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사도 22,30-23,11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2024.5.16.
오늘 복음은 부활시기의 막바지에 요한 복음이 집중적으로 전해준 대사제의 기도 결론으로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일치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일치하여 하느님 나라를 세우도록 하느님께 기원하시는 내용입니다.
진리가 믿는 이들을 일치시키는 요인이라면, 그 일치의 양상은 삼위일체를 원형으로 합니다. 즉, 삼위의 하느님께서 일체이신 것처럼 다양한 가운데에서도 일치를 이룩하는 소명이 교회에 주어져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믿는 이들을 갈라놓는 요인보다 일치시키는 요인이 훨씬 강하다는 전제 하에서, “필요한 일에서 일치하고, 불확실한 일에서 자유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보존할 것”(사목헌장, 92항)을 신자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마치고 들른 예루살렘에서 그 동안의 선교 활동에서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혐의로 최고 의회에 고발되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단 부활 신앙을 주장함으로써 험악한 유다인들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그 다음으로는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고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마지막 선교 여행 대신에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복안으로 2단계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자신도 바리사이 출신이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두가이 의원들과 바리사이 의원들을 분리시켜 최고 의회가 독자적으로 자신을 처형할 수 없게 만들고자 처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바리사이들이 믿어온 부활 신앙이란 세상 종말에 믿는 이들이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일방적인 희망을 일컫는 것에 불과했었습니다. 이는 믿지 않는 이들과 믿는 이들을 일치시키는커녕 갈라놓는 결과를 초래할 뿐 아니라 그 종말이 언제 올 지도 알 수 없고, 더군다나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란 입증될 수가 없는 신기루 같은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부활 신앙의 실체는 공동체를 이루는 생활 양식과 이를 전하는 선교 활동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지금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공동생활 양식을 여러 민족들에게 퍼뜨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사도 바오로도 그간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20여 년에 걸쳐 수행한 처지였습니다. 이를 통해서는 믿는 이들은 물론 가난한 이들과도 일치할 수 있었고, 이를 본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껴서 존경하게 되었던 경이적인 선교 성과를 체험한 바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로마제국마저도 복음화시킨 놀라운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본받고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표를 세운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공동체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를 추구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시절에는 믿는 이들의 일치를 촉진하는 일과 저해하는 일들이 뒤섞여 일어났었습니다. 전자는 이벽이 문중박해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활동을 계승하고자 이승훈이 교리 교육과 세례 성사를 전담하는 조직을 꾸린 일이었습니다. 이승훈은 이벽의 교리 교육과 세례 성사 활동으로 불과 1년만에 한양 선비 천 명을 얻었던 놀라운 선교성과를 계승하고자 강학회 출신 선비들과 대책회의를 열었고, 그 결과로 이들은 한국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섰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자임한 이들 평신도들은 모두 열 명의 선비들이었는데 이들의 공동 합의로 그들은 을사년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던 김범우의 명례방 집 대신에 정약전과 약용이 거처하던 회현동 집과 이승훈이 거처하던 명륜동 집에서 교리 교육과 세례성사로 천주교를 전하는 선교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여 실제로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1890년에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어 올 때까지 불과 6년(1785~1789년)만에 4천 명의 입교자를 얻는 엄청난 선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양반 출신 선비만이 아니라 중인, 상민, 천민과 부녀자 등까지 선교 대상을 확대하였고, 한양이 아닌 지방 출신들까지도 확대하였던 덕분입니다. 이토록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활성화되었던 덕분에 신유박해로 지도부가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 년의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구베아 북경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인 자신의 선교 노력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선 교회가 침체되었던 중국 교회와 달리 신앙과 선교 열기가 뜨겁다는 보고를 받고서는 자칫 하면 북경 교구의 통제는 물론 로마 교황청에 통제에서도 벗어날 수도 있는 이단 교회가 출현할까봐 몹시 걱정이 되어서 고압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내렸는데, 이것이 후자입니다. 성사를 열망하여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평신도 조직을 독성죄(瀆聖罪)를 범한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이라고 단죄하여 해체하라고 통보했던 것은 그래서였고,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미 반 세기 전에 중국에서 조상제사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내려진 조상제사금지령까지도 곁들여 통보해 버렸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자초한 폭거였습니다.
