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진씨 3세조 진광수(陳光脩) 병부상서공 사적재구>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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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진씨 3세조 진광수 병부상서공 사적재구. 해송(海松) 陳玉洙
3세조- 諱 광수(光脩)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의 사적을 재구하며! 종사에 관심을 갖고 여양진씨 사적연구와 종사에 참여한지도 어언 10년이 넘은것 같다.
더불어 그 많은 날들을, '사서와 족보기록 사이를 오가며' "기~인 밤을 지새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줄의 글이 두렵기만 하고, 불민한 후손이 일천한 학식으로 훌륭하신 선현의 생애를 논하는 자체가 부끄럽지만, 다만 본 필자는 훌륭하신 선현의 사적을 알리고자 할 뿐이며, 앞으로 당대의 훌륭한 학자를 모시고, 비문을 "첨삭" 명문장으로 만들어 후손 만대에 전해주어도 부끄럽지 않는 사적을 찬하여 주길 바랄뿐이다. 대종회를 비롯 몇몇 집행부의 책임자들간에 "종무에 대하여 상당한 이견이 노정되어 있는것으로 안다. 현시점에서~ 종회 집행부의 책임자들은 자기 주장을 앞세우기전에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바꿔 생각하며 '너와 네가 아닌 우리로' "이제는 하나가 돼어야 할 때다.
선조님께서 내직인 낭중(郎中)으로 조정의 중책을 맡고 계실때 황해도 해주에서 토호들이 발호하여 민란이 일어났다. 선조님께서 안서安西(황해도,해주) 대도호부사로 부임하시어 민란을 덕으로 평정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거듭 승진하시어 병부(군부)를 담당했던 각료로써 수행한 선현의 훌륭하신 선업과 치적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사업에 후손은 뜻을 모아 주기바란다.
特進兵部尙書驪陽陳公諱光脩事蹟再構 특진 병부상서 여양진공 휘 광수 사적재구
三世驪陽陳公諱光脩初諱光賢淸州洪城驪陽人高麗 第十九代明宗朝文科及第內職郎中拜安西大都護府使拜兵部尙書其祖諱寵厚驪陽君驪陽陳氏始祖也按驪陽陳氏先系虞舜帝姓姚名中華紀元前二二三一年三十四世孫胡公滿公之五十三世孫湣公越亡陳於楚惠王其裔奔齊以國號爲姓是爲陳氏之肇源東方陳自中國東來于時期未詳考諱俊開府儀同三司中書門下省叅知政事判兵部事伯兄曰諱光恂文科壯元及第弟曰諱光卿上將軍弟曰諱光儀大將軍公先烈繼承配位姓生卒年未詳生三子一男曰諱湜銀靑光祿大夫翰林學士僕射按廉使按察使御史大夫長孫曰諱鑑翰林學士次孫曰諱鑌二男曰諱溫銀靑光祿大夫翰林學士禮賓省卿知公州事遷羅州牧使事載東文選東國李相國集春夏秋冬四時詞八首高麗時代名詩傳世于長孫曰諱就楊州牧使羅州陳氏貫祖次孫曰諱信同正江陵陳氏貫祖三男曰諱澕銀靑光祿大夫翰林學士右司諫知公州事孫曰諱令獻翰林學士也諱光脩兵部尙書公事蹟載東文選西河集卷六啓狀祭文第二十二上安西大判陳郞中光脩啓文林椿先生曰黃鵠凌墟雖有九霄之逸翮白駒在谷恨無一束之生蒭敢將長喙以哀鳴庶或動心而垂察伏念某命賦多難性鐘至愚慕顔回賢人之樂雖甘飮水曲肱非元龍國士之心徒欲求田問舍昔吾先祖遇聖初基轉籌幄中眞子房之人傑圖形閣上忝唐帝之功臣乃貽鐵券之書永有土田之錫及傳後嗣見奪他人遂令忠義之魂久絶歲時之享以玆興嘆每欲訟寃然而孤拙之心固易危而自縮流離之跡方遠退以深藏尙口乃窮多言可畏故莫伸於鬱結而坐受於飢寒昨披悃愊之誠仰叩高明之鑑雖莫躬於造請實有意於知憐惟容乃公勿咈所欲希荊州半面之識貴踰萬戶封候得劉弘一紙之書賢於十部從事然乏金張之爲援尙稽虞芮之質成聞循吏善政之風其惟良二千石也使遊民不耕而食胡取禾