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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신앙 토착화의 과제: 교회와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도 11,1-18; 요한 10,1-10 / 부활 제4주간 월요일; 2024.4.2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과 아나빔들이 그 복음을 알아듣는 매카니즘, 즉 메시지의 선포와 수용의 이 관계를 목자와 양 떼에 비유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때 의미로가 아니라 음색으로 알아듣기 때문에, 낯선 음색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거짓 목자의 목소리에는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이를 피해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아듣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역사적 시행착오를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도 혈통상으로 유다인이셨고 제자들도 유다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유다인 출신 초대교회 신자들도 할례 받고 율법 준수를 서약한 유다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생각만 했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두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세 번째에 가서 드디어 베드로가 목자의 음색을 알아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1,9) 즉 다시 말하면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성속의 구별은 의미가 없으며,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모든 사람들을 인종에 상관없이 깨끗하게 성화시키셨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 11,18)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동안 이방인보다 깨끗하다고 자부했던 유다인들이 앞장서서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터에 유다인들만을 선교의 대상으로 국한하는 선교노선은 이미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 데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본성적인 한계와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벽을 넘어서는 도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250여 년 간에 걸쳐서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라는 우상숭배를 강요당하면서 굶주린 맹수의 먹잇감으로 던져져서 죽어가야 했던 박해를 이겨내고 마침내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게 만드는 ‘신앙의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리고 나서는 이교적 풍습 일색이었던 로마제국의 관습과 제도와 권력까지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어처구니 없는 로마화, 서구화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박해자였던 로마제국이 국교로 받아들이자, 순식간에 로마화된 가톨릭교회는 자신들보다 더 오랜 종교와 더 합리적인 문화를 지닌 동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면서도 서구식 신앙 형식과 교회 모델을 강요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불교와 유교의 문화를 우상숭배 풍조로 단죄하며 아시아 선교를 감행했으니, 그 결과는 대규모로 장기간 진행된 저항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선교 실패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낯선 목소리를 따라간 결과였던 것이고, 이는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로 복음의 시선을 향하기를 주저하던 베드로 당시 초대교회 유다인들의 관성적 선교 태도를 답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본래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아시아 서쪽 끝 이스라엘에서 탄생했었습니다. 동방으로 향한 복음화의 물결을 끔찍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조선의 선비들과 민중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석을 다진 선각자 선비들과 박해시대의 교우촌 신자들은 보편교회 초대교회의 신자들처럼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던 양 떼였습니다.
지금은 아시아인들을 제국주의적 침략 노선으로 위협하던 서구 열강 국가들을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으로 따라잡고 문화력으로도 앞선 우리 대한민국이 이제 새롭게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할 때입니다. 아시아는 물론 가톨릭의 보편교회까지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응답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의 섭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서구 교회의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한국교회에 전해준 정통 신앙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되, 서양 옷 대신에 우리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줄 때에 이미 우리 선조들이 전해준 하느님 신앙이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 박해에 눌려 거의 죽어버린 신앙이 유독 이 땅에서만은 백 년을 버티었고, 그예 되살아나서 아시아의 독보적인 가톨릭 세력으로 우뚝 섰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까지! 이 점에서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가 우리의 참고가 됩니다. 바리사이즘이 전부인 줄 알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찾은 후에 이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알리려 했던 그가 우리에게는 예수님 다음가는 모범입니다.
교우 여러분!
메시지 선포와 수용의 매카니즘에 있어서 신앙과 교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토착화 과업입니다. 게다가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보편교회로부터 커다란 여망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사명을 생각하면, 최근 폭넓은 공감대를 전 세계에서 특히 아시아에서도 형성하고 있는 한류의 복음화도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이는 한류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한편 민족의 정체성까지도 회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부르신 목자의 음색을 알아듣고 제대로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가야 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양 떼라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는 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5천 년 전부터 당신 목소리로 희미하게 우리를 부르시다가 2백 4십여 년 전에 제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와 신학의 토착화 작업을 선구적으로 수행해 온 심상태 몬시뇰의 논문을 부록으로 덧붙입니다(출전: <한국교회의 토착화 신학’, 2016>)
한국교회 토착화의 과거와 현재 / 심상태
한국교회의 토착화 진행 과정을 역사적으로 일별하는 데 있어, 먼저 복음이 전래되기 시작한 1784년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토착화 실태를 서술하고, 그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현실을 약술하기로 한다.
