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 22,3-16; 마르 16,15-18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024.1.25.(목)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열두 제자를 부르신 바 있었습니다만, 부활하신 후에도 부르신 제자가 바로 바오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열두 제자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셔서 발현 기적을 체험시켜 주셨고, 그 중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에게는 따로 갈릴래아 호수에 모이게 하시어 153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를 잡는 풍어기적(요한 21,1-14)을 체험시켜 주심으로써 장차 그들이 사도가 되어 거두게 될 풍성한 선교 성과를 미리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오로에게는 처음부터 눈부신 빛과 천둥의 소리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기적의 방식으로 그를 부르신 했던 까닭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예수님을 믿던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믿는 이들을 잡으러 다니던 박해자였기 때문에 ‘사울’이라고 불리던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느라고 그런 특별한 기적을 동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사울에게 비추어진 강렬한 빛 때문에 그는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고, 그에게 들려온 천둥 소리 안에서 함께 들린 말씀 때문에 그는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22,7).
그렇게 눈이 멀게 된 그에게 며칠 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하나니아스가 찾아가 세례를 주는 순간에 눈을 뜨게 되기는 했지만, 그의 발걸음이 선교사의 길을 갈 만큼 눈을 뜨기까지에는 무려 십여 년이 넘게 걸렸습니다(갈라 2,1). 그 기간 동안에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피정을 하기도 하고, 타르수스의 자기 집에서 구약성경을 수도 없이 되풀이 읽으면서 그제껏 바리사이들에게서 배운 성경 지식을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를 알고 믿고 있던 이들을 찾아가서 뒤늦게 알게 된 바를 확인하기도 했을 터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마음과 영혼의 눈을 뜨게 했던 단서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들은 그분의 목소리였습니다. 십여 년 내내 자신의 머릿속을 맴돈 소리는 또 이러했습니다. “어찌하여 죽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까? 죽은 사람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고, 또 그렇다면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그 무렵에 안티오키아 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바르나바가 자신의 집으로 사울을 찾아와서 함께 일하자고 권했고, 이 권고에 응한 후부터 사울은 ‘바오로’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꾸고 선교사 수업을 받았으며, 얼마 안 가서 안티오키아 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리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당시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바오로 외에도 예언자직과 교사직을 수행하던 이들이 여럿이 있었지만(사도 13,1), 사울의 실력이 월등했습니다.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도 능통했고, 수사학과 논리학과 기하학 등 당시 그리스 문화권이었던 로마제국의 지식인들과 대등한 실력과 능력을 그는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교식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선교사로 발탁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울을 특별히 부르신 두 번째 까닭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유다의 전통과 율법에도 누구 못지않은 열성과 지식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의 길에 나서면서도 언제나 안식일이 되면 유다인 회당부터 찾아가서 해외 디아스포라에 살던 동족들에게 그가 새롭게 깨닫게 된 히브리 민족의 역사를 재해석해서 들려주면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기다려오던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를 납득하게 된 이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동료요 제자로 삼거나 협력자로 관계를 맺었습니다(로마 16장).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인생을 180도로 바꾸게 된 계기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체험한 기적이었고,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번개 빛과 천둥 소리로 나타나신 사건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이 기적 체험을 자신도 잊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상기시키고자 선교사로서 설교를 하거나 편지를 쓸 때에는,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던 데 비해 거의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유난히 강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전 영토를 걸어 다니면서 하느님을 모르던 숱한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설교와 편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지난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을 맞이하여 ‘성 바오로의 해’를 선포한 바 있는데, 이는 오늘날 그가 가톨릭교회 2천 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공경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유독 박해자였던 사울을 돌려 세우시고 이방인의 사도요 선교사로 부르신 뜻은 서방 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회심으로 이룩된 이 위대한 역사를 돌아보자면, 5백여 년 전 갈라진 가톨릭 그리스도인들과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들이 그의 회심을 기준으로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지내는 까닭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반세기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양성 안의 일치’(사목헌장, 92항)와 ‘일치 안의 다양성’(선교교령, 22항) 에 대하여 가르친 바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손수 뽑아 제자로 삼으신 열두 명 안에서도 의견 다툼은 일어났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그 엄중한 자리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지 서로의 서열을 두고 다투기 일쑤였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고 강조하셨습니다. 즉,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이루는 길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신 것처럼 서로 섬기는 자세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고 당부하신 대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이루는 길은 선교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리하여 2천 년 전 사도 바오로의 위대한 회심으로 서방 세계가 복음화되기 시작한 것처럼, 이제 복음화 제3천년기에는 동방 세계가 복음화될 수 있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또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 바오로 회심 축일에 우리 믿는 이들 모두에게 요청되는 회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