三百囷兮不有仁人孰噓氷氏恭惟某官際天精誠命世賢才李太白獨擅歌詞人稱國手陳子昻復興騷雅世號文宗天子喜於同時廷臣莫能出右謀猷告后素勤伊尹之忠臺閣生風早振陳咸之節猒嚴助承明之直請張敞劇郡之行果簡在於上心而出鎭於西海遠宣王化大慰民心加以挫豪强而自服禮儒雅以旁延士願品題人皆樂慕矧此妄庸益深敬仰意在山水庶逢鍾子之知音皮有陽秋未接稽褒之雅氣伏望救人無棄決事如神遂令舊將之雲孫獲食世封之尺地一家飽暖儻蒙濡沫之恩萬死粉糜敢誓漆身之報事載南蔚山泰普所錄云兵部尙書也卽兵曹判書根據高麗史百官志一五三頁兵曹兵部軍簿司原文文宗定兵部判事一人宰臣兼之尙書一人正三品知部事一人他官兼之侍朗二人正四品朗中二人正五品忠烈王元年改軍簿司仍改尙書爲判書明宗神宗兩朝正二品階特進也行守法依據特進行安西大都護府使拜兵部尙書驪陽陳公諱光脩事蹟指稱也驪陽陳氏事蹟硏究執筆資料史書考察按南蔚山泰普所錄東文選高麗史高麗王朝實錄高麗史百官志依據事蹟再構傳尙賢慕義之心不敢窂辭萬分之一略記之銘可以傳萬世之厚德後來出君子闡詞焉
歲在 壬辰(2012)年 中元 始祖公 二十五世 海松 玉洙 謹 撰
[사적내용] 특진 병부상서 여양진공 휘 광수 사적.
여양진공 휘는광수인데 청주목(홍성) 여양인이다. 고려 제19대 명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인 낭중에서 황해도 해주(안서)지방의 대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이어 병부상서로 승진하셨는데 시조공의 차손이다. 여양진씨 사적을 고찰해보니 선계는 중국의 2大 성군(聖君)인 순임금이 비조이시며 휘는 중화(中華)이다. 기원전2231년 순임금의 34세손 호공만을 중흥조로~ 공의 53세손 민공월로 계대를 잇는다. 진나라가 초나라 혜왕(惠王)에게 망한 기원전 478년, 그 후손이 제(齊)나라로 가서 나라이름 진(陳)을 성(姓)으로 하였으니 이것이 진씨의 최초 근원이 되었다. 우리 동방(여양)진씨의 "선계" 동래시기는 미상(未詳)이며, 유구한 역사속에 묻혀 상고할 수 없다. 조(祖)휘 총후(寵厚)-여양군공(驪陽君公)이 여양진씨 시조인데 족보에 기록되기를 예종~인종 양조에 대장군,상장군으로 인종4년(1126), 이자겸의 난과, 인종 13 (1135)년 묘청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여양군에 봉군(封君)되어 여양을 관향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고휘(考諱)준(俊) 개부의동삼사 중서문하성 참지정사겸 판병부사공이며, 백형 휘 광순(光恂)은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는데 고려사에 사적이 실려 "전한다. 아우 휘 광경(光卿)상장군공의 장군 사적도 고려사에 실려있으며, 아우 휘 광의(光儀)대장군공사적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역사에 찬연히 빛나고있다. 배위(配位)의 성(姓)과 생졸년은 미상(未詳)이며, 3남을 낳았는데~
長子는 휘 식(湜)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 한림학사 안렴사(按廉使) 안찰사(按察使 1)로 이규보와 교유하였으며, 복야(僕射) 어사대부(御史大夫 2)벼슬을 지냈다. (어사공파조)다. 장손 휘 감(鑑)은 호부상서요, 차손은 휘 빈(鑌)이다. 次男 휘 온(溫)이다. 고려 신종조(1197~120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 한림학사,예빈성경,지공주사,나주목사를 지냈다. 춘하추동 사시사 8수(首)가 동문선과 이규보 문집에 실려 있는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명시로 선정이 되어 세상에 전해진다. (예빈경파조)다.