1. 한국교회 토착화의 역사적 도정
한국교회는 신앙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1. 신앙 토착화의 배경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이 시작된 것은 1784년 북경에 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교회 문물을 가지고 돌아와 그를 기다리던 이벽을 위시한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부터다. 이를테면 한국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에 의해 설립된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 구도자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생겨났다. 이 자발적 신앙 활동의 주도자들은 유학자 집단이었다. 교회 설립 당시 개척자인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 등은 모두 사대부 계층의 인물들이며, 성호 이익의 문하에 속하는 젊은 유학자들이었다. 성호 이익은 조선 후기 실학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실학파는 유교 전통을 반성적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개혁 정신을 지니면서 비판과 실증, 실용 정신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실학파는 학문의 객관성과 자율성을 추구하는 개방 정신을 지녔으며, 특히 성호 학파는 서양 과학과 천주교 사상에 대해 18세기 전반부터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토론을 거듭했다. 그런데 성호 학파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교 신념에 입각하여 천주교 사랑을 공략하는 공서파(攻西派)와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나뉘었다.
신서파에 속하는 이벽을 중심으로 한 남인 학자들은 1777년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漁寺)의 강학회(講學會)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경직되고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고 새로운 정신을 함양하는 가운데 암울한 현실에서 탈출구를 모색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당대의 지배적인 성리학의 한계성을 인식하면서 공맹(孔孟)의 원시유학(原始儒學)으로 연구 시야를 집중했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참된 유교의 진리를 인식하면서 결과적으로 전통적 유교 문화를 정수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원시유교의 기본 사상에 입각하여 그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 극기복례(克己復禮) 등의 정도를 실천하면서 점진적으로 새롭고 폭넓은 세계 문화로 시야를 돌리기에 이른 것이다. 그 기반 위에서 17세기 이후 조선에 전래된 한역 서학서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 판토하(Diego de Pandoja, 1571~1618)의 『칠극(七克)』 등을 연구하면서 마침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천주실의』의 저자 마테오 리치 신부는 이른바 ‘보유론(補儒論)’의 관점에서 원시유교와 천주교의 동질성을 이론적으로 제시하면서 당시 중국교회의 토착화를 위한 합리적 이론 체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해서 그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주체 의식이 심화되어 있던 중국 문화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교회를 설립한 사람들 역시 고대 원시유학인 수사학(洙泗學)과 그리스도교 사상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발견하고, 이러한 문화적 활동은 이질적인 두 세계의 종교와 문화를 잇는 교량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교회의 토착화를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1.2. 초창기 토착화의 시도
토착화를 비그리스도교 문화에서 발생하는 복음화의 사건으로 이해할 때 토착화 작업은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착수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0년 이후 비상한 관심을 받은 『만천유고(蔓川遺稿)』(만천 이승훈의 유고집)에는 이승훈과 순교한 남인 신서파 학자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 책에 한국교회 개척자 광암(曠菴) 이벽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성교요지(聖敎要旨)』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서양인 선교사의 직접적인 선교 활동 없이 자발적으로 형성된 한국교회의 초기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이벽은 참된 유교사상인 수사학의 정신 체계를 기반으로 그리스도교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이질적인 두 문화 세계의 연결과 융합을 그의 작품 속에서 모색하고 있다.
