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진씨 2世 참정,판병부사 진준(陳俊) 사적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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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진씨 2세조:參知政事,判兵部事公 진준(陳俊)사적 再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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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양진씨 2세조-진준 편, 고려사원본
71.고려사 진준 편
진준(陳俊)
陳俊淸州驪陽縣人有勇力起行伍積勞拜衛將軍戌北界戌將例不得著正角幞頭獨俊著之知兵馬使梁升庸禁之不從劾罷之起爲大將軍明宗朝累拜知樞密院事進叅知政事判兵部事 1)九年卒性質直頗得時譽王亦器重庚癸之亂文臣家賴俊全活者甚多時人謂有陰德後必昌孫湜澕溫皆登第有文名湜官至御史大夫澕選直翰林院以右司諫知制誥出知公州卒善爲詩詞語淸麗少與李奎報齊名時號李正言陳翰林
註 1)판병부사(判兵部事):종1품
연구자 사적재구(事蹟再構)
여양진씨(驪陽陳氏) 2세조(世祖) 진준(陳俊)-
開府儀同三司中書門下省叅知政事兼判兵部事公 略傳 (개부의동삼사 중서문하성 참지정사겸 판병부사공 약전)
陳俊淸州驪陽縣人考諱寵厚驪陽君驪陽陳氏始祖也載高麗史卷一百毅宗明宗兩朝庚癸之亂施德載高麗史二十八卷六頁鄭仲夫等又殺內侍少卿崔儇流少卿崔偆員外郞崔値又欲撤所殺文臣家陳俊止之曰吾輩所嫉怨者李復基韓賴等四五人今殺無辜亦已甚矣若盡撤其家其妻子將何寄生義方等不聽遂縱兵毁之是後武人習以爲常若有讐怨者輒毁其家仲夫義方李高等領兵迎王弟翼陽公晧卽王位載高麗史一百二十八卷七頁內侍陳義光裵允材知之甫當臨死誣曰凡其文臣孰不與謀於是一切誅戮或投江水旬曰閒文士戮且盡中外洶洶莫保朝夕承宣李俊義及陳俊自知無道乃請義方止殺戮郎將金富亦謂仲夫義方曰天意未可知人心不可測恃力不揆義獮薙衣冠世寧少金甫當乎吾輩有子女者通婚文吏以安其心可久之道也高麗 第十九代 明宗 二年 壬辰(1172)年知樞密院事陳俊爲左軍兵馬使同知樞密院事慶珍爲右軍兵馬使上將軍崔忠烈爲中軍兵馬使攝大將軍鄭筠知兵馬事上將軍趙彦爲前軍兵馬使攝大將軍文章弼知兵馬事上將軍李齊晃爲後軍兵馬使司宰卿河斯淸知兵馬事復攻西京載高麗史第九十六卷三十四頁同年尹鱗瞻爲東北面兵馬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使 陳俊爲東北面兵馬使行營兼中軍兵馬使載高麗史十九卷十七頁明宗四年甲午(1174)年 參知政事載高麗史百卷二十一頁明宗五年乙未(1175)年春正月己丑以陳俊爲兵部尙書宋有仁爲刑部尙書載高麗史十九卷二十五頁明宗六年丙申(1176)年 叅知政事 兼 判兵部事 鱗瞻曰位寵將死矣去人與頭豈可生乎鱗瞻遣秘書少監庾世績表賀平西王遣吏部侍郞吳光陟詔班師加鱗瞻推忠靖亂匡國功臣上柱國監修國史遣參知政事陳俊迓勞諸將于金郊驛復遣介第平凉侯賜宴于馬川亭及還又賜宴以勞之是年卒年六十七諡文定載高麗史九十六卷三十六頁 明宗九己亥(1179)年六月戊子朔王如奉恩寺四日辛卯參知政事陳俊卒載高麗史二十卷二頁 陳俊淸州驪陽人有勇力行伍積勞拜衛將軍戌北界戌將例不得著正角幞頭獨俊著之知兵馬事梁升庸禁之不從劾罷之起爲大將軍明宗朝累拜知樞密院事進參知政事判兵部事九年卒性質直頗得時譽王亦器重庚癸之亂文臣家賴公全活者甚多時人謂有蔭德後必昌孫湜澕溫皆登第有文名湜官至御史大夫澕選直翰林院以右司諫知制誥出知公州卒善爲詩詞語淸麗少與李奎報齊名時號李正言陳翰林長子諱光恂文科壯元及第次子諱光脩郎中拜安西大都護府使拜兵部尙書載東文選啓狀祭文孫子湜溫澕三兄弟文科及第文章鳴世載高麗史一百 卷二十一頁松京宗人家乘公所居在松京西拂雲洞云配享於密陽鶴岡祠忠南洪城郡長谷面景德壇設壇每年陽十月三日奉享
歲在 壬辰年 七月 二十五日 始祖公 二十五世 海松 玉洙 謹記
본문내용▼ 여양진씨 2세조 진준(陳俊)-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참지정사겸 판병부사공 약전.