장손 휘 취(就)양주목사공은 나주진씨 관조(貫祖)이며, 차손 휘 신(信)동정공은 강릉진씨 관조로 분종(分宗) 되었다가 정미대동보(1967년)수보시 여양진씨로 합보하였다.
三男 휘 화(澕) 다. 호:매호공은 신종 3 경신(1200)년에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문과에 급제후 희종 5 기사(1209)년 국자감학정(學正)을지냈다. 은청광록대부 한림학사로 옥당(玉堂)에 들었고,지제고 정언 우사간을 거쳐 지공주사 재임시 졸하였는데, 이규보와 쌍운주필로~ 1,2위를 다투며 사장(詞章)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다. (매호공파조)다.
손자 휘 영헌(令獻)은 한림학사다.
참고문헌>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자료 임서하집(林西河集), 왕실도서관 장서각(藏書閣)자료,동문선(東文選) 서하집(西河集)에서 서하(西河)선생은,여양진씨 3세조 진광수(陳光脩) 안서(安西)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공의 선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상 안서대판 진(낭중) 광수 계(上 安西大判 陳(郎中) 光脩 啓)
황곡(黃鵠)이 허공에 나르매,구소(九宵)에 올라갈 만한 날개가 있지만, 흰 망아지 골짜기에 있는데"한 다발 생추(生蒭)없는 것이 한입니다. 감히 긴 부리로 슬피 우니 혹 마음이 감동 되시어 살펴 주실런지요? 모(西河先生)는 운명이 고생을 많게 타고 났으며, 성품은 지극히 어리석게 태어났습니다. 안회(顔回 3) 현인(賢人)의 낙을 흠모하여 물 마시고 팔베게를 베고 눕는것을 달게 여기는 사람이요, 진등(陳登 4)과 같이 국사(國士)가 될 마음은 없고, 한갓 밭과 집이나 구하고자 물으려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가 태조(왕건)께서 고려를 창업하던 때를 만나 숫대를 장막안에서 놀렸으니 정말 장량(長良 5)과 같은 인걸(人傑)이 셨으며 형상(形像)이 능연각(凌煙閣)에 그려졌사오니 당나라 공신에 참예되었습니다. 이에 철권(鐵券)을 내리고 영원히 토전(土田)을 주셨는데 후세 자손에게 내려오다가 남에게 빼앗기게 되어, 그만 충의(忠義)의 혼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해마다 모셔오던 제향(祭享)을 끊기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탄식하며 매번 원통함을 송사(訟事)하려 하나, 외롭고 졸연한 마음에 진실로 위태하기 쉽다하여 스스로 움츠렸고,떠돌아 다니는 종적이 바야흐로 멀리 물러나 깊이 숨으려합니다. 입을 숭상하면 마음이 궁해지는 법이요, 또한 말 많은것이 두려운 것이오니, 그 때문에 울울히 맺힌 마음을 펴지 못하고 앉아서 기한(飢寒)에 떠는 것입니다.이제 지극한 정성을 피력하여 고명하게 살펴주심을 바라오며, 비록 몸소 나아가 청하지는 못하오나 실은 가련한 것을알아주십사 하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용납해 주어야 공정한 것이니, 바라는 바를 어기게 말아 주소서!