이승훈에 의해 제도종교로서 한국교회가 시작되던 1784년 이전에 서민을 상대로 작성된 것으로 간주되는 ‘천주공경가’는 유학적 분위기의 내용에 교회 용어를 사용하면서 천주를 공경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에서 출발해 하느님에 관한 인식으로 발전하는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성교요지』는 양반과 선비 계층을 상대로 한 시경 형식에 가까운 전49절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에 유입된 최초의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경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문화적이고 역사적 사료이면서 그리스도교 사상 수용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 『성교요지』는 한국교회가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는 초기에 나타난 최초의 사상 자료이고 종교적 내면성까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내용은 신구약 성경 내용과 사상에 입각하여 신앙 사상의 기본이 되는 천지 창조, 인간의 창조와 원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기적, 구속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을 시경체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벽은 유학 사상이 드러나는 가운데에서도 정도관(正道觀)을 표명하는 데 바오로의 로마서 내용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성경에 관한 최초의 인식과 표현이 놀라울 만큼 정확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완벽하게 드러나고 있다.
초기 교회의 또 다른 지도적 인물인 정약종은 서민이나 부녀자들을 위해 순 한글로 기본 교리를 해설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다. 『주교요지』의 기본 내용과 형식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원용하고 있다. 그런데 『주교요지』는 체계적이고 분명한 이론 체계를 지니면서도 우리말로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교요지』는 천주의 존재 증명, 천주의 속성, 속론배제(俗論排除), 불교 비판, 천주의 상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약종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내용에 자신의 경험과 사상을 덧붙여 한국인의 심성에 부합하는 대중적인 교리서를 작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정하상이 작성한 『상재상서(上宰相書)』 역시 동일한 사상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정약전 등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십계명가(十誡命歌)’ 역시 그리스도 교회의 십계명을 유교 문화의 토양 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드러내며, 표현에 있어서도 어려운 한자 숙어보다는 쉽고 대중적인 양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벽, 정약종, 정약전 등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들이 당시 사회의 문화 전통의 기반 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사상을 수용한 점, 양반 계층만이 아니라 서민과 부녀자를 위해 토착화된 표현 양식을 사용해 신앙 사상의 대중화에 기여한 노력은 경탄을 자아낸다. 여기서 한국 초대교회의 복음은 그리스 서방 사상의 배경 하에서 형성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체계적 설명을 거치고, 중국의 토착화된 동양적 설명과 체계를 거쳐,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한국적 토착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초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전통적 유교 문화와 새로 유입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연결을 찾기 위해 고심한 면모를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두 문화를 상반되는 양극적 문화 체계로 보지 않고 유대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모든 분야에서 수긍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접점을 발견하려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리를 설명하는 데 전통적 표현 양식을 사용했고 자연적 비유나 상징을 원용했다. 그들은 개종 이전의 전통적 관습을 보존하면서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신앙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 기반을 공공히 하고자 했다.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그 당시 문화적이고 학문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 사상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결단을 내리면서도 전통적 유교 사회의 미풍 양속을 보존하고 한국인의 종교심성에 부합하는 표현 양식에 따라 교리를 해설하는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 교리를 그들이 처해 있던 사회 현실에 적응시켜 신속하고 심도 깊게 전파할 수 있도록 창의적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한편, 이 신앙 교리를 군주적 봉건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실천적 이념으로 활성화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신앙의 진리가 연구·수용되기 시작한 당시 조선 사회는 공적인 문화와 종교, 정치와 제반 생활규범이 유교 사상에 지배되는 절대군주 사회였다. 엄격한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유교 이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지배되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획일 사회였다. 조선 사회에서 노비와 고아와 무당과 백정 같은 천민은 물론 대부분의 상민과 부녀자와 아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인습이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물의를 빚지 않고 생활화된 분위기 속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경직된 신분 의식을 과감하게 뛰어넘어 만인을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고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복음적 인간관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들은 오늘날 만인이 기리는 민주주의 이상을 당시의 절대군주 사회에서 정착시키고자 노력한 진취적인 선구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진실한 구도자의 자세로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구원을 위한 진리를 열정적으로 추구했고, 이 진리를 접하고 난 뒤에는 삶으로 실천하면서 이웃에 헌신적으로 전파했다. 그래서 일반 신자들은 신앙 공동체 생활 안에서 이론적이고 실천적 차원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새로운 고향을 느낄 수 있었다.
