 천 년 후에 유다 지파 출신의 예수님의 노선을 벤야민 지파 출신의 사울 즉 바오로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계승하는 역사적 우정의 관계로 재현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몰려온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데 비해 바오로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 로마 제국의 영토 전체를 무대로 삼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공동체들을 건설함으로써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 기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데 비해 바오로는 노동하는 직업의 모범과 공동체를 세워주는 생활의 모범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신앙의 가르침은 공통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고,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둘 다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진리라는 점에서는 공통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활동 사항을 중계방송하듯이 선교하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실천했고 사람들에게 복음적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체험 안에서 진리를 믿게끔 안내했습니다.
치유와 구마 행위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만으로 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아프거나 마귀 들린 이들이 교회에 신뢰를 두게 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오로가 보여준 바와 같은 직접적 실천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복음선포에 권위와 매력이 약해지게 된 배경에는 위에 언급된 바,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이나 바오로의 직접 체험 활동이 없이, 이 활동들에 대한 중계방송식 보고만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유도 일어나지 않고 구마도 없습니다. 직접 찾아가는 일도 없고 오히려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노동하기보다는 신자들이 노동하여 번 돈 중에서 일부를 봉헌받고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지도 않으니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생활의 모범도 보이지 못하고 말로만 도덕적 훈계를 할 뿐입니다. 게다가 지속적인 신앙의 유대는커녕 떠나면 그뿐이어서 세례나 교적에 대한 부담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매력이 사라지고 권위가 약해진 원인으로 나타납니다. 다윗과 요나탄 사이의 그 아름다운 우정을 선망하면서, 또한 그 만큼이나 아름다운 예수님과 바오로 사이에 계승된 역사적 우정 즉, 복음선포의 진정성과 영적인 매력도 다시 나타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인 25일을 앞두고 9일 전인 오늘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일치하려는 쇄신의 여정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갑(甲)이 아니라 을(乙)의 지위에 처해 있습니다. 분열 사태의 원인을 규명하자면 분열한 당사자 모두의 책임으로 귀결되겠으나 분열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당국자들이 복음적으로 처신했더라면 아예 분열이라는 사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서방 교회의 분열도 그렇지만 서방 교회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이 갈라져 나가게 된 분열 사태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성사를 내팽겨치고 나간 후 성서에 몰두하면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커다란 자극이 될만한 장족의 발전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사 포기를 합리화시키는 비성서적 논리도 스스럼없이 전개하는 모습이라든지 – 특히 성체성사의 근거가 되는 요한 복음 6장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 스스로도 끊임없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인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도 간직하고 있었던 성모신심조차 내팽겨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들을 포용하지 못했던 당시 가톨릭교회의 당국자들의 옹졸한 태도를 더 원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집 나간 자식보다 나가게 만든 부모에게 더 책임이 있는 법이니까요. 특히 한국 개신교파들의 경우, 갈수록 돈의 문제가 심각해져서 맘몬 숭배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사실은 너무나 엄중해서 이 강론에서 논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일치 운동을 위해 천명한 실천 조건과 지도 원칙은 먼저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적으로 회심하고 화해를 청하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본 자세 위에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쇄신되어야 할 목표도 천명한 바 있는데, 그것은 지금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도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도 ‘가톨릭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일치 교령, 24항).
‘가톨릭적’인 기준은 분열 당시는 물론 지금의 양 당사자의 현실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상인 교부들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이 용어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은 사도들의 제자들이었던 교부들이며, 이는 당연히 현재의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합리화시키자는 입장이 아닙니다.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이자 비텐부르크 대학 신학교수로서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던 95개조의 질문은 정당한 항의였습니다. 루터 역시 가톨릭교회가 성전에만 의존하지 말고 성서를 존중해야 하며 사도들과 교부들의 전통이 살아있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따라서 이를 관용하지 못하고 그를 파문한 당시 교황과 교황청 당국자들의 처사는 매우 옹졸한 것이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루터로 인한 파문을 수습하고자 더욱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사태는 개선되지 못했고 훨씬 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 애초 루터가 항의했던 정당한 취지를 대폭 수용한 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계시의 원천으로서 성서와 성전을 천명한 것, 말씀 전례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 초대 교회의 모습, 특히 교부들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권고, 평신도들의 교회 내 지위 향상, 교황의 전제적 지위가 아니라 교황을 포함한 주교단의 공동사도성을 확인한 것 등이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공(功)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과(過)도 저질렀습니다. 파문을 당한 후에 내세운 구원의 원칙,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명제는 당시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의 리더십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선택을 따른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비판하며 루터를 흉내 내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자본주의에 물들어 심각할 정도로 맘몬 숭배에 빠진 사태가 그 증거입니다. 루터가 옳았다면 생겨나서는 안 될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갈수록 그 후폭풍은 거세어지고 있어서 지금에 와서는 그 어느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던 19세기 미국에서 북캐롤라이나 교구장이었던 제임스 기본스(James Gibbons. 1834~1921) 추기경은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도 다 함께 복음적으로 쇄신하자는 취지에서 ‘교부들의 신앙’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그 당시에 이미 200여 만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지금도 여전히 스테디 셀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펴낸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 대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이 보인 호응과도 비슷합니다. 서로가 복음의 기쁨에로 회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치의 정도(正道)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박해할 때 극력 보호해 주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 다윗에 대해 보여준 아름다운 우정이, 교부들의 신앙을 기준으로 한 복음적 쇄신에 있어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과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요청됩니다.
아시아 복음화에 있어서 이미 중앙 아시아에 살고 있는 러시아계 신자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동방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원주민들의 토착 종교인들, 그리고 아시아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개신교회 선교사들과도 이러한 우정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야 가톨릭이건 프로테스탄트건, 또는 동방교회 신자이건 토착 원주민 종교인이건 간에, 교회가 복음적이지 못하도록 열 일을 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악령들을 쫓아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시아 복음화의 여정에 있어서도 요나탄과 다윗의 우정과도 같이 아름다운 선교 활동이 그리스도인들과 종교인들 사이에 피어나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