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리의 영을 너희에게 보내리라
사도 16,22-34; 요한 16,5-11 / 부활 제6주간 화요일; 2024.5.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이 “나는 진리요 생명이며 길”(요한 14,6)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도 그분이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으신 덕분이었습니다. 과연 진리의 영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으며, 오늘 독서에서 들은 대로, 온갖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지혜와 행운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면 복음을 전할 수도 있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필리피 감옥에 갇힌 바오로와 실라스는 그저 간절하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만 했을 뿐인데 그 기도를 들으신 성령께서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간수는,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발에 차꼬를 채웠고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는 등 간수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자, 문책 받을 것이 두려워 칼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본 바오로는 감방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탈옥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면서 자결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도 기적이었지만, 죄수가 간수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저절로 감방 문이 열려버린 일도 기적이지만 탈옥할 수 있었는데도 죄수가 탈옥하지 않고 오히려 간수를 걱정해주는 아주 이례적인 호의를 바오로에게서 본 그 간수는 깍듯한 호칭으로 발 앞에 엎드려 빌면서 간청했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16,30). 그러자 바오로는 한 술 더 떠서, 본인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그러자 그 밤중에 간수는 자신의 집으로 사도 일행을 모시고 가서 매질 당해 생긴 상처부터 치료해 준 다음,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기적이었습니다.
필리피 감옥에서 사도 바오로가 겪은 매우 극적인 이 사건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가르쳐 주신 교훈대로 이루어 진 선교활동의 정수(精髓)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은 하느님께 가서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과연 그 영이 바오로와 실라스 등 선교사 일행을 진리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바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독서에 소개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올바른 뜻을 풀이해 보겠습니다.
죄란, 세상에 오시어 우리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요한 9,41). 이것이 왜 죄인가 하면, 하느님께 가는 길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의 군중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던 사도 일행을 공격하는 죄를 지었고, 필리피의 행정관은 사도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필리피 감옥의 간수는 그 지시에 따라 사도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었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발에 차꼬까지 채우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사도들에게 죄를 지은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한 죄만을 죄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필리피의 저 군중과 행정관과 간수는 사도 일행에게 대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해서도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또 의로움이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도 필리피에서 리디아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 알려주고 믿기를 권고함으로써 의로운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을 행하거나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을 의로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의로움의 범위를 매우 좁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저 필리피 군중과 행정관은 사도 일행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무언가 나쁜 일을 꾸미지나 않을까 하고 지레 짐작하여 나름대로 의로운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의로움의 기준은 하느님과 그 나라입니다.
그리고 심판이란 하느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스스로 밝혀지는 것으로서, 이 진리 편에 서면 비록 박해를 받을지 언정 하느님의 나라가 설 수 있지만 이 진리 편에 서지 않거나 박해자의 편에 서면 하느님의 나라가 가로막히거나 지체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법정에서나 죽은 후 하느님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일들만 심판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매 순간 어느 상황에서나 심판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진리의 성령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지구상의 모든 물체와 생명체가 중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에 빛이 아니면 어둠, 둘 중의 하나에 자리잡고 살아갑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느 법정에서 벌어지든 심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는 현실입니다. 필리피라는 도시나 감옥에서 바오로 일행이 수행한 선교 활동 역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30)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는 윤리적 행위를 법률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존재를 사랑으로 완성시키고자 행하는 심판입니다.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적 차원의 심판이요 개별 행위를 뛰어넘어 삶을 완성시키는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완성하시고자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거나 영혼이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기도 하고 또는 죽은 후의 세상에 가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부추기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의 심판을 앞당겨 실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당신이 세상을, 즉 그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이기셨다고 선언하셨고, 당신의 부활로 이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도 그분의 부활을 믿고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되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 죄 대신 은총을 누리고, 의로움의 길을 걷게 되며, 지금 여기서 받는 심판의 상급까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사탄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로 세상의 죄를 없애고 의로움을 행하며 사랑의 심판을 행하는 것이 선교 활동이요 복음화 과업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도 진리의 영을 받아야 하고, 교회가 받은 진리의 영으로 가르치는 것이 사회교리입니다. 실로 가톨릭 사회교리는 복음화를 위한 사회적 진리이며 우리를 부활의 삶과 행동으로 이끌어주는 나침반입니다.
첫째,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은 존엄하며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거나 천부적 인권을 유린하는 것은 죄입니다. 둘째,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 필요한 공동선의 혜택을 증진시키고 특히 여기서 소외된 이들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의로운 일입니다. 셋째, 모든 재화가 골고루 나누어지고 쓰일 수 있도록 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보편적 목적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 또한 의로운 일이며, 이를 위해서 재화의 소유와 사용에서 소외되거나 차별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사회의 공동선, 재화의 보편 목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등 이상 언급한 사회교리의 주요 원리를 실현하고자 서로 연대하면서, 특히 사회적 약자들도 주체적으로 사회적 공동선 실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 바로 이 세상에서 이미 행하는 사랑의 심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