1.3. 토착화에 대한 배려와 고민이 없었던 로마 교회의 경직성
그러나 한국교회가 설립 초기부터 해온 토착화 작업의 성취 노력은 로마 교회 당국의 선교 정책의 변화와 관련해 지속된 가혹한 박해로 말미암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포교 활동이 시작된 뒤에는 전통적 한국 문화와 종교 사상에 대한 선교사들의 무시 또는 무지로 말미암아 서구 사회에서 토착화된 교회의 이식(移植) 또는 부식(扶植)으로 시종 점철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태는 신앙의 박해가 끝나고 일본의 식민 통치가 지속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서구교회의 축소판 같은 외래 종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2. 한국교회 토착화의 현실
1945년의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거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던 1960년대 초까지 한국교회는 점진적으로 방인 성직자들이 주도해 왔다.
2.1.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이전에도 신학 사상과 교회생활의 여러 부문에서 토착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나마 경주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 종교에 대한 한국적 그리스도교 연구가 소수 성직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전통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소수 문화인들에 의해 있었다. 특히 지난 공의회 이후 전례 영역에서 전통 양식에 따라 토착화하려는 시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교회는 지난 공의회가 개최되던 1962년에 교계 제도적으로 온전한 의미에서 완전한 자치 교회로 출범했음에도 반세기를 넘긴 오늘날에도 서구 교회의 아류나 모방적 모습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여전히 신학 사상과 전례양식, 신심운동과 영성생활 그리고 건축 양식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서구 교회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모방적 한국교회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서울 시내 어디를 가나 성당의 모습은 소규모화된 서구식 건축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지 대동소이하리라고 짐작된다. 새로 지은 성당의 색유리 디자인까지도 우리 것을 개발하려는 의지보다는 서구의 것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이 보통이다. … 음악 분야도 비슷해서 통일 성가집을 만드는 작업 중에 한국적 가락으로 창작된 성가를 찾았지만 별로 구할 수가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200주년 가톨릭 미술전에 가보아도 참으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작품이 너무나도 희귀하다. … 우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성을 표현하는 시와 소설, 그림과 음악, 조각과 건축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우리의 모방적 외모를 가장 뚜렷이 세계에 보인 예는 103위 성인 시성식 때 여의도 광장에 꾸며진 제대였을 것이다. … 그 화려한 제대를 처음 보았을 때 가벼운 실망의 느낌이 내 마음을 스쳐갔다.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꼬집어서 어떤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제대는 뉴욕이나 파리나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리스어의 글자까지 들어간 지극히 서구적 전통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처음의 실망을 딛고 일어선 필자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이니까 그 현실에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김승혜, “한국교회 토착화의 오늘과 내일”, 저자는 서구 교회적이어야 그리스도교적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한국 신자들의 사고 자체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보편교회 지도자들은 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토착화를 복음화의 주요 요소로 분명히 중시하고 있다. 1984년 한국교회를 처음으로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당시 교회 지도층 주교들에게 토착화에 주목할 것을 촉구했다.
토착화와 화해, 그리고 나눔과 같은 이러한 커다란 주제들은 복음화와 교리교육의 핵심입니다.(“벗으로서 평화의 사도로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말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행사위원회 편, 1984)
교황은 한국교회가 문화 복음화를 위해 멀고도 중요한 작업을 수행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복음 자체가 문화의 한 누룩이라고 말하면서 문화를 복음화하고 인간을 옹호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한국 신자들이 선조들의 토착화 노력을 본받아 꾸준히 이어간다면 주체적 문화 복음화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의 믿음의 조상은 복음을 자신의 문화와 민족 주체성 안에 토착화시키려고 훌륭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숫되면서도 그윽하고 아름다운 말로 설교하고 노래와 기도와 찬가를 짓고 교리책과 신공책을 엮어내되, 자신의 문화와 심성 깊숙이 뿌리 내린 말로 함으로써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에 곧장 와 닿게 하였습니다. 