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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세력은 개인의 소유와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공공적인 혜택을 늘려나가면서 차츰 전 세계를 사회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로 끌고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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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미접종자가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때로는 서로 아주 밀접해 있는 지하철은 이용할 수 있고 마트는 출입 불가하다는 백신패스는 방역이 아니라 그냥 "이래도 백신 안 맞을래?" 하는 것뿐이다. 정말 방역을 위한다면 다 막아야 맞다. 그렇지 않다면 방역보다 백신 강제 접종에 더 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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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접종에 민감한 임신부 등은 백신패스 예외자로 둘 수 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들도 백신 미접종자면 감염이나 전파 위험성 면에서 단순 미접종자와 똑같다. 백신패스의 주된 의도가 감염 방지보다 백신 미접종자들의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데 있다는 걸 자신들도 모르게 슬쩍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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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패스가 백신 미접종자를 코로나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논리는 백신에 효력이 없다는 걸 자인하는 것이다. 백신 접종자와 미접종자가 섞여 있을 경우 원칙적으로는 양쪽 다 위험하지 않다. 백신 접종자는 백신을 맞아서 안전하고, 미접종자는 접종자에게서 감염될 위험이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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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유익을 위해 백신을 맞았다"는 접종자들이 많다. 그러면서 백신을 접종할 때는 러시안 룰렛이 될까봐 벌벌 떤다. 이런 백신은 애초부터 국민에게 맞혀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진정으로 공공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백신 비접종으로 항의해야 시민적으로 더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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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유럽이 대부분 다 백신패스를 시행하고 있으니 불평하지 말라." 과학적 근거로 방역정책을 펴야 할 당국자들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도 시기적으로 세계정부주의의 아젠다와 내통하고 있다면 정치적 세뇌용 언사로는 적당하다. 지금 의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너무 뒤늦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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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진행된 부정을 문제삼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행보를 놓고 '민주주의의 수호자', '민주주의의 배신자'라는 상반된 평이 나오고 있지만, 민주주의보다 더 중한 정의의 가치를 시류에 떠내려 보내버린 것만은 사실이다. 그도 세상의 정치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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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을 비롯해 세계경제포럼, IMF, 세계보건기구나,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정부운동의 하부 도구들로 사용될 것 같다. 개인의 소유와 자유를 제한하는 대신 공공적인 혜택을 늘려나가면서 차츰 전 세계를 사회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로 끌고 갈 것이다. 그들도 열심히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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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가 어디냐로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은연중 자리해 있다면 주의 마음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미국에 있을 때는 인종차별주의가 얼마나 큰 죄인가 절감했는데, 한국에선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으로 거주지 차별주의가 느껴진다. 신자부터 이를 없애야 세상도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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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신자들도 많고, 교회 안에서 방황하는 신자들도 많고, 교회 안에 의외로 불신자들도 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는데도 교회는 왜 그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을까. 그러면서 아직도 기독교 변증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면 방황을 조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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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생각하면 내 마음에 금세 천국이 임하는 것 같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주조가 되면 기도중에 일종의 황홀경을 체험한다. 전에 잘 몰랐던 이런 연합의 신비로운 만지심을 경험하면서 나는 신랑이 정말 문 앞에 이르렀구나 직감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금세 휩쓸려가기 딱 좋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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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스스로 구입한 질병..." 버스 측면에 나붙은 한 금연 광고의 카피다. 질병은 피치 못해 걸리는 건데 스스로 구입한다면 200% 손해다. 알면서도 계속 죄짓는 데 미련을 둔다면 죄를 돈 주고 사는 것과 같다. 죄를 못 버린단 말은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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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에 주의 심판을 담대히 못 외치는 시대가 됐다. 반사회적이란 비난을 들을까봐 다가올 종말의 큰 환란에 대해서도 유구무언이다. 스스로 초월적이길 거부하고 윤리적이기만을 자처한 이빨 빠진 호랑이, 높은 하늘이 두려운 겁 많은 독수리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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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늘 동행하면 작은 죄도 그때그때 물리쳐진다. 곧바로 역반응이 튀어나온다. 정말 1초도 안 걸린다. 보통의 순발력으로는 쉽게 기대치 못할 거의 초자연적인 반응이다. 죄는 묵상하고 궁리하면 반드시 엮이지만 성령님이 단속해주시면 즉시 무장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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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세상에서 좋다 하는 모든 걸 초월케 하는 유일한 동기가 되길 원한다. 마음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비교가 된다. 그게 좋으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주어지는 기쁨이 좋으냐? 세상을 이기는 전천후 버팀목은 후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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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교회 안에 교회가 있는 시대라고들 한다. 