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하느님께 돌아오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시리라”
신명 30,1-5; 에페 4,29-5,2; 마태 18,19-22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2024.6.25.
6·25 전쟁이 일어난지 74주년이 되는 오늘, 한국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냅니다. 보통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회복된 날을 기리는 법인데, 우리는 아직도 전쟁 중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날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 빨리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켜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며, 더 나아가서는 경제 협력과 문화 교류를 통해 한 세기가 다 되도록 갈라졌던 민족이 다시 동포 간 화해를 이룩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으로도 민족의 일치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2014년 8월 18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대성당에서는 오늘 이 미사와 똑같이 평화와 화해를 위한 지향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하는 미사가 봉헌된 바 있었습니다.
1. 교황의 강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미사는 첫째로, 또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한 가정을 이루는 이 한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 가운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청할 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마태 18,19-20 참조). 그렇다면 온 민족이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청을 하늘로 올려 드릴 때, 그 기도는 얼마나 더 큰 힘을 지니겠습니까!
오늘의 제1독서는 재난과 분열로 흩어졌던 백성을 일치와 번영 속에 다시 모아들이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것은 희망으로 가득 찬 하나의 약속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미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하나의 명령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 돌아와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신명 30,2-3 참조). 화해, 일치, 평화라는 하느님의 은혜들은 이러한 회심의 은총과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심이란,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의 삶과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미사에서,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이러한 약속을 한민족이 체험한 역사적 맥락에서 알아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 6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분열과 갈등의 체험입니다. 하지만 회심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긴박한 부르심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을 제시합니다. 그 도전은, 참으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질적으로 기여했는가를 점검해보라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여러분 각자가, 개인으로서 또한 공동체 차원에서, 불운한 이들, 소외된 이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많은 이가 누리는 번영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복음적 관심을 증언하는가에 대하여 반성하도록 도전해 옵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이제 의심과 대립과 경쟁의 사고방식을 확고히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한민족의 고귀한 전통 가치에 입각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도록 요청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이 말씀은 화해와 평화에 관한 예수님 메시지의 깊은 핵심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날마다 기도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용서야말로 화해로 이르게 하는 문임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형제들을 아무런 남김없이 용서하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근원적인 무언가를 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은총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불가능하고 비실용적이며 심지어 때로는 거부감을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무한한 능력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또한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분열의 간격을 메우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며, 형제적 사랑을 이루는 본래적 유대를 재건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한국 방문을 마치며 여러분에게 남기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 그 화해시키는 은총을 여러분의 마음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은총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의 공동체들 안에서, 그리고 국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힘차게 증언하기를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또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함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선의의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 이루는 우정과 협력의 정신 안에서, 여러분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이제 더욱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려져,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마침내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고귀한 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대화하고, 만나고, 차이점들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기회들이 샘솟듯 생겨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또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 관대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한국인이 같은 언어로 말하는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돌아오라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큰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땅 위에 우리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부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가장 풍요로운 하느님의 강복 속에서 참으로 기뻐하는 그 날이 오기까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 새로운 날의 새벽을 준비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2. 말씀의 초점
프란치스코 교황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강론에서 당부했다시피,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 나아가서는 통일도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에 따라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튼튼히 하며 우리네 인간관계에서 미움과 증오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사랑과 용서를 채우는 일이야말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지름길입니다.
오늘 미사의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신명 30,1-3)
제2독서인 에페소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당부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29.31-32)
마태오가 기록해 놓은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우리 안에서 먼저 마음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은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리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장담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3. 교회와 신앙인들의 사명
우리 교회는 분단 50주년이 되던 1995년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전향적인 목표를 민족 구성원들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제창하여 한민족 사회의 최고 공동선을 분명히 내세웠습니다. 이제는 증오가 아니라 화해를, 분단이 아니라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반공이나 멸공 같은 증오의 이데올로기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이념은 생존을 위한 체제의 도구일 뿐임을 명심해야 하고, 남쪽의 창의성과 북쪽의 자주성을 살리고 남쪽의 불평등과 북쪽의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지금부터 경주해 나가야 합니다.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끼리 공존하기 위한 지혜는 책에 써 있지 않습니다. 노력하며 경험으로 지혜롭게 헤쳐 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을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관점에서는 민족이 일치하고 흥하는 일도, 그와는 반대로 갈라지거나 쇠퇴하는 일도 하느님의 축복이거나 저주입니다. 오늘 독서인 신명기 30장의 말씀을 따라 우리 민족의 현실에 적용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이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그분께서 우리 민족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가엾이 여기시어 다시 모아 들이실 것입니다. 그래서도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시대정신을 명확히 정립하는 일입니다.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민족의 공동선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에서 발표한 담화문의 결론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겸손한 마음과 진솔한 회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현재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에서 힘쓰고 있는 ‘평화 교육’은 민족의 진정한 화해를 위한 구체적인 회심의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정복’하거나 ‘흡수’하려는 폭력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과 함께 변화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참된 일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것으로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무력 충돌이 더 자주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수많은 역사의 사례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1979년 제12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 참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을 실패의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어떤 노력도 소용없다고 여겼던 제자들은 낙담하였고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복음서는 죄와 죽음을 이겨 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화해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화해의 직분을 가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굳게 믿기에 결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이 시대에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
2024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김 주 영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