만일 그런 노력을 본받아 꾸준히 이어 나간다면 어김없이 그 주체성 안에서 문화의 복음화로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이에 앞서 1968년 한국순교복자 24위를 교황청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하던 장엄한 의식 거행 때 바오로 6세 교황 역시 이와 비슷한 기대를 피력한 바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개척자들이 신앙의 진리를 외국 문화에서 수입한 형식이 아니라 미리 연구하고 노력해 자신들에게 알맞게 이해된 메시지로 수용함으로써 온전히 진실하고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인 동시에 완전히 한국적인 그리스도교를 이룬 것을 찬탄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의 새롭고 영광스러운 이 자녀들의 성스러운 면을 탄복해야 마땅할 것이다. …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이것이 예언적 표시가 아닌가, 한 나라 전체의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 고유한 사명을 알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보편적 종교에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래의 표현 양식을 제공하고, 자신의 미래 역사를 규정지을 수 있으며 세계 모든 나라의 교향악 안에 새로이 삽입되는 한국교회 자신의 사명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2.2.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1984년은 한국교회 토착화를 위해 기념비적인 해였다. 1784년에 시작된 한국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교회 사상 최초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교회의 진정한 성숙에 기여하려는 취지에서 ‘한국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를 개최했다. 이것은 비서구 지역 교회의 토착화를 촉구한 지난 공의회의 기념비적 성과로 볼 수 있겠다. 이 사목회의는 민족의 복음화를 목표로 설정해 한국교회의 현상을 분석·검토하고 미래지향적인 선교 대책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의 모든 문제를 내성(內省)과 대화(對話)로 대별하여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 전례·신심운동·교리교육·지역사목·가정사목·특수사목·교회운영·선교와 사회 등 12분과로 나누어 해당 의안 담당자와 150명에 이르는 전문위원이 교회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교회 저변에서 하느님 백성의 소리를 청취하고, 학문적 뒷받침을 받으면서 의안 초안을 작성했다.
이어서 각 교구와 수도 단체, 평신도 단체가 초안을 검토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다시 여러 차례에 걸친 전문위원회와 분과별 해당 전국위원들의 세미나와 연수회 등 회의를 거쳐 비로소 의안이 작성되었다. 이 사목회의 의안은 한국교회가 내놓은 공식 문헌으로 이 땅의 모든 계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이 사목회의 의안이 선교 300년대를 지향하는 사목 향방 설정에 큰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 전례 · 신심운동 · 교리교육 · 지역사목 · 가정사목 · 특수사목 · 교회운영 · 선교 그리고 사회문제 등으로 나뉜 12개 분과 의안 중 11개 의안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토착화의 필요성과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목회의는 이처럼 보편적 교회 안에서 한국 민족 문화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계시의 빛으로 조명, 수용하고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토착화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적극 추진함으로써 이 땅에 민족 문화 창달과 인간다운 삶을 증진시키는 데 이바지하려는 결의를 표명했다.
한동안 이 사목회의를 계기로 하여 한국교회의 토착화 필요성이 범교회적으로 표출되면서 일종의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회 일각에서나마 토착화를 실현하기 위한 작업이 간헐적으로라도 추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1987년에 설립된 한국주교회의 사무처 기구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부설 ‘한국사목연구소’가 한국 교계 제도 설정 25주년을 맞아 그해3월 26일 개최한 학술회의 주제를 “한국천주교회의 토착화 전망”으로 채택하고 그해 여름 연구소 산하에 ‘토착화 연구회’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9월부터 전례를 위시하여 영성과 교리교육, 선교와 신관, 인간관과 공동체관의 주제에 관하여 각 전문가들의 주제 발표와 논평, 학계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이어졌고, 그 결과를 『사목』지와 자료집에 발표하는 토착화 연구발표회를 1990년 5월까지 모두 49회에 걸쳐 개최했다. 그리고 사목연구소는 1989년 5월에 ‘상제례(喪祭禮) 토착화 연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93년 12월 14일에 상제례 예식서 시안을 마련하고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기까지 연구 모임을 20여 차례 갖고 작업 결실을 주교회의에 상정하는 등 토착화 작업을 진척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2007년 춘계 주교회의의 납득하기 힘든 결정으로 창간 40주년을 맞던 『사목』 폐간과 연구소 해체라는 충격적 사태가 벌어진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 일각에서 한때 ‘한국교회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고 불리기도 했던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는, 마치 폭풍우 뒤 정적처럼, 지난 30년 동안 거의 잊히다시피 한 일이 되는가 하면, 사목회의 의안들 역시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는 불운에 처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쇄신과 민족 복음화와 직결된 토착화의 활성화나 교회의 구조 변화와 같은 의안 내용을 진지하게 연구 검토하는 작업은 교회의 공식 차원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한국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공의회 이전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로마-서구적 교회 모범을 고수하는 데 급급해 하는 분위기가 도처에서 감지되었다. 이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교회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서구 교회에 편향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근년 들어 한국교회가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교회’라는 지적을 안팎에서 자주 받게 된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분명히 존재한다.