진준(陳俊) 청주(淸州) 여양인(驪陽人)이시며. 고휘(考諱) 총후(寵厚) 여양군공은 여양진씨 시조이다. 공은 고려 제19대 명종 2 임진(1172)년 지추밀원사 진준(陳俊) 좌군병마사가 되고, 동지추밀원사 경진 우군병마사, 상장군 최충렬 중군병마사, 섭대장군 정균 병마사, 상장군 조언 전군병마사, 섭대장군 문장필 지병마사, 상장군 이제황 후군병마사,사재경 하사청이 병마사가 되어, 다시 서경을 공격하였다. -근거:고려사제96권34쪽.
동년 윤인첨이 동북면 병마판사 행영병마겸 중군병마사, 진준(陳俊)이 동북면 병마사행영겸 중군병마사가 되었다 . -근거:고려사 제19권 17쪽
명종 4 갑오(1174)년 임오일에 정중부(鄭仲夫)를 문하시중으로 진준(陳俊)을 참지정사로 경진(慶珍)을 지문하성사로,기탁성(奇卓成)을 지 추밀원사로,송유인(宋有仁)을 추밀원 부사 병부상서로, 이광정(李光挺)을 추밀원 부사 어사대부로 각각 임명하였다. - 근거:고려사 제19권- 세가 제19 명종 1>갑오 4년(1174)
명종 5 을미(1175)년 봄 정월 기축일에 진준(陳俊) 선조가 병부상서가 되고, 송유인이 형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 근거:고려사 제19권 25쪽.-세가 제19 > 명종 1> 명종 을미 5년(1175)
명종 6 (1176)년 진준(陳俊)참지정사겸 판병부사가 되었다. - 근거:고려사 제 20권 2쪽
명종은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윤인첨등에게 참지정사 진준(陳俊)을 금교역까지 보내 여러 장령을 위로하며 영접하게 하고, 다시 왕이 아우 평량후(平凉侯)를 마천정까지 보내 위로연을 배설해 주었고 돌아온 후에도 거듭 위로연을 배설하였다. - 근거:고려사 제96권-36쪽. 열전 제9>윤관편
명종 9 기해(1179)년 6월 4일 왕이 봉은사에 간날, 진준(陳俊)선조님이 서거하셨다. -근거:고려사 제20권 2쪽. 세가 제20 >명종 2 >명종 기해 9년(1179)
경인~계사년간(1170~1173) 정중부의 난이 일어났을때, 문신집안이 공(陳俊)의 도움으로 살아 남은사람이 많았다. 그 때의 사람들이 공은 음덕을 쌓았으니 후손이 반드시 창대하리라 하였는데, 장자 휘 광순(光恂)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있으며, 차자 휘광수(光脩)병부상서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 낭중벼슬에 있을때, 해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지방토호들의 발호로 민심이 흉흉하여 어느 누구도 부임하기를 꺼려하였으나 , 장창처럼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을 공은 자청하여 대판(대도호부사)으로 나가 선정을 베푼기록이 동문선 서하집에 실려전한다. 손자 식,온,화 3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냈는데, 고려사와 동문선,이규보문집등에 사적이있다. 송경(松京) 종인의 가승에 기록되기를, "공은 송경 서불운동에 살으셨다고 전한다.
밀양 학강사에 위패를 모셨고, 충남 홍성군 장곡면 숭덕재에 설단! 시조공과 함께 매년 양력 10월3일에 전국종인이 한자리에 모여 제향을 받든다.단비명(壇碑銘)은 기계 유상근 선생이 찬(撰)하였고, 글씨는 안동 김충현 선생이 썼다.
임진(2012)년 7월 일,
집필자/시조공 25世 해송(海松)옥수(玉洙) 謹記 ----------------------------------------- 진준
3. 진준 참지정사 선치獮薙↑
4. 진준 참지정사 금교역
5. 진준 동북면 병마사행영겸 중군병마사
6. 진숙,진경보
75.진준 좌군병마사 동지추밀원사 진준지지왈 오배소질원자이복기,한뢰등 4~5인...
