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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연구 자료실 二十四.여양진씨 3世진광수陳光脩 상서공 사적
해송(海松) 陳玉洙 추천 9 조회 4,801 14.03.02 04:25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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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1.08.19 13:40

    첫댓글 안녕하세요!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버린 때에 평안하신지요!

    위 내용을 읽다보니

    三世驪陽陳公諱光脩初諱光賢淸州洪城驪陽人
    3세조 광수의 초명을 '광현'으로 사적을 제구성하셨습니다.

    처음 듣는 내용이라 궁금하여 이렇게 문의 드립니다.
    근거가되는 자료가 있는지요?

  • 작성자 21.08.24 06:24

    댓글확인이 늦었네요. 그간 안녕하신지요?
    3세조 휘 광수선조님의 사적은 본문 최상단에 띄워놓은 동문선~
    임춘선생이 우리 선조님에게 올린 계장제문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동문선기록은 우리나라 학계가 인정하는 최고권위의 공신력있는 자료입니다.
    참고하시기바랍니다.
    註 3)[ 林椿 ]

    요약
    강좌칠현(江左七賢) 즉 자연에 파묻혀 살아가는 일곱 명의 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던 고려시대 문인.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다. 주요 저서로 《국순전》, 《공방전》 등이 있다.

  • 작성자 21.08.24 07:00

    3세조 휘 광수 초휘 광현으로 정리한것은 일부 자료에 4세 식-(어사공파조),온-(예빈경파조),화-(매호공파조) 3형제가 광현의 자(아들)로
    되어 전해지고있는데, 우리 여양진 족보 계대와 다르므로 후손들은 혼란스러워 하지요. 이문제로 고민하던중 (전)연세대교수 양권승 박사가 휘 광수 초휘 광현으로 정리하면 족보기록과 인터넷상의 기록에서 발생하는 혼선을 동시에 정리할 수 있다는 논리에 저도 동의를 했던것입니다.

    고려사 정중부의 난을 고찰해보면 무신들에의해 문신들이 대거 참살당할때에 내시 진현광(검을현,빛광)이 나옵니다. 이분들의 후손이 무신정권에서 살아 남기위해 이름자 현광을 뒤집어서 광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진현광은 우리 여양진씨가 아니기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씨족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수 있어 그렇게 정리해보았습니다.

  • 21.08.24 23:17

    우리 여양진씨가 처음 족보를 편찬한 것이 전기축보(1709)로 시작하여 후기축보(1769)가 전하고 있으며 그 사이 신미보(1751)와 화산보(1759)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자보(1840) 정축보(1877) 등에서는 3세조 5형제에 대해 제1자(광의), 제2자(광수), 제3자(광순), 제4자(광경), 제5자(광현- 식,화,온)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을축보(1805), 기유보(1849), 갑인보(1914), 정미보(1967), 임신보(1992)등에서는 제1자(광순-담), 제2자(광수-식,온,화), 제3자(광경), 제4자(광의-택), 제5자(광현) 으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1805년 을축보를 편찬하면서 정시술(1608-1684)의 [만성보,1670]를 참고하였다고 하나 1808년 횡성 종인 진경우 등이 예조에 상소를 올려 을축보(1805)가 잘못 되었음을 확인하고 파보하고 불살라 버리라고 한 것은 3세조의 서차가 잘못되었음을 국가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우리 여양진씨 보사의 숙제로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한편, 4세조 서차에 관련되어서도 앞선 족보에서는 (식,화,온)인데

  • 21.08.24 23:34

    을축보(1805)부터는 (식,온,화)로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분명 쉽지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오랜 세월 수 많은 사적들을 살피면서 카페에 귀한 자료들을 올려 놓으신 노고에 대해 감사드리며 찬사를 보냅니다.
    이로인해 우리 여양진씨 역사가 풍부해 질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앞으로 노정된 새 신보 작업에는 이러한 사항들 모두를 망라해서 다뤄져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판단의 결과는 사료를 근거로 이뤄져야 할 것 입니다.

  • 작성자 21.08.25 01:29

    과찬이십니다. 씨족사에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일가를 만나게되어 오늘은 무척 기분좋은 날입니다.
    우리 여양진씨의 최초족보인, (전)기축보(1709년)발간당시 각가정(문중:세거지)에서 소장하고있던 가승이나
    일부 보학자들이 편찬한 만성보,씨족원류등에서 자료를 선별하여 여양진씨 손록을 역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여 여타성씨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정확한 계대는 불가능했던것입니다..
    수차 보를 재록하면서 선조님들께서 정성을 다 하섰을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선대가 정리한 족보기록을 무한 신뢰하며 정사를 외면한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는 정사에 근거하여 씨족사를 수정보완하는것은 후손의 책무인것입니다.
    씨족사는 역사와 같이가야 후손들이 족보기록을 신뢰합니다.
    선조님들이 활동하시던 시기(연도)를 토대로 형제의 서차를 재정비하여 계대를 소연히 밝히고,
    새롭게 학인된 벼슬(품계)과 사적(행장)을 빠짐없이수록하는 위선사업에 후손들은 뜻을 모아야 할것입니다...

  • 작성자 21.09.17 12:03

    오타수정>댓글 끝줄- 학인>확인으로 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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