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거룩함의 영성
2사무 7,4-17; 마르 4,1-20
연중 제3주간 수요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4.1.24
오늘 미사에서 독서는 시온 계약에 대해 전해주고 있고,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도하는 가운데, 전례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기념합니다. 오늘 강론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발견한 보편적 거룩함의 영성을 열쇠로 해서 말씀의 의미를 열어 보겠습니다. ‘보편적 거룩함’이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평신도 사도직의 영성인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보다 무려 3백 년 전에 성직자, 수도자만이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한 하느님 백성 모두가 거룩해야 하고, 이 보편적 거룩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고 가르친 진리를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걸쳐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약한 주교 학자입니다. 그가 활약하던 당시 유럽은 여러 가지로 대단히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상은 복합적이었습니다. 첫째, 종교적으로는 루터와 칼빈으로 인한 교회 분열이 시작된 데다가, 정치적으로는 절대왕정이 강화되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가톨릭을 옹호하던 국가들과 개신교를 새로이 택한 국가 간의 대립으로 번지는 바람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종교적 갈등의 양상을 넘어 국가간 대립으로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둘째,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유럽 이외에 다른 대륙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유럽에 못지않은 오래된 문명과 마주치게 되었으며 그 문명에는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다른 고등 종교들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유일신으로 알고 있었던 하느님 신앙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중국의 명청(明淸) 교체기에 조상제사로 말미암은 선교 실패로 인해 유럽으로 추방당한 선교사들이 역으로 중국의 유학을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소개함으로써 인간 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무신론적인 계몽사상이 파급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셋째, 자연과학과 특히 천문학적 발견으로 천동설이 지동설로 교체되면서 하늘에 계시다고 믿어온 하느님 신앙이 상대화되기에 이르게 되자 이 신앙에 입각하여 정신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가톨릭교회의 권위도 추락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복합적 혼란상을 정리해 낸 학자가 데카르트입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확립하고는 가장 확실한 진리를 수학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방법서설’(方法序說)이란 책을 써서 방정식 개념과 미적분 원리, 좌표 개념 등 철학을 위한 수학적 기초를 고안해 내어 대수학(代數學)과 기하학(幾何學)의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학문 분야에서 데카르트가 이룩한 업적으로 근세의 기초가 닦였다고 보는 학계의 정설처럼, 신학과 종교 분야에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특히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많은 이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는데 그 결과물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필적하는 ‘신심생활 입문’(1619)입니다. 그는 당시 루터 등으로 인한 개신교 출현에 대응하여 열렸던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기초하면서도 전통적 가르침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기보다 상담하러 오는 신자들의 문제의식이나 상황에서부터 출발하여 스스로 올바른 신앙에 이끌리도록 도와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격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많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갈파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령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교회의 살아있는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다른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명하신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신심이 같을 수 없고, 기혼자와 수도자의 신심이 같을 수 없다. 개인들의 능력과 직업과 직무에 맞추어 신심이 각기 다르게 열매를 맺어야 한다. … 진정한 신심은 그 어느 것도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사를 완성시킨다. 꿀벌은 꿀을 마실 때 꽃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며,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광채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각자의 직분과 직업과 처지에 따라 하느님께로 향하면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사회에서 각자가 맡은 직무는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교회의 직무에 있어서도, 평신도들과 기혼자들에게는 성직자나 수도자들과는 다른 신심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교회의 대다수 구성원인 평신도의 각성과 신심을 촉구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17세기에 근세 유럽의 여명을 밝힌 선각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삶을 기억함은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회심하기를 바라서가 아니요, 오히려 가톨릭 평신도들이 개신교 신자들이 말씀에 대해 지닌 열정과 지식을 본받기를 바라서이며, 그래서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처지와 직분과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거룩한 완덕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서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정작 지향하던 보편적 거룩함의 영성입니다.
이 영성의 관점에서 오늘 독서의 말씀을 살펴보자면 이러합니다. 다윗의 궁전이 있던 시온 언덕에서 예언자 나탄을 통해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말씀은, 다윗과 그가 속한 유다 왕실이 책임지고 다스리고 있는 나라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축복의 계약이었습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그런데 이 시온 계약에 전제된 조건은 시나이 계약의 정신을 다윗과 그 왕실이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조항이었습니다. 그리고 본시 시나이 계약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보호해 주시겠다는 내용으로서 시온 계약의 모(母) 계약입니다. 그러므로 시나이 계약의 부속 계약인 시온 계약의 핵심은 다윗을 비롯한 유다 왕실의 후대 임금들이 이스라엘을 하느님께 충실한 백성이 되도록 다스리라는 데 있었습니다. 백성의 신앙이 하느님께 충실하고 그 결과로 백성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봉사하라는 것이 시온 계약에서 내려진 축복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두 계약의 대전제는 온 인류가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니만큼 창조주를 닮기 위해 먼저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닮아야 한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이 보편성을 향한 지향 없이 자신들이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편협한 선민의식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사람들의 다양한 부류를 반영합니다. 보편적 거룩함의 소명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에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회개하여 하느님 나라의 결실을 맺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말씀을 듣자 마자 잊어버리기도 하고, 말씀을 듣고 머리로만 받아들이다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도 하며, 요행히 깨달음을 얻어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서도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지 않아서 믿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희망을 두어야 하는 이들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소담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이 열매가 바로 보편적 거룩함의 영성입니다. 승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굳게 믿는 이들은 설사 실패를 해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 실패가 새로운 성공의 씨앗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일하셨을까요? 무슨 요인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무식한 어부들과 영악한 세리 출신로 이루어진 제자들을,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던 혁명의 잠재적 투사들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요 사도로 변화시켰을까요?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요 믿어주는 투자입니다. 공생활을 증언하는 복음서에 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다고 야단을 칠지언정, 그리고 깨달음이 굼뜨다고 역정을 내실지언정 결코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보편적 거룩함의 영성에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이 네 가지는 부류로서만이 아니라 단계로서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거나 흘려 듣는 첫 단계로부터 시작해서, 말씀을 머리로라도 알아듣는 두 번째 단계와 조금씩 가슴으로 깨달음을 얻는 세 번째 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믿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네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 당신 제자들을 이끄셨습니다. 여기에 보편적 거룩함의 부르심이 있다 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베드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