고려사(高麗史), 고려왕조실록(高麗王朝實錄)등 사서기록으로 본, 역사 재조명(再照明)!
시조 진총후?초휘:陳淑 여양군공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토평하여 국난을 극복하였고, 아들 진준(陳俊) 개부의동삼사공(開府儀同三司公)이 정중부의 난 때, 많은 문신들을 부호(扶護)하여 덕을 베푼 역사를 되돌아 보고자 한다. 정중부의 난은 고려 관료사회의 무반에 대한 홀대(忽待)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사건으로, 명종 대 이후 100여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권의 시초가 된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대개는 고려의 문신 중심의 관료 체제에 대한, 무신들의 누적된 불만의 표출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건의 전말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지속적인 권리회복운동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 라기 보다는, 처우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한, "다소 우발적인 경향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종 대 이후, "과거제가 정착되면서,
"고려사회는 통일 전쟁기의 과도기적 관료체제에서 벗어나 , 문신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한다. 이 같은 관료체제는 무신의 최고품계를 정3품 상장군에 한정시켰고, 이 때문에 전쟁상황 속에서도, 무신은 언제나 문신출신 상원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정중부의 난은 이시기에 다소 우발적인 사건이었는데, 이무렵 의종은 임종식, 한뢰 등의 문신들과 함께 향락적인 생활에 젖어 자꾸 미행을 나가곤 했다. 의종은 사흘이 멀다하고 연회를 베풀었고, 걸핏하면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궁궐 밖으로 행차하여 며칠동안 밤을 새우며 무인들을 혹사 시켰다. 이럴때면 호위병사 들은 굶주린 체, 추위나 더위를 이겨내며 경비를 서야했다.
1)고려사 제20권 2페이지 기록>정해(丁亥)정수궁궐(停修宮闕)6월, 무자삭(戊子朔)왕여 봉은사(王如奉恩寺)신묘(辛卯)참지정사(叅知政事)진준 졸(陳俊卒)
2)고려사 19권 37쪽 기록>명종(明宗) 24년 6월, 갑자(甲子) 왕여 봉은사(王如奉恩寺)정묘(丁卯), 진광순 문과 장원급제(陳光恂 文科 壯元及第)
고려사 검토결과>
1) 여 양 진씨 2세조 진준 참정, 판병부사공이, 왕이 봉은사에 간 신묘(辛卯) 일에 서세(逝世)하셨다. 고려사와 족보를 고찰하면, 이해는 명종 9 기해(己亥)-(1179)년 6월(辛卯)4일이다.
2) 그리고 15년 후인 명종24년(1194)에 동(同)사찰인 봉은사에서,왕이 갑자(甲子)일에 임어하여, 정묘(丁卯)일에 휘 준 판병부사공의 큰 아들인, 3세조 진광순(光恂)공에게 문과 장원급제를 주었다고 되어있다.
왕:명종(明宗)이 봉은사에 갔을 때, "진준 판병부사공이 졸했다는 고려사 기록과, 정중부의 난 때 덕을 베푼 역사적 사실, 수많은 전란을 평정했고 재상(宰相)인 참지정사 겸 판병부사로, "현직에 계시면서, 졸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명종이 시호를 내렸을 가능성 또한 매우높다.
고려사 96권 37쪽 기록> 견 참지정사(遣叅知政事)진준(陳俊)아노제장우(迓勞諸將于)금교역(金郊驛)부견(復遣)개제평량후1](介弟平凉侯)사연우마천정(賜宴于馬川亭)급환우사연(及還又賜宴)이노지(以勞之) 시년(是年)졸년(卒年)67(六十七)시호:문정(諡文定)
본문내용> 진준 참지정사공을 금교역까지 보내 여러장령을 위로하며 영접하게하고, 다시 왕이 평량후1]를 마천정까지 보내 위로연을 배설해 주었고, 돌아온 후에도 거듭 위로연을 배설해 주었다. 이해에 졸했는데 향년 67세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定)이다. 라고,"기록되어 있으나, 문정공 시호는 윤인첨의 시호로 확인하였다.
