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32414 충남 예산군 삽교읍 두리학교길 19 ☎(041)337-3407 기독교대한감리회 삽교교회 원로목사 박 한 응(朴 漢 應)H.P 010-5452-4865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43ch E-Mail : parkkr.043@hanmail.net ***************************************************************************** 2024.4.21. 주일오후예배 설교문 【부활 후 제3주일】 본 문 : 마태복음 16 : 24 - 25 제 목 : 나를 따라 오려거든…(십자가를 져라) 찬 송 : 363, 364, 365, 367, 514, 519. 복음송 : 눈물의 참회록, 용서하소서,
할렐루야!!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아 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질문을 하신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이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기를 “예, 선지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라고도 합니다. 헤롯왕에게 목 베어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왔다고도 합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견을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로 아느냐? 나를 누구라고 믿고 따라 다녔느냐?” 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참으로 흡족해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알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3년씩이나 동거 동락하면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 준 제자들의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 오직 베드로 한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의 여러 성도들 중에 베드로와 같이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 주님은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있는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비로소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또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도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신앙생활 할 때 얼마나 고통이 많고 환난이 심합니까? 그 고통과 환난을 참고 예수이름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 고통의 십자가는 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의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갈 때에 환난과 고통은 필수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까지 쉽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까? 한여름 뙤약볕에 가꾸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모진 태풍도 겪어야 합니다. 비바람도 견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보다는 안전을 좋아합니다. 불안보다는 평안을 원합니다. 가시보다는 화려한 꽃을 좋아합니다. 십자가보다는 면류관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려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러면 오늘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아 멘!>
1.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3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의 인생이 예수 중심의 인생으로 바꿔져야 하고, 예수 중심의 생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내가 살아온 모든 인생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임재 하여 나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온전한 생활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증거하여야 하는데 반대로 예수를 부인하고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죽고 예수가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날 때에 예수님은 근심하시고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G.S> 눈물의 참회록 지금껏 내가 한일이 주를 위한 것이었는지 지나간 세월 돌이켜 주님 앞에 아룁니다. 이한 몸 주를 위하여 목숨 버린다 했으나 주의 영광 뒤로하고 나의 자랑 앞세웠으니 내가 가는 이 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예수 이름을 파는 가롯유다와 같습니다.
2.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 말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우리의 생명을 누가 주었습니까? 바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또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누가 살려 주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생명을 주님을 위해서 바쳐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우리의 생명을 버리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믿음 때문에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기쁨으로 순교를 하였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모두 기쁨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계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처음 복음이 전파되면서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교사가 순교의 피를 흘렸고, 수많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3.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장차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부끄러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눅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잠시 시험에 빠져서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였다가 얼마나 가슴 치며 방성대곡하고 회개하였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세 번이 무엇입니까? 시도 때도 없이 주님을 부인하고 예수를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시인하고 예수를 전파해야 합니다.
4. 그러면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져야 하는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환경이 좋고 모든 여건이 원활하게 잘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할 때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충성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참 성도는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어올 때에야 참 믿음을 알 수 있듯이 교회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참 믿음을 가진 성도를 알 수 있습니다. 참 성도는 말이 없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일을 할 때 잡음을 내지 않습니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사명을 감당치 못하면 그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책망만 받은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빼앗기고, 어두움에 쫓겨나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 왕 사울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 사명을 빼앗아 베들레헴 양치기 목동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사명 강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키우고 계셨습니다. 결국 엘리의 사명은 사무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2) 자신의 생활이 곤궁하고 어려울 때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이 넉넉하고 환경이 순조롭고 모든 것이 태평할 때 충성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형편이 어렵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환경적으로는 괴롭고, 육신적으로는 고통이 있는 중에도, 충성하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는 빚도 집니다. 없으면 외상도 갔다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여인이 물질이 풍성해서 엘리야 공궤한 것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두 렙돈을 헌금한 여인이 칭찬 받은 것은 많은 중에 드린 것이 아니고 없는중에서 가난한 중에서도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도 많아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한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마른 멸치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린 것은 많아서 남아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시장기를 메우려고 싸 가지고 온 점심 도시락이었습니다. 그 적은 것을 예수님께 드릴 때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서 예수님이 축사하시니 5천배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믿음의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아 멘!> 믿음의 사람들은 환난 중에서 믿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아 멘!> 믿음의 사람들은 궁핍한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축복을 받았습니다.<아 멘!> 헌금과 믿음은 반드시 병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3)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불러서 사명을 주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을 이 시대에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렘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5천5백만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비록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나귀 턱뼈도 삼손의 손에 들리어 질 때 불레셋 군대 1천명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흔하디흔한 돌멩이도 다윗의 손에 들리어 질 때 불레셋 나라의 골리앗 장수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양치는 지팡이도 모세의 손에 들리워 질 때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들의 믿음이 어떠하였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어떠하였습니까? 내 맘에 들면 충성하는 척 하고 외식과 허영과 교만과 가증된 것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다 같이 복음 성가를 한 절 부르겠습니다.
지금껏 내가 한일이 주를 위한 것이었는지 지나간 세월 돌이켜 주님 앞에 아룁니다. 이한 몸 주를 위하여 목숨 버린다 했으나 주의 영광 뒤로하고 나의 자랑 앞세웠으니 내가 가는 이 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예수이름을 파는 가롯유다와 같습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 바로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정직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말과 같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하는 지를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1) 십자가는 눈물로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 없이 질 수 없는 길이요 또 눈물 없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시절 주기철 목사님은 감옥에서 찬송을 지어 불렀습니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만은 가야만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십자가의 길은 분명 고난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며 희생의 길입니다. 눈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골고다를 올라가는 심정으로 울며 울며 천국을 향하여 쉬지 말고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십자가는 감사한 마음으로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구령 사업에 동참하는 축복된 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짜증과 불평과 원망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어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원망을 하시던가요? 불평을 하시던가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3) 십자가는 기도로 지고 가야 합니다.
눅22:40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쓴잔을 앞에 놓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고 부탁하시고 예수님도 친히 엎드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질 자격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교회에 충성하는 것 본 일이 있습니까? 교회를 분열시키고 불평과 원망만을 합니다. 그래도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도하고, 봉사도 하고, 감사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주일성수도 하고,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주님의 권능으로 져야 하고, 주님의 권능은 성령이 임할 때 선물로 주시는 것이며,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능력을 받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받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4) 십자가는 죽음으로 지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죽을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생의 구원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행14:22절에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 바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골고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지고 눈물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지고 갈 때 주님의 뜻을 이루는 충성된 주님의 종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5) 십자가는 날마다 져야 합니다.
날마다 진다는 것은 어느 일정한 한 때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는 언제든지, 그리고 항상, 쉼 없이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로마에서 사형 집행을 하는 형틀입니다. 그러나 주님도 지셨으니 나도 지고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무겁다고 힘들다고 벗어놓지 마세요.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내가 지지 않으면 누가 지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져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십자가 지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알리는 말씀을 전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한 저의 설교를 사랑해 주시는 전국, 세계의 모든 동역자님들과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설교문을 작성함에 있어서 외람된 말씀이오나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려고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나의 카페를 비롯하여 몇몇 기독교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또 나의 설교는 모두 실명제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설교는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고 인용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자신의 사이트나 다른 곳에 자신의 설교인양 전제를 하여서 이것을 보신 분들이 내가 그것을 보고 도용을 하였다고 오히려 나를 책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안되겠습니다. 나의 부족한 설교를 인용도 하시고 전문 사용을 하셔도 좋으나 다른 곳에 전제를 하는 것은 삼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만약 앞으로 이와 같은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항상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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