한형주(韓荊州)와의 일면식(一面識)이 만호(萬戶)의 봉후(封侯)보다 더 귀한것을 바라고자 하며, 유홍(劉弘)의 한 장 편지를 얻는것이, 십부종사(十部從事)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장(金張) 후원이 모자라 오히려 우(虞) 예(芮)의 판결을 늦추었습니다. 법을 잘 따르는 관원의 착한 정치는 오직 어진 이천석(2000石)이요, 노는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않고 먹게 한다면 어찌 벼 삼백석(300石)의 노적가리가 있겠습니까? 어진 사람이 계시지 않는다면 누가 언 백성을 입김으로 불어주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건데 모(陳光脩:大都護府使公)관께서는 천인(天人)의 이치를 정통한 지식인이시고, 세상을 지도할 만한 현명한 재주와 덕을 갖추셨습니다. 이태백(李太白 6)이 홀로 가사(歌詞)를 잘 하니 국수(國手)라 일컬었고, 진자앙(陳子昻 7)이 다시 시풍(詩風)을 일으키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문종(文宗)이라 하였습니다. 천자(황제,임금)가 한 세상에 만난 것을 기뻐하고, 조정 신하가 공(진광수 선조)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계책을 가지고 임금에게 고(告)하니 이윤(伊尹)의 충성에 힘썼으며, 대각(大閣:대궐)에 바람이 일어나니 일찍 진함(陳咸)의 기절을 떨쳤습니다. 엄조(嚴助)의 승명전(承明殿) 숙직을 마다하고 장창(張廠)처럼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海州) 맡기를 청하였습니다. 과연 임금의 마음에 들어,서해(황해도 해주)의 대판(大判)으로 나오셨습니다.
멀리 왕의 교화를 퍼뜨려 크게 민심을 위로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土豪)들을 덕으로 꺽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고, 우아(優雅)한 선비들을 예우(禮遇)하여 사방에서 맞아 들였습니다. 선비들은 품평(品評)받기를 원하였고 사람들은 즐겨 공을 흠모 하였는데 하물며 망용(妄庸)한 이 사람은 더욱 우러러 존경합니다.뜻이 산수(山水)에 있다하던 종자기(鐘子期)의 지음(知音)을 만난 것과도 같고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다는 저부의 고상한 인품에 접하지 못하였습니다.바라건데 사람을 구하는 데는 한 사람도 버리지 마시고, 일을 결단하는 데는 귀신같이 하여 옛 장수(將帥)의 후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내려온 조그마한 땅을 짓도록 하시면 온 집안이 배부르고 등이 따스하겠습니다. 만약 유말(濡沫)의 은택을 입는다면 만(萬)번 죽어 가루가 되더라도,몸에 옻칠하여 은혜에 보답하기를 감히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선현의 사적으로~남울산(南蔚山)태보(泰普)소록에 진광수(陳光脩)병부상서라 기록되어 전한다. 병부상서는 1275년 충렬왕조에서 병조판서로 고쳐진다. 동문선, 고려사, 남태보소록, 고려왕조실록, 고려사 백관지와 여러 사서를 교열하여 품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양진씨 3세조 진광수(陳光脩)- 특진 낭중拜,안서 대도호부사拜,병부상서(特進郎中拜安西大都護府使拜兵部尙書)로 품계를 재구(再構)하며, 문과에 급제하여 낭중벼슬에 계셨고 해주지방의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선조님께서는 병부상서의 중책을 수행한 각료로써 문무를 겸비하였고, 당대의 학자가 후덕(厚德)한 선조님의인품을 극찬!
목민관과,각료로써 수행한 훌륭하신 선조님의 정치 이념을 본받고, 또한 흠모하는 마음으로 감히 몇줄의 글을 남긴다. 유구한 역사속에 묻혀버린 선조님의 사적을 모두 살피지 못하는것이 죄스러울 뿐,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중 만분의 일을 골라 선조님의 후덕한 삶의 여정을 만세에 전하고자 불비약술(不備略述)하며 '훗날 훌륭한 군자(君子)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선현(先賢)의 사적을 다시 정리하여 주길 바란다.
세재(歲在) 壬辰(2012)年 중원(中元)... 시조공 25世 해송(海松) 옥수(玉洙) 근찬(謹撰). 여양진씨 3世 진광경(陳光卿)▼ 고려사▼ 여양진씨 2세조 진준 편
71.고려사 진준편 72. 진준 73.내시소경 진현광 74.진준-문신가 진준지지왈 오배소질원자이복기,한뢰등 4~5인... 75.진준 좌군병마사 동지추밀원사 76. 진준 병부상서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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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안찰사는 안렴사로도 불린다. 고려의 지방장관으로 절도사, 지금의 도지사와 같다.