註 1]이해는 명종6 (丙申)1176년이며, 문정공시호가, 평량후(平凉侯)에게 내린 시호로도 볼 수 있으나, 평량후는 명종(明宗)의 아우로 고려 제20대왕 신종(神宗)이다. * 신종의 재위기간은 (1197년~1204년)이므로 1176년에 졸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준 참지정사 공에게 내린 시호로도 볼 수 있으나, 공은 명종9년인 己亥(1179)年에 서거하므로 이 또한 아닌 것으로 검토 되었다. 고려사에 누구의 시호라고 명확히 기록하지 않아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생.몰 시기로 보아 윤인첨(1110~1176)공이 당시67세로 고려사 기록과 일치한다. 현재 윤인첨 - 문정(文定)공으로 시호를 쓰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3) 족보기록은 참지정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적고 있으나, 이것은 선조의 품계적용이 신중치 못한것으로 판단된다.고려사에도 분명히 진준 선조의 관직을 판병부사(종1품)로 기록하고 있는데, 판병부사는 재신(宰臣)이 겸하도록 되어있다.
그렇다면 당시1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참지정사(叅知政事) 겸 판병부사(判兵部事)>로 기록되어야 옳으며, 고려사 기록을 토대로 행장을 보완, "재구(再構) 하여야 한다. 임신보 의, 참지정사 금자광록대부는>계,사,직(階司職)의 순서도 맞지 않다.
다음은 근거자료> 고려사, 백관지 153페이지- 판병부사(判兵部事)의 품계에 대하여!
1-7. 병조(兵曹) [병부(兵部) 군부사(軍簿司)]
原文 1-7. 兵曹掌武選軍務儀衛郵驛之政太朝元年置兵部令卿郞中後稱兵官有御事侍郞郞中員外郞其屬有庫曹太朝元年有徇軍部令郞中十六年有兵禁官郞中史光宗十一年改徇軍部爲軍部其職掌未詳疑皆是掌兵之官後並廢之成宗十四年改兵官爲尙書兵部仍改庫曹爲尙書庫部顯宗二年罷庫部文宗定兵部判事一人宰臣兼之尙書一人秩正三品知部事一人他官兼之侍郞二人正四品郞中二人正五品員外郞二人正六品忠烈王元年改軍簿司仍改尙書爲判書
[본문내용] 1-7. 병조) 무선(武選)과 군무(軍務). 의위(儀衛). 우역(郵 驛)의 정사(政事)를 관장하였다. 태조원년에 병부를 설치하고 영(令) 경(卿) 낭중을 두었다.
후에 병관(兵官)이라 칭했는데, 어사, 시랑, 낭중,원외랑이 있었으며, "그 속사(屬司)로 고조(庫曹)가 있었다. 태조원년 순군부에 영, 낭중이 있었고, 16년에는 병금관(兵禁官)에 낭중사(史)가 있었다.
광종 11년에 순군부를 고쳐 군부라 하였는데, 그 직장(職掌)은 미상(未詳)이나, "아마 모두 장병(掌兵)하는 관서였던 것 같다. "후에 모두 폐지하였다.
성종 14(995)년에 병관을 고쳐 상서병부라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고조도 고쳐, "상서고부라 하였다. 현종 2년에 고부를 파하였다. 문종(1047~1082) 때 정하였다.
병부판사(判兵部事)는 1人인데, 재신(宰臣)이 겸하도록 하였고, 상서(尙書)도 1人인데, 품질(品秩)은 정3품, 지부사(知部事)도 1人인데, 다른 직위의 관원이 겸하도록 하였으며, 시랑은 2인으로 정4품, 낭중도 2인으로 정5품, 원외랑도 2人으로 정6품이다.
충렬왕 원년(1275)에 군부사라 고치고, 因하여 상서(尙書)를 고쳐, "판서(判書)라 하였다.
2세 진준(陳俊)[판병부사(判兵部事) 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품계의 근거!
