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 나의 복음화, 인간의 복음화
창세 3,9-15; 2코린 4,13-5,1; 마르 3,20-35 / 연중 제10주일; 2024.6.9
1. 말씀의 길잡이, 새로운 내적 인간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다시 맞이한 이 연중 시기의 후반에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할 우리가 가장 먼저 복음을 선포할 대상은 우리 자신임을 알려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라고 고백했는데, 오늘은 이 고백을 길잡이로 삼아서 제1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고백한 ‘외적 인간’이나 ‘내적 인간’이란 그가 복음을 선포하려던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을 겨냥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 체험하고 이룩한 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파스카 과업을 세상에서 이룩하기 위해서도 교회의 복음화가 전제되어야 하고, 또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는 일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각자는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 아마도 70억을 넘어 80억을 바라보는 수많은 인류 가운데 한 명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수치에 불과합니다. 주관적으로는 우리들 각자가 세상의 절반입니다. 내가 행복하면 세상의 절반이 밝아지는 것이고, 내가 불행하면 세상의 절반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것이고, 내가 죄에 물들어 있으면 지옥스러운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그래서 ‘나의 복음화’가 이룩되면 인간의 복음화도 절반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2. 원죄와 원 복음 이야기
제1독서에는 인류의 첫 사람들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조성하신 에덴 동산 한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셨는데, 생명 나무를 비롯한 모든 나무에서 자라나는 열매를 따먹어도 되지만 선악 나무의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도 경고하셨습니다(창세 2,9.16-17 참조).
그런데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창세 3장 참조). 선악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죽지도 않고 눈이 열려서 선과 악을 아는 하느님처럼 되리라는 꼬임이었습니다. 이 간교한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부끄러워서 알몸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물으셨고, 구차한 변명과 핑계를 대던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살던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결과, 첫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한 사탄에 대한 경고가 내려졌습니다. 바로, 사탄에게 적개심을 품게 된 하와의 후손이 사탄을 대적하여 그 머리에 상처를 입히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하와의 후손 즉 마리아께서 동정의 몸으로 잉태하여 낳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 맞서실 것이며 그의 머리를 부수실 것임을 암시하는 원 복음(元 福音. Proto-evangelium)이 되었고,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이 메시아께서 오시리라고 내다본 메시아 대망 신앙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후 아나빔들은 예언자들과 소통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라는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예언서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에 따라 교회는 마리아를 하와의 후손으로 믿고 가르칩니다. 그 근거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하와와 달리, 마리아는 동정의 몸으로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에 믿음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루카 1,38 참조) 또한 원죄를 범한 첫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경고하셨던 ‘죽음’의 벌로서, 이것이 현대인들을 광범위하게 물들이고 있는 무신론 사조의 실체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또 선과 악을 식별하게 해 주는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사실상 ‘죽어 있는’ 것입니다.
3. 나날이 새로워지는 내적 인간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는 또 이어서,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로마 5,17이며,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로마 5,21이라고 진정한 삶을 살게 해 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진술로 복음을 전해준 로마서는 사도 바오로가 말년에 쓴 편지입니다. 그러한 통찰과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도 사도로서나 선교사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었지만, 이 고생을 단지 억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영적으로 성숙해 나갈 수 있는 디딤돌로 삼았습니다. 그에 대한 고백이 오늘 제2독서에 나오는 이 표현입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이러한 바오로의 믿음과 깨달음을 이어 받은 4~5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노는 원죄와 원 복음에 대해 깊이 묵상한 끝에 오늘날까지 부활 성야 미사에서 울려 퍼지는 그 유명한 고백을 남겨 놓았습니다.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부활 찬송)
4. 사탄에 맞서시는 예수님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서 사탄, 즉 마귀와 맞서신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은 이런 경우를 두고 쓰는 말입니다. 그들은 해박한 율법 지식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뒤집음으로써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이 이에 관한 악소문을 퍼뜨렸고 예수님의 친척 형제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분께서 장성하신 후 출가하는 바람에 연로해 지신 성모님을 부양할 책임을 자신들에게 떠넘긴 데 대해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지, 그분께 대한 믿음이 도무지 없었던 데다가 귀까지 얇아진 친척 형제들이 이 고약한 소문을 성모 마리아께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걱정이 되신 마리아께서 그들을 앞장세워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는 곳까지 달려 왔던 것입니다. 소문대로 정말 마귀 들렸는지, 혹시 소문만큼은 아니더라도 혹시 미친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쫓아오셨겠지요.
이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예수님께서도 눈치 채신 듯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하셨던지, 어머니와 친척 형제 자매들을 나가서 맞이하시지 않고 대놓고 군중에게 반문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 이들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4)
예수님께서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로 가리키신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자 노력하는 군중이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예수님께서 어머니에 대한 결례를 무릅쓰고 하신 이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 마귀에 들려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악소문이 들려오는 사태가 복음 선포 활동에 끼칠 수도 있는 악영향이 퍽 심각하다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29)고 매우 강도높고도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 어머니인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셨고 그 뜻을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식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친척들에 대해 보이신 인간적인 태도에 주목하기보다는 마귀들의 준동과 이에 휘둘린 율법 학자들의 사악한 음모에 한 치도 물러섬 없이 맞서시려던 영적인 대결 자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에게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의 가족이라는 최상급의 격려를 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그분의 뜻이 실행되는 현실이야말로 마귀들의 준동을 예방하고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마귀 하수인들의 음모조차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내적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하여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지향과 처신을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면서도 조금도 또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견디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로 인용된 코린토 후서의 말미에서 그는 자신이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겪었던 고생에 대하여 담담하게 토로한 바 있습니다. “나는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2코린 11,23-28) 이런 사연을 배경으로 해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고 있다.”(2코린 4,16)고 담담하게 술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적 고생을 걸림돌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고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을 수 있는 은총으로 여겼습니다. 즉, “내적 인간으로 나날이 새로워지는” 디딤돌로 삼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첫 사람들이 넘어갔던, 또한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수시로 찾아오는 유혹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는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러니 첫 사람이 저지른 원죄(原罪) 이야기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모두 당면하는 실존 조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메시지는, 선과 악을 스스로 정하고자 함으로써 저지른 원죄의 결과로 인한 죽음, 즉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을 넘어서기 위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을 수 있다는 영적인 현실입니다. 그 길은 오직 사탄과 정면으로 맞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충실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리하여 나날이 새로워지는 내적 인간으로 부활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삶은 이미 죽음입니다. 영혼이 없는 것처럼 살거나, 내세가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자신의 복음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