註 2)어사대부(御史大夫)는 고려 때 정3품으로 어사대(御史臺)의 장관, 조선 때 대사헌에 해당.
註 3)안회(顔回)-중국 춘추 시대의 유학자(BC 521~BC 490). 자는 자연(子淵)이다. 공자의 수제자로 학덕이 뛰어났다
註 4)진등(陳登)-자(字)는 원룡(元龍). 진규의 아들. 하비 출신.도겸의 부하로 있다가 유비가 도겸으로부터 서주를 물려받자 유비의 부하장수가 된다. 여포가 하비로 들어서자 감시역으로 여포의 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진실로 여포를 섬길 마음이 있어서 그런것은 아니며, 여포의 야욕이 황실을 넘볼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포가 패배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비의 부하가 되었는데, 유비가 조조에게 대패하고 달아나서 원소에게 망명하자, 어쩔수없이 항복하여 조조를 섬겼다. 그를 알던 조조는 그를 광릉태수에 임명했다.
註 5)장량(張良)- 노인을 공경하여 도(道)를 얻은 장량-장량(張良)의 자는 자방(子房)이고,한(漢)나라 개국공신으로 유후(留侯)로 봉하고, 대사도(大司徒)라는 관직을 받았다.
註 6)이태백(李太白) 중국 당나라의 시인(701~762). 이름은 백(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杜甫)를 시성(詩聖)이라 칭하는 데 대하여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진다. 정치적 포부가 컸으며 현종(玄宗)의 궁정 시인이 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일생을 방랑 속에서 불우하게 보냈다. 성격이 호탕하여 세속의 생활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시를 읊었다. 후세에 편찬된 《이태백 전집(李太白全集)》 30권이 전한다. 이태백은 술에 도취되어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註 7)진자앙(陳子昻)-자(字)는 백옥(伯玉). 재주(梓州) 서훙[射洪: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 사람이다. 국사에 관한 상소문을 올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칭찬을 받고 인대정자(麟臺正字)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관직에 있을 때 과감히 간언했으며, 거란족 정벌에 나선 군대를 따라가기도 했다. 뒤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모함을 받아 옥에서 죽었다. 그의 시는 6조시대의 나약하고 화려한 시풍을 일소하고 한(漢)·위(魏) 시대의 힘찬 풍격을 드높였다. <감우시 感遇詩> 38首는 조정의 폐단을 비판하고 변방의 군인과 백성들의 고통을 반영했으며, 재능은 있으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비애감을 나타냈다. 내용이 드넓고 풍격이 호탕하여 당시(唐詩) 혁신의 선구적인 작품이 되었다. <등유주대가 登幽州臺歌>는 고금(古今)을 살펴보고 깊은 울분을 표현했으며, 비분강개하는 정조가 드러나 역대로 전송되고 있다. 그의 산문 또한 육조시대 변려체(騈儷體)의 기풍을 개혁했는데, 질박하고 고아한 언어구사는 후대의 고문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진백옥집 陳伯玉集〉이 있다.