참고문헌: 고려사 백관지 742페이지 原文 11-1. 國初官階不分文武曰大舒發韓曰舒發韓曰夷粲曰蘇判曰波珍粲曰韓粲曰어粲曰一吉粲曰級粲新羅之制也曰大宰相曰重副曰台司訓曰輔佐相曰注書令曰光祿丞曰奉朝判曰奉進位曰佐眞使泰封之制也太朝以泰封主任情改制民不習知悉從新羅唯名義易知者從泰封之制尋用大匡正匡大丞大相之號成宗十四年始分文武官階賜자衫以上正階改文官大匡爲開府儀同三司正匡爲特進大丞爲興祿大夫大相爲金紫興祿大夫銀靑光祿大夫爲銀靑興祿大夫文宗改官制文散階凡二十九從一品曰開府儀同三司正二品曰特進從二品曰金紫光祿大夫正三品曰銀靑光祿大夫從三品曰光祿大夫正四品曰正議大夫下曰通議大夫從四品上曰大中大夫下曰中大夫正五品上曰中散大夫下曰朝議大夫從五品上曰朝請大夫下曰朝散大夫正六品上曰朝議郞下曰承議郞 略. 其餘擬上國者悉改之
본문내용]11-1. 국초에는 관계(官階)가, 문무(文武)로 나뉘지 않았다. 대서발한, 서발한, 이찬, 소판, 파진찬, 한찬, 알찬, 알길찬, 급찬은 신라의 제도요, 대재상, 중부, 태사훈, 보좌상, 주서령, 광록승, 봉조판, 봉진위, 좌진사는 태봉의 제도였는데, 태조는 태봉의 임금이 제 뜻대로 제도를 고쳐, "백성들이 잘 익혀 알지 못하므로, 모두 신라의 것을 따르고, 오직 명칭과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것만 태봉의 제도를 좇았다. 얼마 있다가 대광, 정광. 대승, 대상의 칭호를 사용 하였다. 성종14(995)년에 처음으로 문,무의 관계를 나누어, 자삼 이상에게는 정계(正階)를 사여하고, 문관은 고쳐 대광을, 개부의동삼사로, 정광은 특진, 대승은 흥록대부, 대상은 금자흥록대부, 은청광록대부는 은청흥록대부라 하였다.
문종 때 관제를 고쳤는데, "문산계는 무릇 29등급이었다.
종1품은 개부의동삼사요, 정2품은 특진, 종2품은 금자광록대부, 정3품은 은청광록대부, 종3품은 광록대부, 정4품上은 정의대부, 下는 통의대부, 종4품上은 대중대부 下는 중대부, 정5품上은 중산대부, 下는 조의대부, 종5품上은 조청대부, 下는 조산대부, 정6품上은 조의랑, 下는 숭의랑, 종6품上은 봉의랑, 下는 조산랑,- (중략 ) - 그 나머지도 상국(上國) (원나라)에 비길 만한 것은 모두 개정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대하여> 고려사 백관지 84페이지에 근거.
1-2-4. 평리(評理) [참지정사(叅知政事) 참리(叅理)]
原文 1-2-4. 評理穆宗時有叅知政事文宗定一人秩從二品忠烈王元年改僉議叅理三十四年忠宣改評理增爲三人忠肅王十七年復改叅理恭愍王五年復改叅知政事十一年改僉議評理十八年改叅知門下府事二十一年改門下評理
[원문내용] 1-2-4. 평리. 목종 때에 참지정사(叅知政事)가 있었다. 문종이 1인으로 정하고 품질은 종2품으로 하였다. 충렬왕 원년에 첨의참리로 고쳤다. 34년에 충선이 평리로 고치고 늘려서 3인으로 하였다. 충숙왕17년에 다시 참리로 고쳤다. 공민왕 5년에 다시 참지정사로 고쳤고 11년에 다시 첨의평리로 개정하였으며, 18년에 참지문하부사로 고치고, 21년에 문하평리로 고쳤다.
주해(註解)] 1-2-4---------- -1) 목종시 유참지정사(穆宗時 有叅知政事):목종 때에 참지정사가 있었다. 이 곳 백관지에는 참지정사가 목종 때, 비로소 설치된 듯 기술하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성종 조에, 그에 임명된 사례가 찾아지는 것이다. 참지정사도 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 등과 마찬가지로, 성종 원년(982)의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설치와 동시에 제도가 마련되고,그로부터 얼마 안 된 때에, 실재로 임명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2) 문종정 1인 질종2품(文宗定 一人 秩從二品): 이처럼 제도가 정비되는 것은,<갱정양반전시과 우개관제정백관반차급록과 (更定兩班田柴科 又改官制定百官班次及祿科>[고려사절요 5권, 문종 30년 말미(末尾)]- 문종 30년(1076)일 것으로 짐작 되는데, 다만 여기에서 정원이 1인이었다는 기술은 역시 잘못인 것 같다. 사례를 보면 동시에 2인~3인이 임명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아마 정원을 3인으로 정해놓고, 그 범위 내에서 제수(除授)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떻든 이렇게 운영되던 참지정사는. 종2품 재신(宰臣) 가운데 일원으로서, 다른 재신들과 함께 국왕과 더불어 국정을 논의하는,의정기능(議政機能)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나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 이하의, 6부판사(六部判事)를 겸직하는가 하면, 또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의 6부상서(六部尙書)를, 중복 직으로 지니는 경우도 많아, 정치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에서의 참지정사는 하나의 관직이 아니라, 타관(他官)에게 가(加)하여 단순히 재상직(宰相職)에 들게 하는 데, 쓰이던 용어였다. 그리하여 논자(論者)가운데는, 고려에서의 참지정사 역시, 그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던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이해이다. 고려에서의 참지정사는 당(唐)과 달리, 정원과 품질을 갖춘 엄연한 하나의 관직이었던 것이다.
