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활동에서 일어나는 사기지은
사도 14,5-18; 요한 14,21-26
부활 제5주간 월요일(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2024.4.2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할 때, 사도들을 통해 당신의 존재와 능력을 드러내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21) 이를 현존의 신비라 하는데 예수 부활 이후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나라로 변화시키시는 방식입니다. 사도들은 이 현존의 신비 안에서 계명의 실천과 진리의 가르침으로 살아가도록 양성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은총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사도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그분의 계명을 지킬 것이고(요한 14,2), 이 사랑은 그분께서 공생활 동안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분의 인격과 처신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34)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남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바를 기억하여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했는데, 신기하게도 사도들은 놀라운 기억력으로 이를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성령께서 스승으로서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바를 모조리 기억하도록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4,26)
과연 초대교회 시절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첫 번째 선교여행에서부터 이 현존의 신비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있던 유다인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해석하는 설교를 했더니(사도 13,16-41), 이에 공감한 몇몇 유다인들이 생겨났습니다.(사도 13,42-44) 그랬더니 유감스럽게도 회당장을 비롯한 바리사이 유다인들이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으며(사도 13,50-51), 이코니온까지 쫓아와서 괴롭히고 심지어 돌까지 던져서 죽이려고 들었습니다.(사도 14,5)
이러한 수난에 대해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십자가를 자신들도 같이 짊어지게 된 것으로 믿고,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사도 13,52)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고 약속하신 바에 따라서, 리스트라에서 바오로 사도는 태생 앉은뱅이를 벌떡 일으켜 세웠습니다.(사도 14,9-10) 이것이 사도들의 선교활동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정황과 조건이었고,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에서 후대의 선교사들이나 신앙인들도 세상의 적대자들이 가하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부활의 사기지은을 입어 선교의 열매로써 로마제국으로 하여금 박해를 멈추고 진정한 국제 평화를 실현할 수 있게 된 역사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도 박해가 백 년이나 지속되었지만, 박해로 신자들의 씨가 말라 버리다시피한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신앙 진리가 빛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고, 온갖 끔찍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배교하지 않고 교우촌을 이룬 경위에서 사기지은을 체험한 경우가 많았으며, 그 결과 이례적이게도 박해 중에 오히려 신자들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이 희한하고 거룩한 순교의 역사를 배경으로 구한말에 등장한 인물이 안중근(安重根. 1879~1910)입니다. 그는 부친 안태훈이 명동성당에서 피신하면서 얻어온 교리 서적 120여 권을 독파한 후, 부친과 함께 1879년에 황해도 담당 선교사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897년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오자 안 의사는 자기 집을 성당으로 내어 놓는 한편, 빌렘 신부를 수행하는 선교사로서 황해도 7개 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을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등 눈부신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그의 투신은 1897년 555명에 불과하던 황해도 지역 천주교 신자가 5년만인 1902년에 7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가톨릭신문, 2009.10.25.)
그러던 무렵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운 일본 군국주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국운이 나날이 기울어져 가자, 그 무렵부터는 선교활동 대신에 나라를 구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습니다. 그 많던 가산을 다 털어서 평양에 삼흥학교를 세웠고, 여기서 후학들에게 교리와 한글과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외교권을 박탈한 데 이어 군대까지 해산시키는 등 침략의 마수를 노골적으로 뻗쳐오자 아예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승산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적장인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1909년 10월 26일에 거사를 단행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익힌 사격솜씨로 그 어렵다는, 지근거리에서 권총으로 침략의 원흉을 처단하면서도 일말의 가책도 없었고, 오히려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지성을 발휘한 선비요, 열성적인 선교사였으며, 교육운동과 의병투쟁에 헌신했던 그가 오늘날에는 옥중에서 저술하다가 마치지 못한 ‘동양평화론’으로 인해 겨레의 예언자로서 동북아시아 평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순교자로 숨진 후 백년이 넘게 흐른 아직도 동양평화는 요원하지만, 그가 가슴에 품었던 이 원대한 꿈은 ‘사랑의 문명’과 아시아 복음화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열렸던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개막미사와 폐막미사 강론에서, 복음화 과업이 지지부진하기만 하던 근세의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240여 년 전 오묘한 섭리로 복음의 진리를 한겨레에게 허락하신 진리의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분단과 전쟁으로 고통 받아 온 한겨레를 통하여 인류에게 평화의 하느님으로 나타나시기를 역설하였습니다. 앉은뱅이와도 같이 답답하고도 부자유스럽게 냉전구도에 갇혀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진리가 사랑의 기적으로 나타났듯이, 이제 사랑은 다시 평화의 기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목숨 바쳐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안중근 토마스의 뜻과 인류 평화의 사도였던 요한 바오로 2세의 기도가 실현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실현하는 사기지은의 길을 이웃 민족들에게도 체험시켜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각 민족들이 저마다의 겨레 사랑으로 하느님도 사랑하는 방식을 알게 된다면, 동양평화와 아시아 복음화는 어느 덧 우리 눈앞에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보였던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의 선교활동에서 나타날 사기지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