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헬스장에 갔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등산을 가려다가 텐트 안에서 쉬고 있는 회원과 잡담만 하다가 내려왔다. 오늘은 오후에 미세먼지가 몰려온다기에 오전에 등산과 헬스를 다 하려고 일찍 뒷산으로 올라갔다. 하루는 등산을 하루는 헬스를 하는 습관이 차질을 빚어 오늘은 능선을 오르지 않고 걷기 쉬운 둘레 길을 돌아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내려오려는 것이다. 비가 온 다음 날이라 공기는 상쾌하고 햇볕은 쨍쨍 내려 비췄다. 눈이 부시어 오랜만에 썬 그라스를 꼈다. 썬 그라스를 끼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햇볕이 내려쬐는 한 여름날 인수봉에 오르거나 눈 쌓인 설악산을 다닐 때는 썬 그라스가 필수품이었다. 그 때 나는 썬 그라스를 늘 용하니 한 번도 설맹(雪盲)에 걸려본 적은 없지만 히말라야 고산을 등산하던 어느 등산가는 하산도중 썬 그라스가 벗겨져 나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5,6십대 때 젊은 등산가들과 장거리 등산을 다닐 때 그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으려 허둥대다가 빗 싼 썬 그라스 수십 개를 잊어버렸었다. 어느 날 등산을 출발하려니 썬 그라스가 없어 딸이 일본여행에서 사온 30만 원 짜리 썬 그라스를 가지고 다니다가 그것마저 잃어버렸다. 그 뒤 막내딸 것마저 잃어버리고 시치미를 뚝 때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 사실을 이야기했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썬 그라스를 애용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썬 그라스를 가지고는 다니지만 거의 쓰지 않아도 산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말이다.
오늘은 햇볕이 강열해서 썬 그라스를 꼈다. 산 속으로 들어가니 녹음이 짙어져서 어둑컴컴했다. 조금 가다가 썬 그라스를 벗어보았다. 녹음의 틈새로 내려 비치는 햇빛이 나뭇가지의 연두색 잎에 찬연히 빛나고 나머지 햇빛이 땅의 풀잎에 비추는 광경은 휘황찬란하다. 물을 머금은 땅의 냉기로 인하여 공기는 시원하다 못해 추울 정도로 상쾌했다. 늘 오후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시며 산을 오르던 나는 아침 등산이 이렇게 사람의 기분을 돋우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내일 부터는 가능한 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능선으로 오르던 나에게 둘레 길은 가벼운 산책이었다. 두 시간을 걷는 내내 기분은 상쾌했으며 주변 경치는 늘 다니는 길이었지만 새로웠다. 가는 도중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아침에 걷는 기분이 이렇게 상쾌하니 많은 사람이 아침등산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또 그들은 대부분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온 젊은 주부들이거나 할 일 없는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어쨌든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한 시간 쯤 걸어가니 산속 간단한 헬스장에는 여러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 언덕 위의 벤치에 앉아 차 한 잔을 타 마시고 쉬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없이 앉아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쓸모없는 일이지만 늘 집에서 하는 일(노동은 아님)이 있어 서둘러 헬스장으로 내려갔다. 헬스장에 도착하니 아침 회원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려는 중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회원이 가끔 막걸리를 가져와서 같이 마신다. 어울려서 막걸리 한 컵을 마셨다. 오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대화가 많아 재미는 있지만 운동이 한없이 지체되어 시간이 많이 낭비된다. 그래서 나는 늘 오후에 가서 혼자 또는 두셋이 조용히 운동을 하면 단시간 내에 마치고 올 수 있다.
먼저 온 회원들은 운동을 마치는 쪾쪽 뿔뿔이 흩어져 내려갔다. 나중에 나와 아주머니 한분만 남았다. 나는 벤치에 쉬고 아주머니는 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준비해간 톱과 낫으로 채소밭에 몇 포기 심어 놓은 고추와 토마토 지지대 나무를 몇 개 베었다. 반듯한 생나무는 많지만 쓸모없는 생나무일지라도 공무원이 보면 말을 들을 세라 마른 나뭇가지를 골라 베려니 곧은 것은 거의 없어 구부러진 것이라도 그런대로 쓸 수 있으니 몇 개 베었다. 오다가 텃밭에 들러서 전에 세워둔 작은 지지대를 뽑아내고 긴 지지대로 교체했다. 우리 집 텃밭은 상추 아욱 수갓 고추 토마토는 심을 때 비싼 걸음을 뿌린 탓으로 다른 집 채소보다 훨씬 잘 자라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마석에서 취미로 농장을 하는 친구의 농장에 갔을 때 채소가 너무나 풍성하게 자라나서 물었더니 자기는 비싼 걸음을 아끼지 않고 쓰기 때문이란 말을 들었다. 오늘 오전은 특별히 기분 좋은 뜻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