필자의견> 위에서 논거(論據)한데로, 2세조 진준(陳俊)선조는, 참지정사 겸 판상서병부사(叅知政事兼 判尙書兵部事), 즉, "재상(宰相)이며, 국왕과 더불어 국정(國政)을 논의(論議)하고, 군권(軍權)을 가지며, 정치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여기에>계,사(階,司)를 더하면>개부의동삼사(?수태보)중서문하성 참지정사겸판상서병부사 (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門下叅知政事兼判尙書兵部事)다.
고려사 19권 17쪽> 진준 위 동북면 병마사행영겸 중군병마사 (陳俊爲東北面 兵馬使 行營兼 中軍兵馬使) 2세조 진준- 행영 겸 중군병마사에 대해! 고려사 백관지 666페이지> -아래-
원문 8-3. 行營兵馬使文宗元年七月制曰舊制邊陲有處置則命兩府宰臣往專軍事號大番兵馬名義 행영병마사문종원년7월 제왈구제변수유처치칙명양부재신왕전군사호대번병마명의
未稱改爲行營兵馬使 미칭개위행영병마사
원문내용> 8-3 행영병마사. 문종원년 7월에 제(制)하여 이르기를, "옛 제도에 변방에 처리할 일이 있으면 양부의 재신(宰臣)들에게 명(命)하여,가서 군사관계를 전제토록 하고, 그를 대번 병마라고 불렀는데, 그 명칭이 뜻에 맞지 않는다. 고쳐서 행영병마사로 하라 하였다.
주해註解] 8-3----------1)行營兵馬使 文宗 元年 七月 制曰 改爲 行營兵馬: 국경지대인, 양계에 외침 등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중대한 조처를 취해야 할 일이 발생 하였을 때, 특별히 양부(兩府)의 재상(宰相), "즉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과 중추원=추밀원(樞密院), 때로는 상서성(尙書省) 의 재상(宰相)을 파견하여 전제(專制)토록 하였는데, 그 때 이들이 띠는 직위(職位)가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였다.
위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진준(陳俊)선조의 (1품계)- 개부의동삼사공(開府儀同三司公)은 이미 이때에, 재상(宰相) 반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연구자는 정확한 품계를 검토하기위해, '고려사 백관지 67페이지' "기록을 인용한다.
2세조 진준(陳俊)- 개부의동삼사, 중서문하성 판병부사 (開府儀同三司 中書門下省 判兵部事) 1-2. 문하부(門下府)[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첨의부(僉議府)] 원문(原文) 1-2. 門下府掌百揆庶務其郞舍掌諫諍封?國初稱內議省成宗元年改內史門下省文宗十五年改中書門下省忠烈王元年倂尙書省爲僉議府
1-2.본문내용] 문하부, 관부(또는,관원)의 여러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그 낭사는 간쟁과 봉박을 관장하였다. 국초에는 내의성이라 불렀는데, 성종 원년에 내사문하성이라 고치고, 문종 15(1061)년에 중서문하성이라 고쳤다. 충렬왕 원년(1275)에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라 하였다.
[주해(註解)]1-2. 문하부장백규서무(門下府掌百揆庶務): 이 부분은, 처음에 중서문하성의 상층조직인 재부(宰府)의 업무를 규정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고려 때도 재부(宰府)의 재신(宰臣)=재상(宰相)들이 국무를 분담하여 집행하던, 상서6부(尙書六部)의 판사(判事)를 겸직하여 국정을 관장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장 백규서무(掌 百揆庶務)는 바로 이를 설명한 문구로 해석 하였다.
