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도 9,26-31; 1요한 3,18-24; 요한 15,1-8
부활 제5주일; 2024.4.28.
1. 말씀의 초점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풀이해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그 나무를 심으신 농부는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서 나온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아있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일단 열매를 맺게 되면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그 가지를 잘라 버리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어제의 복음 말씀(요한 14,7-14)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현존 보장 약속도 해 주셨지만, 우리 역시 예수님과 일치되어 살아가야 하느님과도 일치될 수 있으며 행복과 구원의 은총도 풍성하게 받으리라는 이치를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비단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치관에 관한 사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여 맺어야 할 열매 즉 선교적 성과를 겨냥하여 하신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독서에 나오는 두 사도요 선교사가 겪은 체험과 처신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2. 사도 바오로의 경우
첫째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박해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벼락을 맞은 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직후의 상황을 들려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하나니아스가 바오로를 찾아가 세례를 두고 안수도 해 주었으나(사도 9,17-18), 이 소문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만 알려졌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제자들과 신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바오로를 박해자로 여기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사도 9,26) 그러자 바르나바가 나서서 사도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고 전후 사정을 소상하게 알려주면서 신원 보증을 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바오로는 사도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수하에 있던 일부 신자들은 여전히 바오로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그가 소아시아의 갈라티아 지방에 선교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오려는 이방인 즉 그리스계 유다인들에게 할례를 면제하는 활동을 벌이자, 그들에게 바오로의 선교 노선을 ‘이완주의’라고 비판을 퍼부어서 갈라티아 공동체에 큰 혼란이 빚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에페소 선교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는 크게 격분하여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갈라티아 편지’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사도들에게 중재를 요청함으로써 이방인 출신의 입교자들에게는 할례를 면제해 주는 결정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사도 15,1-21)
또 하나 사도 바오로가 만난 그리스계 유다인들과의 만남에서도 어려움은 있었고, 이것이 교회 내부의 적대자들이었던 ‘사도들의 수하 신자들’이 보여준 방해 공작 이상으로 그에게 시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도시마다 지어진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예배를 드리곤 했었는데, 사도 바오로는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이 유다인 회당에 찾아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요행히 설교를 부탁받으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해석하면서 특히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고, 자신과 사도들이 이 부활의 증인이라는 요지로 설득하곤 했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신 덕분에 사도 바오로의 설교는 상당한 호응을 받곤 했는데, 그렇게 되면 여지없이 회당장을 비롯한 다른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나서서 바오로를 핍박하곤 했습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는 물론(사도 13,45), 이코니온과(사도 14,5) 리스트라에서도 그러했고(사도 14,19), 심지어 그리스의 데살로니카에서도(사도 17,5) 그러했습니다. 아마도 이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필시 바리사이파였을 것이고 이들은 자신들의 열성적 동지였다가 배신하고 그리스도교 선교사로 전향한 바오로에게 앙심을 품었을 것입니다.(사도 9,29)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일정한 선교적 성과를 거두기만 하면 마치 사발통문이라도 돌린 것처럼 일제히 들고 일어나서 그를 핍박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오로는 교회 안팎에서 방해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박해자 전력을 지니고 있음을 숨기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이 모든 시련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받아들였습니다. 방해하던 교회 내부의 적대자들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핍박하던 교회 외부의 이전 동지들이었던 바리사이들과 맞서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새로운 사명, 즉 하느님께로 돌아오려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방해 공작과 박해 행위는 오히려 사도 바오로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으며, 박해자로서 저지른 죄과를 참회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고, 그를 더욱 그리스도께로 달음질치는 성숙한 인간으로 단련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아꼈고 마음으로도 의지하던 필리피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써 보낼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필리 2,16)
3. 사도 요한의 경우
예루살렘에 머물던 사도 요한은 아직 소아시아에 가기 전에, 로마에서 순교한 바오로의 뒤를 이어 에페소 교회를 사목하던 티모테오로부터 이단 신앙인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부탁을 받고 100년경에 서간 세 통을 써 보냈습니다. 그가 티모테오로부터 들은 바로는, 에페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그리스계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출신으로 입교한 이방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구약성경을 알고 있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이 동격으로서 일치하여 계시다는 고백을 부담스러워 하였고, 그리스에서 유행하던 다신교 풍습과 인간 이성을 으뜸으로 추구하는 철학 사조에 물들어 있었던 그리스 출신 이방인 새 신자들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공로를 보신 하느님께서 아들로 입양하셨다고 믿기도 했고(입양설 入養說), 그리스 출신 새 신자들은 인간 이성 중에 가장 뛰어난 이성 즉 영지(英智)를 지니신 분으로 믿기도 했습니다(영지주의 靈知主義 Gnosticism). 이 가운데에서 사도 요한이 편지를 통해 논박하고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고자 주안점을 둔 것은 후자, 즉 영지주의 이단 풍조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신자들 안에서 영지주의 사상은 대유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적 사유방식에 영향을 받아 정통 그리스도 신앙을 훼손하고 있던 이 이단자들은 교회를 떠났으며(1요한 2,18-19), 성실한 교우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1요한 2,19; 2요한 10). 그들은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말쟁이들’(1요한 2,22), ‘거짓 예언자들’(1요한 4,1), ‘속이는 자들’(2요한 7)이라고 사도 요한은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속이는 영의 인도를 받고 있다(1요한 4,5-6)는 것이며, 이들은 영지주의의 이분법적 사조에 물들어 그리스도론과 윤리와 종말론에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는 강생하지도 않았고(1요한 4,2-3; 2요한 7), 죽임을 당한 적도 없다(1요한 5,6)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이단자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깨쳐 죄많은 세속을 초탈한 것처럼 처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사도 요한은 오늘 독서가 포함되어 있는 요한 1서 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권고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직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죄와 사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악마에게 사로잡히는 것이요 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그 악마의 시대에 종말을 앞당기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의 진정한 모습은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고(“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오늘 복음 말씀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로도 나온 것처럼, 이렇게 되기까지 죄를 멀리하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사랑할 기운을 북돋아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이 영지주의 이단을 경계하면서 신자들에게 권고한 바를 간추리면 이러합니다. 즉,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 그분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1요한 3,18.23-24).
4.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제발로 떨어져 나간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매일 기도를 바치며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 중에서도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해 메마른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뜻에서 다시 한 번 오늘 복음의 요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복음 환호송. 요한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