啓狀祭文-황곡(黃鵠) -管仲- 노란 따옥새여, 노란 따옥새여, 왜 날개를 도사리고 가만히 있나? 발이 빗글어 매여있기 때문이라. 날지도 울지도 못함이여. 채롱 속에 엎드렸도다. 하늘이 높은데, 왜 쭈그리고 있으며, 땅이 두꺼운데, 왜 쭈그리고 앉아있나? 불행한 액년을 만나 목을 뽑고 길이 부름이여. 드디어 울음으로 변하는도다. 노란 따옥새여! 노란 따옥새여! 하늘이 너에게 날개를 주셨기 때문에 능히 날며, 하늘이 너에게 발을 주셨기 때문에 달리는도다. 액난에 사로잡혀 있음이여, 누가 구해줄꼬, 하루 아침에 울을 부수고 나감이여! 내 어떻게 산으로 가야 할지, 슬프다! 저 새 잡는 사냥꾼이 곁에서 가며오며 하는도다! * 중국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관중이 처음으로 시도한 (행)군가로, 자신이 위기에서 포숙아의 계책으로 함거 속에 갇쳐 탈출할 때, 노나라의 추격이 있었는데, 이 황곡의 노래를 지어서 병사들에게 부르게 하니 병사들은 피로를 잊고 2배나 빠른 속도로 달려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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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通文)
-여양진씨 3세조 진광수(陳光脩)병부상서공 사적-
서하(西河) 임춘(林椿)선생이 진광수 안서 대도호부사공 에게 올린 계장제문(啓狀祭文 1)
800 여 년전 고려시대, 한반도 서북간방 해주지방에 대도호부사로 부임하신 우리 선조님에 대한 글을 읽고~
위대한 목민관으로 확고한 생활철학과, 정치이념, 도덕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명문장의 글이었다. 임춘선생이 남긴 핵심과 요체를 찌르는 상소문! 시대와 선조의 인품을 절묘하게 묘사한 간결한 문체를 통하여, 그의 진심을 전하고자한 것이, '서하(西河 3)선생의 뜻이었다면, 시공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선조의 충(忠),경(敬),인(仁)의 사상(思想)인 인간애! 힘보다 덕이 우선하는 정치이념과 도덕성에 우리는 갈채를 보낸다.
"글" 행간(行間)에 흐르는 우리 선조에 대한 믿음, 찬사, 간절한 소망, 기승전결의 명문장이 실재 현장에서 보고 듣는듯하며, 동문선 계장제문에 기록되어있는 한시대를 풍미한 훌륭한 목민관이, 우리의 직계 선조님이었다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다만 선조님은 어려운 그 시대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헤쳐나간 데 비해, 불민한 후손은 선조의 훌륭하신 발자취를 더듬고, 전(傳)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대신 할 뿐이다.
후손들은 이제 하나된 마음으로 중지(衆智)를 모아, 홍성 경덕단 경내에 사적비(事蹟碑) 건립을 추진할 때다. 선조의 위업(偉業)을 세상에 드러내... 찬양(讚揚)하고 현창(顯彰)하여, 후손의 사표(師表)로 삼는 사업에 동참하여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며, 사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결성을 발의(發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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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자료> 임서하집(林西河集) 6권(卷六) 계장제문 22 2) 왕실도서관 장서각자료> 서하집(西河集) =
註 3)[ 林椿 ] - 강좌칠현(江左七賢) 즉 자연에 파묻혀 살아가는 일곱 명의 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던 고려시대 문인.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다. 주요 저서로 《국순전》, 《공방전》 등이 있다.
출생-사망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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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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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고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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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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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저서 | 《국순전》 《공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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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지(耆之). 서하(西河) 출생. 과거에 수차 낙방하였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 때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이인로가 그 유고(遺稿)를 모아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문(詩文)이 기록되어 있고, 두 편의 가전체소설玉川精舍)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국순전(麴醉傳)》 《공방전(孔方傳)》 등이 있다.
壬辰(2012)年 8월 일
발의자(發議者) > 25世 해송(海松) 진옥수
수신: 직계후손-(어사공파, 예빈경파, 매호공파 후손) 외(外) 여양진씨 첨종제위(僉宗諸位)
[출처:다음] 진씨사랑방 지기 ㅣ 작성자 해송(海松) 진옥수(陳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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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버린 때에 평안하신지요!
위 내용을 읽다보니
三世驪陽陳公諱光脩初諱光賢淸州洪城驪陽人
3세조 광수의 초명을 '광현'으로 사적을 제구성하셨습니다.
처음 듣는 내용이라 궁금하여 이렇게 문의 드립니다.
근거가되는 자료가 있는지요?
댓글확인이 늦었네요. 그간 안녕하신지요?
3세조 휘 광수선조님의 사적은 본문 최상단에 띄워놓은 동문선~
임춘선생이 우리 선조님에게 올린 계장제문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동문선기록은 우리나라 학계가 인정하는 최고권위의 공신력있는 자료입니다.