2.3. 역주행하는 토착화 작업
이러한 서구 교회의 편향적 풍토에서 한국교회 지도층을 위시하여 신학계 종사자들까지 거의 대다수가 신학 토착화 작업에 대해 냉담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논자는 그동안 한국 신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신학 작업이 중세 이후 서구 문화권의 지평에서 생활하고 사유하는 서구인에 의해 형성된 전통 신학이거나 현대 신학의 주요 통찰과 관점을 번역·번안하여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지적해 왔다. 한국 신학 안에서는 반만년 역사를 지닌다고 일컬어지는 고국인 한국을 위시하여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나 비서구권의 문화 종교적이고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발해지는 시대적 요청에 진지하게 부응하는 신학적 결실을 만나기 힘든 실정이다. 한국 가톨릭 학자들의 연구 활동은 대부분 서구 학계에서 이미 정립된 지 오랜 방법과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에 번역 내지 번안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연구 결실이 대부분 서구 유학의 산물로 간주될 수밖에 없고,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과 도달되어 구명된 내용이 전통적이거나 60년대 이후에 형성된 서구 신학의 방법과 내용에 머물러 있다. 독창적 시각으로 이루어진 결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연구 내용은 학계에서 주지되다시피 한 일반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성격의 연구 활동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가톨릭 대학교 신학 정기간행물들에는 한국을 위시하여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비서구 문화권 교회와 신학의 문화적이고 사상적 지평 안에서 신학 관련 주제를 다루는 연구 논문은 ‘가뭄에 콩 나듯’ 극히 드물고 기존 서구 신학의 패러다임 안에서 형성된 주제나 제기된 쟁점을 다루는 연구 논문이 일색이다.
논자는 한국교회 일반과 신학계의 이러한 현실에서 생활하면서 꽤 오래 전에 한 서방 선교사가 한국교회의 토착화 현실과 관련해 한 말이 여전히 타당성을 지닌다고 자조하고 있다. “정직하게 말해 한국교회는 대부분 토착화의 철저한 도정을 밟으려 하지 않는다. 교회의 현 지도층과 일반 구성원들은 수입된 제도와 전통에 경도된 나머지 이따금 약간 한국식 겉치레를 하는 것 이상으로는 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R. Brennan).
3. 한국 토착화 신학의 원리
이 장에서 논자는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토착화 원리를 명제적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 토착화 신학 또한 인류 역사 안에서 출현한 한 유다인 나자렛 예수 안에서 드러난 구체적 사건을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계시라고 믿는 데에서 기준을 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계시를 보편적 기준으로 삼아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 신앙 현상이나 구원 진리 주장들의 진실성 여부를 식별해야 하는데, 이는 한국의 과거 역사에서나 지금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따라서 이를 수용하는 구원 사건은 늘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3.1. 현실 식별의 보편적 기준과 특수한 범주
한국인이 신앙 주체이면서 구원 대상자로서 성취한 신앙생활은 늘 인간의 일반적 존재 구조에 상응하여 한국적 상황에서 표현되고 객관화되기 마련이다. 한국적 역사와 현실 상황에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수용하는 일은 신앙인 당사자의 가정적이고 개인적인 출신 성분과 종교와 문화, 정치와 사회와 경제, 지리와 역사적 요인과 한국 풍토와 제반 환경에 상응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이 계시 식별의 범주 양식으로 작용된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 신자 개인이나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초자연적 신앙이나 구원 여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진리에 비추어 인지되고 평가될 것이다.