주님이 남은 자들, 이긴 자들을 찾아 구별하시는 때다. 종말이나 재림에 대해 말하지 않는 교회에서도 종말적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데 충실하되 초점은 늘 재림하실 주님께만 두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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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12). 비합법적인 용서가 아닌 정당한 심판이 하나님의 인자함이다. 과잉징벌하지 않고 행한 대로 갚는 것이 인자다. 지옥이 하나님의 인자라면 천국 또한 그분의 충분한 공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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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믿고 666 베리칩 안 받아야 천국!" 지하철에서 이렇게 외치고 지나가는 전도자를 사람들은 비웃었다. 적그리스도의 표를 베리칩으로 딱 지정한 게 거슬렸지만 666 받지 말라는 건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듯싶었다. 전도는 나중을 위할 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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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시작하며 드린 찬양을 그날 기도 중간중간에 계속 드리면 자연스럽다. 여러 곡 드리기보다 한 곡을 여러번 깊이 묵상하며 드리는 게 좋다. 그날 묵상한 말씀과 함께 이 찬양이 하루 종일 음미되면 더 좋다. 하루에 하나만 잡아도 1년이면 365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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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중심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초입의 많은 시간을 기도의 언저리에서만 맴돌며 서성일 때가 있다. 그러다가 대책없이 시간만 많이 흘려 보내버릴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없이 보낸 시간도 기도로 받아주신다. 어쩌면 가장 애틋한 기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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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불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일을 하나님께 아뢰지 않고 자기만 알고 사는 것이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밀어내놓고 자기 뜻대로 살면서도 신자일 수 있을까. 누구든 그의 삶에 기도가 없다면 그는 사실은 전혀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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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응답받기 위해서만 드리는 종교적인 특정 양식이 아니다. 기도 자체가 신자의 가장 뚜렷한 정체성이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라고 믿고 사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첫사람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여전히 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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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수록 기도 드릴 내용이 많아진다. 기도를 안 할수록 기도할 거리가 없어진다. 기도가 어려워지는 것은 기도를 안 하거나 기도 이론만 배우려는 탓이다. 기도할 내용이 많아지면 기도가 쉽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이동하면 기도가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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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도는 엄벙덤벙하거나 들쭉날쭉하지 않다. 삶의 내용이 세세하게 아뢰어질수록 기도가 안정되어가고 중심이 잡힌다. 하나님께 이 정도는 당연히 안 아뢰어도 되겠지 하는 영역이 줄어들수록 겸손하고 좋은 기도다. 기도의 사각지대가 곧 삶의 사각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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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생각을 끊임없는 기도로 바꾸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내 힘으로는 안 된다. 나 자신이 몽땅 하나님께 사로잡히면 된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것은 항상 기도하는 것과 같다. 기도하는 상태가 아니고는 항상 기뻐하거나 감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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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는 누구든 하루 한 시간씩 꾸준히 하나님께 기도하면 한 달이 못되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너무 바빠 이것 하나를 집중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시고 싶어도 내내 못 주시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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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눈 감고 가만히 앉아서만 기도하란 법은 없다. 나는 눈 뜨고 방을 왔다갔다하거나 길을 걸으며 기도하기도 한다. 버스, 지하철 안에서나 운전중에 기도하기도 한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기도할 수 있다. 기도를 종교로 묶지 말고 일상으로 풀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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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회개하다보면 죄가 싫어진다. 맨날 회개만 반복하면 무슨 소용이냐며 아예 회개 않고 살면 감쪽같이 놓쳐버릴 비책이다. 죄를 짓고 나서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어느새 정화작용을 한다. 죄를 죄로 잘 못 보는 이들에게 회개만한 안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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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언을 구한 적이 없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내 혀를 붙잡으셨다. 하나님의 인격이 내 몸에 직접 나타난 듯한 느낌이랄까. 나를 사로잡아 그 위엄 앞에 복종케 하는 권능의 손길이랄까. 두고두고 내게 영적 부흥의 감각을 일깨워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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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방언기도를 드리기 어렵지 않을까. 어떻게 내 혀를 성령님의 주관에만 맡길 수 있는가. 혀로 상징되는 내 고집과 생각을 주께 내려놓는 것이 방언기도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주신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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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중에 방언기도와 일상언어기도를 번갈아가며 시키실 때가 있다. 방언기도중에 마음에 떠오른 말이 일상언어로 이어지고 다시 비슷하게 번갈아 반복된다. 이때 내 영은 성령충만해지는 걸 느끼는데, 내가 한 번도 생각 못한 기도를 막힘없이 시키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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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 오면 끝까지 버텨내는 것도 기도다. 그때 기도에 내성이 붙는다. 기도할 때의 졸음은 단순 생리현상이 아니다. 마귀의 너무도 뻔한 영적 공격일 때가 많다. 같은 컨디션으로 다른 일을 해보라. 졸음은커녕 더 힘이 난다면 진작에 감을 잡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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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만 하고 끝나면 진정한 기도가 아니다. 