참고하시기바랍니다.
註 3)[ 林椿 ]
요약
강좌칠현(江左七賢) 즉 자연에 파묻혀 살아가는 일곱 명의 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던 고려시대 문인.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다. 주요 저서로 《국순전》, 《공방전》 등이 있다.
3세조 휘 광수 초휘 광현으로 정리한것은 일부 자료에 4세 식-(어사공파조),온-(예빈경파조),화-(매호공파조) 3형제가 광현의 자(아들)로
되어 전해지고있는데, 우리 여양진 족보 계대와 다르므로 후손들은 혼란스러워 하지요. 이문제로 고민하던중 (전)연세대교수 양권승 박사가 휘 광수 초휘 광현으로 정리하면 족보기록과 인터넷상의 기록에서 발생하는 혼선을 동시에 정리할 수 있다는 논리에 저도 동의를 했던것입니다.
고려사 정중부의 난을 고찰해보면 무신들에의해 문신들이 대거 참살당할때에 내시 진현광(검을현,빛광)이 나옵니다. 이분들의 후손이 무신정권에서 살아 남기위해 이름자 현광을 뒤집어서 광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진현광은 우리 여양진씨가 아니기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씨족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수 있어 그렇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우리 여양진씨가 처음 족보를 편찬한 것이 전기축보(1709)로 시작하여 후기축보(1769)가 전하고 있으며 그 사이 신미보(1751)와 화산보(1759)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자보(1840) 정축보(1877) 등에서는 3세조 5형제에 대해 제1자(광의), 제2자(광수), 제3자(광순), 제4자(광경), 제5자(광현- 식,화,온)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을축보(1805), 기유보(1849), 갑인보(1914), 정미보(1967), 임신보(1992)등에서는 제1자(광순-담), 제2자(광수-식,온,화), 제3자(광경), 제4자(광의-택), 제5자(광현) 으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1805년 을축보를 편찬하면서 정시술(1608-1684)의 [만성보,1670]를 참고하였다고 하나 1808년 횡성 종인 진경우 등이 예조에 상소를 올려 을축보(1805)가 잘못 되었음을 확인하고 파보하고 불살라 버리라고 한 것은 3세조의 서차가 잘못되었음을 국가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우리 여양진씨 보사의 숙제로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한편, 4세조 서차에 관련되어서도 앞선 족보에서는 (식,화,온)인데
을축보(1805)부터는 (식,온,화)로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분명 쉽지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오랜 세월 수 많은 사적들을 살피면서 카페에 귀한 자료들을 올려 놓으신 노고에 대해 감사드리며 찬사를 보냅니다.
이로인해 우리 여양진씨 역사가 풍부해 질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앞으로 노정된 새 신보 작업에는 이러한 사항들 모두를 망라해서 다뤄져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판단의 결과는 사료를 근거로 이뤄져야 할 것 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씨족사에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일가를 만나게되어 오늘은 무척 기분좋은 날입니다.
우리 여양진씨의 최초족보인, (전)기축보(1709년)발간당시 각가정(문중:세거지)에서 소장하고있던 가승이나
일부 보학자들이 편찬한 만성보,씨족원류등에서 자료를 선별하여 여양진씨 손록을 역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여 여타성씨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정확한 계대는 불가능했던것입니다..
수차 보를 재록하면서 선조님들께서 정성을 다 하섰을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선대가 정리한 족보기록을 무한 신뢰하며 정사를 외면한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는 정사에 근거하여 씨족사를 수정보완하는것은 후손의 책무인것입니다.
씨족사는 역사와 같이가야 후손들이 족보기록을 신뢰합니다.
선조님들이 활동하시던 시기(연도)를 토대로 형제의 서차를 재정비하여 계대를 소연히 밝히고,
새롭게 학인된 벼슬(품계)과 사적(행장)을 빠짐없이수록하는 위선사업에 후손들은 뜻을 모아야 할것입니다...
오타수정>댓글 끝줄- 학인>확인으로 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