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와 토착화
1열왕 8,22-30; 마르 7,1-13 / 2024.2.6.; 연중 제5주간 화요일
교회는 본성적으로 선교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바쳐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바로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를 복음화시키는 선교 과업에 있어서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알리고 실천하는 활동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음을 어제 전해 드렸습니다. 그에 이어 복음화 과업에서 기본이 되어야 하는 활동이 토착화 과제입니다. 아시아인들은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정신 전통을 물려 받아왔기 때문에, 이 전통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그분 말씀에 따라서 승화시켜 해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시아를 비롯하여 인류가 발전시킨 모든 문화에는 하느님의 이끄심이 깃들여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식별하는 일이야말로 문화의 본질과 정체성을 ‘캐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성전을 지은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하늘이나 땅 어디에나 계시지만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청함으로써, 성전이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거룩한 장소라는 것과, 하느님께 대해서보다도 신앙 공동체를 위해서 더 필요한 곳임을 드러내었습니다(1열왕 8, 23-30). 그러니까 솔로몬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느님을 섬겨온 조상들의 전통은 진리를 반영함으로써 그런 대로 명실상부하게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조상들의 전통을 앞세워 거꾸로 하느님 말씀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이러한 그네들의 위선을 평소에 자주 접하시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금과옥조처럼 지켜오던 조상 전통을 하느님 말씀으로 상대화 시키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들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마르 7,13). 그리고는 조상들의 전통을 새로이 해석하여 가르치셨으니, 이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마르 12,29-31).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사도직 활동은 사제직, 예언자직 그리고 왕직으로 나뉘어집니다. 사제 직무는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성체성사를 봉헌하며 자기희생의 삶으로 제사를 바침으로써 그분의 희생을 기념하는 일이고, 왕직은 공동선을 위해 투신하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예언자 직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일로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기 위해서 신앙과 이성이 모두 발휘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직무가 부활의 은총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은총이 이 땅에 기적처럼 비추었으니, 240여 년 전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에는 참으로 오묘한 섭리가 작동되었었습니다. 우선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파견되기 시작한 서양 선교사들이 수십 년 동안 노력하여 한문을 배운 후에 그 지식으로 서양의 교리와 신학을 번역하되 유학의 논리와 사유를 존중하여 저술해 놓은 일을 보유론적 선교라 하는데,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선교할 때에는 없었고, 아시아인들에게 선교할 때에만 나타난 오묘한 섭리의 첫째입니다.
그런 한역서학서들이 무려 근 2백 년 동안이나 조선에 유입되어 수많은 선비들이 읽었지만 대개 흥밋거리로 그친 데 비해서, 유독 이벽은 한역서학서들이 전해준 천주교 교리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어려서부터 나름대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믿을 만한 지인들이 이 저술들을 공부한다고 하니 그 자리에 동석하여 마침내 실학 강학회를 천주학 강학회로, 다시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성격을 전환시켰고, 천주교 교리만을 적어 놓은 ‘천주실의’를 넘어서서 신구약 성경의 맥까지 짚어서 해설한 ‘성교요지’를 지었고,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이 진리를 전하려고 순한글 4·4조로 ‘천주공경가’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로, 세계 교회사상 처음으로 자생적인 천주교회를 탄생시킨 일을 그 오묘한 섭리의 둘째로 들 수 있습니다.