당시 교회법인 15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교회법상으로는 주교로부터 서품받지 못한 신자는 성사를 집행할 수 없었고 12세기 제4차 라테란 공의회 교회법상으로는 기혼 신자는 서품받을 수 없었던 규정을 구베아 주교는 원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오랜 6세기 칼케돈 공의회 교회법상으로는 평신도들이 선출한 지도자를 상위 교회 직권자인 주교가 서품을 거부한다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며 공동체를 세운 다음에는 현지에서 평신도들의 추천으로 지도자를 세우고 나서는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여 그에게 공동체를 맡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곤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을 행사한다고 해서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지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세속의 법 체계에서는 신법 규정이 구법 규정에 앞선다고 적용하지만, 교회의 질서는 가장 오래 전에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행위가 가장 권위를 지니고, 그 다음이 사도들의 선교 행적이며 그 다음이 교부들의 해석입니다. 칼케돈 공의회 교회법 제6조, "지도자 없는 공동체란 성립할 수 없다"는 규정은 공동체의 발언권과 선교적 책임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의 역할을 중시했던 사도들의 전통을 반영한 규정이었습니다.
트리엔트와 라테란 공의회의 교회법 규정만 적용했던 구베아 주교는 갓 태어난 교회의 신자들을 일치시키기는커녕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북경 교구의 이런 오래된 횡포 때문에 더 이상 북경 교구를 직할하던 포르투갈 국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교황청이 직접 아시아 선교를 관할하고자 일찍이 1658년에 파리외방전교회를 설립해야 했던 것이었으며, 1831년에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소 브리기에르 주교가 북경 교구 현지 당국으로부터 그 어떠한 도움이나 보호도 받지 못해서 길에서 병들고 굶어서 죽어 가야 했고, 1836년에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엥베르 주교가 조선교구의 주보성인은 북경교구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로 삼게 해 달라고 입국하기도 전에 교황청에 청원해야 했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는 시대마다 새로이 쓰여져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도 세상을 떠났고 상황도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역사는 재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에 앞서 이루어진 천5백 년 동안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과도한 권한 행사로 평신도 사도직이 위축되고 공동합의적 구조가 질식되었으며 성령의 이끄심을 알아보는 영적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무디어졌음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이루어졌던 공의회였습니다. 더군다나 그 공의회의 쇄신 여정을 이어 나가고자 '새 복음화'의 기치를 들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희년을 맞이하여 지나간 역사에서 가톨릭교회가 저질렀던 과오들을 인류 앞에 공개적으로 참회했지만 대단히 아쉽게도 여기에서도 아시아 선교를 대실패로 자초한 데 대한 참회는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에서는 이미 아시아 선교에 실패한 유럽 그리스도인들 대신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아시아 복음화가 새롭게 시도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되자면 이미 이루어졌던 평신도 사도직의 놀라운 선교 성과에 대한 율법적 단죄를 철회해야 하고, 오히려 그들이 간직했던 성사생활에 대한 열망을 본받아 계승함과 동시에 그 결과로 초대교회 시절처럼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을 이룩했던 교우촌 전통을 되살려야 합니다. 잘못 끼운 첫 단추부터 다시 제대로 끼워 맞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평신도들이 성사생활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그 성사적 은총으로 공동생활 양식을 이룩하며, 공동체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힘으로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의 역사를 바로 알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입니다.
이는 믿는 이들의 일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복음화 과업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서 만나게 될 동포들 즉 믿지 않지만 민족 화해를 바라는 이들과는 물론 북녘의 겨레와도 일치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민족의 복음화가 본 궤도에 올라서야 아시아의 믿는 이들은 물론 다른 종파를 신봉하는 이들과도 일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시아에서는 물론 인류를 진리 안에서 일치시키는 본격적인 한류가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따라서 다양한 아시아인들을 일치시킬 수 있는 열쇠는 기존의 선한 영향력의 바탕 위에 의롭고 거룩한 영향력까지 더한 복음적 한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