내가 기도한 것, 기도해준 사람들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그들이 기도한 대로 살도록 도와야 한다. 회개와 믿음, 순종처럼 기도와 말씀, 순종 또한 한 묶음이다. 기도 응답의 열매에는 반드시 내 삶도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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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기도의 자리를 떠나면서 진짜 기도가 시작되고 아침묵상의 기록을 마치면서 진짜 묵상이 시작된다. 기도와 묵상은 습관처럼 하루 종일 진행되어야 한다. 아침기도와 묵상은 하루의 중심을 바로잡아주고, 이후 일상의 기도와 묵상은 평생의 중심을 바로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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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중에 잠잠히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일 때가 많다. 하나님은 자주 내 생각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 생각을 사탄이 주는지, 내 마음이 주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지를 잘 분별해내는 것이 영적 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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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 구절을 놓고 100가지 질문을 찾아보곤 했다. 5W1H를 중심으로 질문을 다각도로 던지다보면 수많은 통찰이 새어나온다. 묵상의 처음과 끝은 질문이며 묵상의 묘미도 질문에서 나온다. 애써 캐내지 않고는 무진장한 금광이 땅속에 그대로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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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은 아주 작은 일에도 마음이 상하실 수 있다. 성령충만은 나도 성령님처럼 죄에 예민해지는 것이다. 크든 작든 죄에 둔감해지게 만들려는 사탄과는 정반대다. 죄를 이기는 길은 죄에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안 그러면 늘 당하고 나서 뒷북만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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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간에도 용서는 아무렇게나 처리해줄 수 없는 공정거래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무조건 용서해줘버리면 오히려 그를 해롭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에 진정한 회개가 빠진다면 어떨까. 값싼 용서는 진정한 구원과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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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외면한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않으신다. 있는 모습 그대로 진실하게 나아가면 제대로 나아갈 길을 반드시 가르쳐주신다. 지레짐작이 정말 사람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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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서 위대하고 심오하다고 여기는 사상과 예술, 정교한 문명의 이기, 수려한 건축물들을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 인간이 창조주를 자기보다 더 어리석게 여기는 건 주제 파악을 한참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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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청년들이 사회개혁에만 관심 갖고 매달리는 것에 반대한다. 육신이 앞서는 탓에 눈에 보이는 결과를 먼저 좇다가 결국 자기 영혼은 잃어버리기 쉬운 시대다. 기독교진리는 영혼 구원이 우선이다. 세상도 할 수 있는 일은 차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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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악해지고 문화가 타락할수록 그 이전에는 구원받을 수도 있었을 영혼들이 쉽게 오염되어 구원에서 더 멀어진다. 그래서 구원은 사회변혁의 노력과 아예 무관할 순 없다. 그러나 일반은총으로 지키실 영역에까지 과도하게 특별은총을 낭비할 이유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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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강자든 약자든 부한 자든 가난한 자든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포하는 진리다. 그들이 다 구원이 필요한 약자와 소자라고 말한다. 세상의 기준으로 규정된 약자와 소자를 세상 논리로만 돌아보려 한다면 기독교 진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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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배에 늦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비된 특별한 은혜가 있다. 적어도 10분 전에는 예배자리에 앉아 기도로 준비해보라. 그후 찬양이 다르고 말씀이 다르다. 이 극히 사소해보이는 작은 일을 큰 일처럼 여기면 전에는 크게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은혜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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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과 양심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은혜와 율법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양심으로 온갖 선하고 고상한 일을 다 하지만 거기에 주님은 없는 경우가 많다. 믿음으로 도약하는 거야말로 가장 큰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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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창세기 1장은 믿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닌 듯싶다. 최후심판날 내놓을 창조사건의 물증이다. 죄인은 그토록 단순간결하고 웅장한 선포를 도저히 못 믿는다. 그래서 신화들의 짜깁기니 하는 데로 숨는다. 너무도 당연한 예견된 반응에 하나님도 안 놀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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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내 죗값을 갚으시려고 피 흘려 죽으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된다.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실 안에서 나는 이미 용서받았다. 양심으로 율법 안에 살면 정죄, 믿음으로 은혜 안에 들어오면 그 즉시 사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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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점을 한 점씩 떼내어 서서히 능욕을 더해 죽이는 능지처참은 인류사 최고의 극형인데 지옥 형벌과 닮았다고 한다. 죄에 대한 신의 진노를 가벼이 여긴 대가는 영원히 못 돌이킨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욥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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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배우려면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기도에 연속성이 없으면 능력이 없다. 꾸준히 기도하지 않으면 제대로 기도한 적이 없다. 띄엄띄엄 기도하거나 형편 되는 대로 하는 기도는 기도한다는 명분만 있고 내용은 끝내 못 누리고 만다.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 년 전 오늘 나눈 단상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