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 옆 광고판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 대학교 광고였는데, 원래 그 대학은 개신교 신학교에서 시작해 종합대학이 된 학교다. 광고판에는 총장과 젊은 학생 몇이 함께 웃으며 대화하는 이미지에 여러 학과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학교로부터 출발해 인문학부가 유명했던 그 대학에는 이제 신학과 외에는 실용 전공 학과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조사한 2023년 우리나라 국민독서실태조사를 보면 1년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읽는 국민이 전체 43%(달리 말해, 전혀 책을 읽지 않는 국민이 57%)이고, 이들의 평균 독서량은 매년 3.9권이었다. 이를 온 국민으로 확대해 보면 우리 국민은 한 해 평균 1.67권을 읽는다는 말이다. 이는 전자책까지 포함한 수치다. 최근 'K-컬처'가 온 세계에 인기를 얻으며 문화강국이라 칭송이 자자하다. 그러나 독서량이 이 정도인 나라가 과연 문화강국이라 자부할 수 있을까?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독서 대중화와 출판을 위한 지원금조차 줄였다.
현대에 인문학은 교양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에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의 한가한 지식 자랑같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인문학의 근본은 사람과 인생에 대한 더 근원적인 관심이다. 이는 그저 지적인 호기심이나 당장 실용적 지식에 대한 관심과는 다르다. 일상을 살아가며 익숙하게 반복되는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당장 눈앞 현실이 세상 전부이며, 단편적 지식이 진실의 전부처럼 믿고 살아간다. 그러나 살다 보면 당연한 현상, 익숙한 사실이 무너지는 때를 만나게 된다.
그때 비로소 내가 익숙하게 보고, 듣고, 아는 게 과연 정확한가, 그리고 전부인가에 대한 근본적 의심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착각, 편견, 억측에 물들어 산다. 뻔히 보고도, 사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여기서 인문학적 질문이 시작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정말 사실일까? 내가 보고 있는 게 전부일까? 고대인들도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 뒤에 숨은 진짜 비밀을 알고 싶어했다. '만물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 무엇일까?'
고대인들은 거대한 우주나 자연계의 물이나 불, 공기 같은 물질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세상을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실제로 사람의 관점과 행동 여하에 따라 세상과 역사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사람에 대한 탐구로 집중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그러했고, 르네상스 이후 사람의 독특성에 집중하게 된 것도 그런 결과였다.
근대에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뭔가를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론이 지식인 중심으로 발전했다. 동양에서도 천체 원리나 제왕의 통치, 사대부 법도를 논한 학문이 지배계층의 윤리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본격화된 18~19세기는 신흥 자본가들에게 꿈의 시대였지만, 농민과 노동자 등 빈민, 서민들에게는 무자비한 노동과 빈곤한 생활을 견뎌야 할 고통의 시기였다. 당연히 시대와 인간 현실을 고민하는 철학자, 사상가들에게 이런 상황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유물론은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하려고 하기 전에 자기의 출신, 주변 환경, 지위, 재산 등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실제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하는 실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엥겔스와 짝을 이룬 카를 마르크스는 그 정점을 찍은 사상가였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이라는 책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치우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썼다.
사람의 가장 큰 극복 과제는 역시 사람이다. 문명과 세계를 더 풍요롭고 공정하게 바꾸려는 시도조차 번번이 좌절되는 이유는 사람이 정말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일어나는 일이다. 신분, 지위, 재산이 곧 자기인 줄 알거나 남이 하는 대로 대충 따라가며 안전하게 사는 대중성과 익명성이 결국 무지와 비인간화를 낳는다. 니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등은 주체성과 무서운 책임감을 피하지 말고 지금,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 것을 강조하였고, 그게 실존철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운동을 낳았다.
이처럼 현대는 갈수록 과학과 기술, 문명과 문화가 끝없이 발전하는 것 같았지만, 그 화려한 이면에는 오히려 우리가 뭔가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만 더 확인하고 있다. 절대적인 물리법칙만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지극히 큰 세계가 얼마나 상대적인지, 또 지극히 작은 미시의 영역은 얼마나 주변 자극과 영향으로 쉽게 달라져 버려 파악하기 힘든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철학도 당연히 여기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는 정확성, 명확성, 객관성 등에 기초를 두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우리가 잘 모름, 늘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해졌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 판단, 행동의 기초로 여겼던 언어와 개념 자체가 얼마나 부실한 토대 위에 놓인 건물인지 알게 되었다. 인문학의 기본 정신은 역지사지다. 내가 원하는 건 다른 사람도 원하고, 내가 피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구교형 광명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