3.2. 식별에 따른 신앙과 신학 토착화 과제
앞으로 한국교회와 신학 관계자들은,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서구와 다른 지역의 신앙생활 양식과 신학 사상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는 가운데 고금의 한국 역사와 현실 안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는 진정한 하느님 신앙의 특유하면서도 고유한 역사적 실현 양식을 인지하고 이를 교회생활과 신학 체계 안으로 수렴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 신앙의 이해와 표현, 생활양식이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사고방식, 정감 · 언어구조 · 문학유형에 상응할 때 비로소 한국의 문화 토양 안으로 좀 더 깊숙하고 친숙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외래문화의 형식과 사고방식에 그리 친숙하지 않은 소박한 민중까지 그리스도의 신앙 진리가 바로 자신을 위한 구원 진리임을 실존적으로 이해하고 생활화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을 앞으로는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신앙과 신학의 토착화 작업은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성격에 입각해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 진리가 각 문화권에서 새롭게 사유되고 진술되고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 방침과 부합된다(참조: 사목헌장, 44항; 58항; 교회헌장, 17항; 선교교령, 19항).
3.3.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이해해야 할 과제
한국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한국인에게 적절한 양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국적 실재’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심도 있는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적 실재’란 19세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존속했던 폐쇄적이고 경직된 조선 왕조에서 지배적이던 전통문화와 사상에 의해 규정되는 단일적인 정적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발달하는 과학과 기술에 힘입어 지구촌으로 변모한 약동적이고 개방된 세계 안에서 이질 문화와 사상의 해후에도 여전히 존속하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한국적인 것’을 뜻한다.
새로운 세기와 천년대가 펼쳐지면서 한국 사회는 물론 온 세계에 광범위하면서도 심층적인 변화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역사적 전환기에 ‘한국적 실재’ 역시 격동과 소요를 겪는 처지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기에 한국 신학은 모든 인문-사회과학, 기타 관련 학문과 학제 간 공동 작업을 통해 ‘한국적 실재’의 실상을 정확하고 면밀하게 구명해야 한다. 신학은 인접 학문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드러난 한국 사회와 세계 현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입각하여 교회 신앙의 안목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며, 그 안에서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가치를 지닌다고 파악되는 요소를 ‘하느님 나라’ 안으로 수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4. 전인적이며 보편적인 인간, 그리고 세계 영역 전체를 복음 진리의 빛으로 조명해야 할 책임
토착화 신학에서도 주된 관건이 되는 ‘인간과 세계의 구원’은 성(聖)과 속(俗), 영혼과 육신, 개인과 사회, 인간과 자연 세계를 포괄하는 전체적 실재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신앙적 수용이 발생하는 ‘장(場, locus)’은 협소한 의미에서 ‘종교 영역’에 그치지 않고 ‘세계 영역’ 전체를 포괄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와 신학은 전체, 곧 한국의 과거 역사 안에서 발생했고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신앙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신학은 ‘신앙과 구원의 장’으로서 ‘한국적 실재’를 규정하기 위해 한국의 종교와 문화, 정치와 사회와 경제, 지리와 생태 환경 영역 등 전반적인 한국 현실을 파악하고 ‘한국적 삶’이 전개되는 지평으로서 세계의 정황을 고려하면서 과거에 발생했고 현재에도 발생하는 구원사건으로서 신앙 성취의 실상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인지하면서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빛으로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3.5. 현실 변혁의 취지를 표명하고 전통 문화를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성
하느님의 계시 수용과 신앙이 성취되어야 할 장이자 터전인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 불화와 부조리, 불의가 만연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표현 양식에서 한국적 면모를 지니는 가운데 그지없이 소외된 한국의 현실을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통해 변혁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 신학은 한국 사회와 세계에 만연해 있는 지배와 소유의 ‘죽음의 문화와 문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된 섬김과 나눔의 ‘사랑의 문화와 문명’인 ‘하느님 나라’로 변모시키려는 현실 변혁의 취지를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신앙 성취와 심화를 위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불가피하게 요청되며, 앞으로 한국 신학 관계자들에 의해 심도 있게 착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