2세조:陳 俊.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판병부사(判兵部事)다
당시> 인종, 명종조의 품계문헌>선화봉사 고려도경 제8권(宣和奉使 高麗圖經 卷 第八)
인물(人物)>臣樸南之夷高麗人材冣盛仕於國者唯貴臣以族望相高餘則或由進士選或納貲爲之與夫母祿吏職莫不有等故有職有階有勳有賜有檢校有功臣有諸衛仰稽本朝官制而以開元禮叅之然而名實不稱淸濁混餚徒爲處文耳今使者入境皆擇臣屬通敏者何以將迎之禮以州牧則有若刑部侍郞知全州吳俊和禮部侍郞知靑州洪若伊(戶部侍郞知廣州陳淑1)以迎勞餞送則有若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朴昇中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金若溫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2)崔洪宰(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林文友2)同知樞密院事拓俊京李資德九此皆王之近臣也除王府四會之外與之燕飮酬酢
註1].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에서 자기를 접반한 고려 중신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시조 진총후(陳寵厚) 여양군공 의 초휘(初諱)로 보는, 진숙(陳淑)이 송별연을 베풀 때 참석한 중신들! 고려 제17대 인종(仁宗) 원년(元年)인, 서기1123년 송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이 고려수도 개경(開京)에 와서 1개월간 머무르며, 여러가지 풍물을 기록하고, 또 전국을 순회할 때 접반한 고려왕조 접대책임자들을 열거하고 있다.
[본문내용]을 보면, 경기도 광주(廣州)에 온 서긍일행을 1] 진숙(陳淑) 호부시랑 광주지사가 접대 할 때, 송별연에 참석한 고려 중신들을 열거한 내용 이다 . 그리고 2] 하나같이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중서문하(開府儀同三司 守太保 門下侍郞 中書門下平章事 2)의 품계를 쓰고 있다. *문종 14년(1060)부터 시작하여, 이시기에 쓰던 품계는 제25대 충렬왕조(1275)이전까지 이어진다.
註 1]문하시랑:내사시랑 문하부 소속의 정2품 벼슬 / 시랑(侍郞):고려 때 각부의 정4품 관리. 전자(前者)는 내사시랑 평장사로 정2품이며,/ 후자(後者)는 各部-육부(六部)의 정4품 관리 이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후손들은 종 2품계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叅知政事)를, 계사직(階司職)으로 족보에 기록하여, 선조의 품계를 낮게 기록하며 폄하하고 있다.
물론 고려사에 참지정사로 계실 때, 졸하다, "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겸손하게 2품계를적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고려사 기록에 엄연히 1품계의 판병부사가 있고, '고려사 백관지에서 보듯이' 진준 2세조는 당시 <재상>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려/조선조의 품계에 관하여> 계고직비(階高職卑)가 통상적이며, 계비직고(階卑職高)는 극소수이다. 조선조 품계를 고찰한바, "종6품 지방의 현감에게, '정3품의 당하관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있다. 이 또한 3품을 더하는 계고직비이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참지정사(叅知政事)겸(兼)판병부사(判兵部事) 여양진공(驪陽陳公) 휘(諱) 준(俊) 사적(事蹟)
공(公)의 휘는 준(俊)이요, 여양진씨 시조:여양군(驪陽君) 공의 아드님이시다. 여양군은 휘 총후(寵厚)이며, 고려 예종 조에 대장군으로 서북간방(西北間方)인, 술북계(戌北界)를 경계하고 있을 때인 인종4(1126)년 적신 이자겸이 일으킨난을 토평하여, 국난을 극복한 큰 공훈을 새워 상장군이 되고 여양군에 봉군되셨다. 공의 생년은 미상(未詳)이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참지정사(叅知政事) 겸 판병부사(判兵部事)로 계시던 명종(明宗)9. 己亥(1179)年 6월 4일 왕이 봉은사에 간, '신묘(辛卯) 일에 서세(逝世) 하셨다. 고려사와, 고려사 백관지, 고려왕조실록을 고찰하면, 개부의 동삼사(開府儀同三司) 참지정사 겸 판병부사로 재임 중 서세하시니, 공의 성품은 순박하고 정직하여 그때에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는데, 왕 또한 큰 그릇으로 중(重)히 여겼다. 공은 용력(勇力)이 있어 의종(毅宗) 朝에 행오(行伍)에서 공(功)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당시 서북간방(西北間方)인 술북계(戌北界)를 지키고 있을 때, 장군은 정각복두(正角幞頭)를 쓰지 못 하도록 한 군율(軍律)을 어기고, 공은 혼자 정각 복두를 하고 다녔다. 이에 지병마사(知兵馬事) 양승용(梁升庸)이 금(禁)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양승용이 탄핵(彈劾)하여 파직(罷職) 되었으나, 공은 인품(人品)과 용력이 담대하고, 군(軍) 통솔력(統率力)이 뛰어나, '왕은 즉시 대장군으로 승진' "다시 중용(重用)하였다.
