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선교의 주역이신 이유, 四奇之恩
사도 5,17-26; 요한 3,16-21 / 부활 제2주간 수요일; 2024.4.10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모범을 보여준 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인연에 충실하면서(사도 1,15-26) 믿는 이들이 서로 섬기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공동생활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사도 2,42-47; 4,32-37). 사도들은 자신들이 깨닫게 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담대한 믿음으로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여 수많은 유다인들의 개종을 이끌어 냈는데, 어떤 경우에는 무려 삼천 명(사도 2,41), 또 다른 경우에는 심지어 오천 명(사도 4,4)을 입교시키기도 했습니다. 진리에 빛나고 또 예민한 성령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선교 기적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등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하느님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공동체들을 세우고자 하셨고, 또 유다인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사방 곳곳에서도 세우시고자 동분서주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움직임을 성령의 사기지은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렇듯이 분명해지자 열두 사도들은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필적하는 한 몸처럼 빠름의 은총을 받아 움직였습니다. 이렇듯 성령의 사기지은이 뒷받침된 사도들의 활동을 선교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이 선교 사도직 활동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기한 일들이 무척 많이 일어났는데, 대사제가 사두가이들과 함께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당신의 천사를 시켜 탈옥시키심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한 하느님의 개입은 베드로가 불구자를 고쳐줄 때에도 일어났고(사도 3,1-10), 다른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도 일어났는데 병자들의 치유는 물론 악령을 몰아내는 구마의 기적도 일어났습니다(사도 5,16). 박해를 받는 경우에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인정을 받았다고 기뻐하는”(사도 5,41) 마음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마귀가 함부로 하느님 일꾼들의 마음을 상하지 못하게 하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이 빛으로 나아간”(요한 3,21) 선교의 역사는 이 땅에서도 매우 긴박하면서도 극적으로 펼쳐진 바 있습니다. 중국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서적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이 조선에 유입되어 읽힌 150여 년 동안에 숱한 선비들 중에 유독 이벽만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달았고, 그래서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무관 벼슬을 마다하고 일찌감치 신앙의 길에 정진하는 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진리에 예민함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에 학문으로나 인품으로 고명하기로 이름났던 경기도 양근의 선비 권철신을 찾아가서 열흘 동안이나 설득한 끝에, 그와 그의 문하 선비들이 조선 사회를 개혁할 사상으로서 실학(實學)을 연구하던 주어사와 천진암으로 찾아가서 기어코 그들 모두를 천주학 연구자로 만들더니 결국 천주교 공동체로까지 이끌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한국교회가 이런 과정으로 탄생할 수 있었는데, 이런 오묘한 섭리야말로 하느님의 진리와 선에 대해 밝고 빛나는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벽과 동료 선비들은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아온 이승훈으로부터 1784년에 세례를 받고 나서는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벽이 뜻밖에도 문중박해를 받아 1785년에 졸지에 세상을 떠난 후 남은 10명의 선비들은 이벽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활동을 재개하여 1789년에 신자들이 천여 명으로 늘더니 1794년 경에는 신자들이 사천 명에 이르렀고, 이 무렵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성체성사까지 베풀자 1800년 경에는 만여 명으로까지 신자들이 늘었습니다. 이렇듯 놀라운 선교 발전은 천주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반만 년 민족사에서 보지 못한 현상으로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빠르게 일어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문중박해나 조정박해를 받을 때에 박해가 그들의 몸은 상하게 할 수 있었어도 믿음과 영혼에 대해서는 전혀 상치 못하는 은총이 듬뿍 내려졌습니다. 이 상치 못함의 은총은 이들 양반 선비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 중인 이하 계층의 신자들에게도 두루 풍성하게 내려서, 이후 백 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배교하느니 차라리 심산유곡에 찾아 들어가서 불편하고 가난하게 살지 언정 교우촌을 세워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겠다고 선택하는 소리 없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박해의 칼날도 교우들의 신앙 의지를 상치 못함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치명하여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남은 교우들에게 박해 시의 대책을 일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또 박해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사전 지침도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마치 성령의 지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전국 189군데에서 백 년 동안 일어난 사태가 이 박해시대 교우촌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으려고 심산유곡으로 숨어 들어 자리를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박해 속에서도 입교자가 늘어났던 역사적 사실은 성령의 움직임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듯 하느님 사랑의 빛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나타난 한국교회의 사기지은 현상은 매우 뚜렷합니다. 이처럼 뚜렷한 역사적 징표는 전 세계 가톨릭 선교 역사상 오직 한국교회에서만 유일합니다. 이 징표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전통적인 교리 이해로는, 이 사기지은 현상을 부활한 육신이 내세에서 이룩할 현실로 미루어 놓고 있어 왔습니다만, 오늘 독서에 나오는 보편 초대교회의 선교적 현상이나 한국 초대교회의 선교적 현상이 웅변하듯이, 성령께서 복음화를 위해 베푸시는 특별한 그리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은총이 바로 사기지은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깨어 있는 안목으로 보자면, 백 년 박해를 이겨내고 그로 인한 백 년 고난까지 이겨낸 지금, 한민족의 국운은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늘어만 가던 냉담신자들이 코로나 사태 이후 더욱 늘어나는 가운데 한국 가톨릭 신앙의 활력이 뚜렷하게 정체되어 가는 오늘날,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대로, 이제는 이 하느님 사랑의 빛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성령의 이끄심에 깨어 있는 각성된 소수의 신자들부터 능동적으로 겨레 앞에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