이벽이 발휘한 선하고도 거룩한 영향력을 받은 정씨 삼형제의 활약도 그 오묘한 섭리의 셋째로 들 수 있습니다. 정약종은 서양에서 알려준 하느님을 우리 조상들은 유학이 들어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믿어 왔음을 밝혔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으로 한민족의 전통적인 종교 사상까지 식별한 것인데, 그러나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닌 잡신들을 불러 들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귀신놀음은 우상숭배로 배격하여 교우들을 가르치는 ‘주교요지’를 지었습니다. 유학에 밝은 선비들보다 하느님을 알고 있던 백성들을 위할 줄 알았던 정약종은 이벽보다 한술 더 떠서 보유론적 관점을 넘어선 것입니다. 또 정약용은 장기간 유배를 당하게 된 기회를 선용하여, 이벽으로부터 배운 천주학의 관점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유학 경전을 모조리 재해석해 내었으니 그것이 5백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 전서입니다. 그 결과 주자학을 유교로 교조화시켜서 사상을 통제해 온 조선 사회의 시대적이고 사상적인 모순을 낱낱이 해석해내었습니다. 주자학밖에 모르던 조선의 선비들을 위한 신학적으로 사상적인 봉사였습니다. 외딴 섬으로 유배간 정약전은 이 아우들보다 한 술 더 떴으니, 임금도 양반도 필요 없이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꿈꾸었을 뿐만 아니라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이기(理氣) 논쟁에 매몰되어 있던 유림들과 몰이성적인 사문난적 논쟁으로 애꿎은 인재들을 죽이며 권력투쟁에 골몰하던 기성 사대부들과 달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생활상과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기록하는 해양어류도감을 편찬해 내었는데, 이것이 ‘자산어보’입니다.
이것이 고리타분한 유다교 지식인들과 달리, 조상들의 전통과 시대의 징표를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말씀을 전한 선각자들의 발자취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되 서로 발을 씻어주듯이 섬기며, 이 섬김의 십자가로 부활하는 대동세상을 이룩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들었습니다. 이렇듯 부활의 은총으로 나타난 오묘한 섭리는 천주교회 역사상으로도 유례가 없고,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그 정체성을 스스로 밝히고 평화적인 노력으로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기적적인 일입니다. 이렇듯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에 선각자들이 발휘한 토착화 노력은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례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은 이 같은 선도적인 토착화 노력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계승되어야 하며 더욱이 아시아 모든 나라의 교회에서 보편화되어야 함을 문헌 ‘아시아 교회’에서 토착화의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21항).
“세상의 다양한 문화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교회는 자신의 진리들과 가치들을 전달하고, 문화들을 내적으로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다양한 문화들 안에 존재하는 긍정적 요소들을 취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 전파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소개하고 그것이 민족들의 문화유산의 구성 요소가 되도록 따라야 할 길이 있습니다. 역으로, 다양한 문화들은 복음의 빛으로 새롭고 완전하게 될 때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신앙의 참된 표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토착화를 통하여 교회 자신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표지가 되고 선교의 유효한 도구가 됩니다.” 문화들과 이루는 이러한 유대는 역사 안에서 언제나 교회의 순례 여정의 일부를 이루어 왔으나,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너무 빈번하게 외래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아시아의 다원 윤리적, 다원 종교적, 다원 문화적 상황에서 그것은 오늘날 특별한 긴급성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교대의원회의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되었던 것, 곧 성령께서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토착화의 제일 주역이시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를 진리 전체로 이끄시는 바로 그 성령께서는 다양한 민족들의 문화적 종교적 가치들과 결실 풍부한 대화를 할 수 있게 해 주시며, 민족들 사이에 일정하게 현존하시면서, 성실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악과 악마의 계략에 대항할 힘을 주시고,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아시는 방식으로 파스카 신비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각자에게 진정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성령의 현존은 대화가 진리와 정직, 겸손과 존경 안에서 진행되도록 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제공하면서, 교회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교회는 자기 청중의 정신과 마음, 그들의 가치와 관습, 그들의 문제들과 어려움, 그리고 그들의 희망과 꿈들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일단 교회가 문화의 이러한 다양한 면들을 이해하고 알게 되면, 교회는 구원에 대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존경심과 명확성과 확신을 갖고, 자유롭게 그것을 듣고 또한 그에 응답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자기 것으로 삼기를 바라는 아시아 민족들은 자신들의 희망, 기대, 근심과 고통들이 예수님께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신앙의 선물과 성령의 능력이 그들 삶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진정한 통과점이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은총의 덕분으로, 이러한 대화를 신중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사목자들의 과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에 관련된 학문이나 세속 학문의 전문가들도 토착화 과정에서 수행하여야 할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하느님 백성 전체를 포함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전체의 삶은 교회가 선포하고 채택한 신앙을 펼쳐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깊이 있게 실현될 수 있도록, 주교대의원회의 교부들은 특별히 관심을 쏟아야 할 어떤 분야들을 명시하였습니다. 곧 신학적 고찰, 전례,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양성, 교리 교육과 영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