의종(毅宗) 말, 경인(1170)년 9월에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 호(晧)를 왕으로 새웠는데, 초명은 흔(昕), 字는 지단(之旦)이며, 고려 제19대 명종(明宗)이다. 정중부의 난은 결국 문신귀족들을 대거 참살하고, 급기야 왕을 교체하여 무신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무신 정중부가 문신가의 집을 모조리 철거 하려할 때, 공이 이를 말렸다. 우리가 미워하는 자는 이복기, 한뢰 등, 불과 4~5인인데 이제까지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만도 너무하였다. 그런데 집까지 허물어 버린다면 그 처자들은 그 어디에 의지하고 살 것인가? "하며 이를 극구 말렸다. 그러나 이의방은 이를 듣지 않고 부하 병졸들을 시켜 헐어버리니, 그 후로 상습적인 습관이 되었다.
명종2년인 임진(壬辰)년 정월 5일 경진(庚辰)일에 공은 동북면 병마사행영겸 중군병마사에 임명되고, 동(同) 4년 갑오(甲午) 11월 27일 경진일에는 추밀원사(樞密院事)인 공(公)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명하여, 서경유수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다시공격 하였다. 동년(同年) 11월 29일, 임오(壬午) 일에 참지정사 겸 판병부사에 승진 되시고, 을미(乙未) 정월 6일 기축(己丑)일에 병부상서를 겸임하시다. 동년. 7월에 윤인첨 이, 조위총의 반란을 토평하기위해 서경을 공격하여 공을 새우니, 왕이 참지정사 진준(陳俊)을 금교역에 보내 모든 장수들을 맞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의종, 명종, 양조(兩朝)의 경인~계사(1170~1173)년 간에 공이 부호하여 살아남은 문신들이 심히 많았다. 이때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의 음덕이 많으니 후손들이 반드시 창성 하리라 하였다.
그 후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드러냈으니! 장자(長子) 3세 휘 광순(光恂)은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차남 3세 휘 광수(光脩) 병부상서공은 문과에 급제! 낭중(郎中 정5품 문관직)으로 내직(內職)에 계실 때, 안서 대도호부사(정3품)로 임명되었다. 안서(安西)는, 현 황해도 해주로, 당시 토호(土豪)들이 발호(跋扈)하여 민란(民亂)이 일어났는데, 공은 덕으로 동요된 민심을 달래고 난을 평정한 기록이 동문선(東文選) 서하집(西河集)계장제문에 실려 전하며, 후에 병부상서(병조판서)가 되었다.
3子-3세 휘 광경(光卿)은 대장군에서 상장군으로 승진하였는데, "장군사적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4子-3세 휘 광의(光儀)는 대장군을 지내고, 5子-휘 광현(光賢)추밀부사공(樞密副使公)도 문신이며,
光恂 后-종손 4세 휘 담(湛)은 고려 제22대 강종조(1212~1213)년-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아들- 5세 진창덕(陳昌德)은 고종 7년(1220) 5월 국자감시(시부시詩賦試)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를 하였다
차자(光脩) 后-장손 4세 휘- 식(湜) 어사공은 명종20 경술(1190)년 5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복야(僕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지냈다. 승선(承宣) 김양경(金良鏡 )이 안렴사(按廉使) 진식(陳湜 )에게 화답한 시에 차운하다 3수(首)와, 이규보와 교유한 사적이 세상에 전해진다.
차손, 4세 휘- 온(溫) 예빈경공은 신종조(1197~1204)에 문과에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빈성 경(禮賓省卿)으로 내직에 계시다가, 외직(外職)인 지공주사(知公州事)에서, '다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는데, 문장(文章)으로 세상을 울렸다고,"고려사와, 청구집 등에 기록되고, 동문선(東文選)과 이규보 문집에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사(四時詞) 8首가 실려있다 . 예빈경공의 아우, 4세-휘 화(澕) 매호공은 신종3년 경신(1200)년 국자감시(詩賦試)에서 장원을 하였는데, 고려사에 실려있다. 기사(1209)년 국자감 학정, 서장관(書狀官),한림학사(翰林學士)로, 옥당(玉堂)에 들었고,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를 거처, 지공주사(知公州事) 재임중 서세하셨다. 공은 사어(詞語)가 청려(淸麗)하고 이규보와 함께 쌍운주필로 유명하여, 당시사람들이 진한림(陳翰林), 이정언(李正言)이라 하였다.
4子 휘 광의(光儀) 대장군공의 손자- 5세 진교:고려사 기록- 비서감 이순중취시부진교(秘書監李淳中取詩賦陳璬)- 강종 2년(1213) 4월 국자감시(詩賦試)에서 진교가 장원을 하였다.
사적 재검토/집필자:해송(海松) 陳玉洙 謹識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작성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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