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아모 7,10-17; 마태 9,1-8 /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24.7.4.
우리 교회는 지난 6월 29일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낸 바 있습니다. 이 두 사도는 초대교회의 대표이면서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 복음선포에 헌신한 이름없는 사도들과 다수의 증거자들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보편 교회를 이끄는 역대 교황들은 모두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있으며, 모든 대륙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모두 바오로 사도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나, 교황이나 선교사나, 이들이 그러한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지만, 극소수의 권세가나 재산가 혹은 명망가나 학자 등을 제외하면 대개는 평범한 처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특별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조차도 공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대단히 평범한 생활을 하며 나자렛 성 가정에서 사셨습니다. 권력이나 재산, 지식이나 명예 등 세상에서 특별하게 보는 점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장애이거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평범하지만 경건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부르심을 듣고 제대로 응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독서는 평범한 사람이 하느님께 사로잡히게 되는 경위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모스는 본시 남유다 땅에 살던 농부였던 것 같습니다.(아모 7,12참조). 그리고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비옥한 평야 지대인 이즈르엘 평원에서 생업을 유지하며 살던 재야 출신 예언자였으며, 자신의 생업으로는 가축을 치면서 돌무화과나무를 재배하며 살다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자 성소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아모 7,15). 이것이 오늘날 교회 현실에 비추어 해석하자면 평신도 사도직 성소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는 아모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던 평신도들이 사도직에 이르게 되는 경위를 알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는데 중풍의 치유에 앞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이를 지켜보던 율법 학자들은, “이 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 하면서, 신성모독의 혐의를 두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신성을 지니셨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서 중풍을 깨끗하게 고침받은 그 사람이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에 매료되어서 믿음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였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이 중풍에 걸리는 원인은 면역력을 손상 당할 만큼 심한 스트레스를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억압당하고 소외 받으면서 받았던 상처 이상으로 인격을 존중받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수락과 환대의 체험이 필요하다고 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자연적인 면역력이 회복되어야 중풍에서 치유될 수 있었기에 먼저 죄의 용서를 베푸셨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죄란 그저 행위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억압받고 소외되는 처지에 놓이는 현상도 의미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숱한 가난한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 중풍병자는 죄의 행위를 범한 범죄자라기보다는 억압과 소외라는 죄의 처지를 당한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그를 데려온 정황도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1-8)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후 누구 못지않게 열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을 중심으로 모인 신자들 대부분은 여인들이건 남정네들이건 간에 예수님을 이렇듯 특별하게 인격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에서 받은 은총 덕분에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교회의 주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정과 직업을 포기하고 오로지 예수님만 따르던 제자들이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되었지만, 초대교회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익명의 사도들이 존재했습니다. 여인들도 남정네들도 다 그렇습니다. 중풍을 앓고 있다가 깨끗하게 나았고, 더구나 이를 치유해 주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신성모독혐의를 뒤집어쓰실 각오를 하신 덕분에, 죄까지 용서받아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오늘 복음의 그 사람도 익명의 사도가 되었을 공산이 큽니다. 사람을 사회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중풍인데, 이 병을 고쳐주시고 자존심과 명예를 되살려주셨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릇 믿음은 체험에 정확히 정비례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에서 겪은 체험의 역정을 보면 그가 지니게 된 믿음의 크기 또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하느님의 신적 능력으로 치유의 기적을 얻어 누렸음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아모스처럼 ‘하느님께서 부르셨다’는 고백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성모독의 혐의를 두어 살인 음모를 꾸미는 바리사이와는 정반대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복음에서 확인된 사실과 추정되는 사실에 비추어 아모스의 소명 체험을 알아듣자면 그렇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체험에 따라서는 믿음의 깊이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당부하셨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기록하기보다는 그 가르침에 따라 실행하는 데 더욱 힘쓴 사도들이 더 많습니다. 기록이란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도로만 남는 법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전례에 기록으로 남은 베드로와 바오로의 이름 뒤에는 훨씬 더 많은 익명의 사도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벽 뒤에는 적어도 열 명 이상의 강학회 출신 선비들이 있고, 김대건의 뒤에는 적어도 만 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있으며 최양업의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몇 십 배의 교우촌 증거자들이 있습니다. 정약용과 안중근, 장면과 김수환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실천하여 이름을 남긴 명망가들의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의 역사에서는 1등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느님의 역사에서는 믿음과 헌신으로 하느님을 증거한 모든 이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필리 4,3; 묵시 17,8; 참조: 마태 18,10) 마침 오늘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정상이 평화 통일을 향한 합의를 이룩한 날입니다. 52년 전 7.4 공동 성명이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명의로 발표되었을 때, 남북한에 살던 모든 겨레는 한마음 한뜻으로 열렬히 환영해 마지 않았었습니다.
이 성명에는 총 7개 항이 있으며, 쌍방은 1항에서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을 합의하였습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런데 공동 성명에서 합의한 제1항이 제일 중요한데, 그 해석에서 남북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차이가 남북 간 갈등과 대립의 원인이 되어 실현을 미루게 만들었습니다. 자주라는 뜻에 대해서, 대한민국은 남북이 당사자가 되어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가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토대로 하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외세 배격을 통한 자주로 해석하였습니다. 또, 평화라는 뜻에 대해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무력도발 포기와 상호 불가침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자주국방력 강화에 제동,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대단결이라는 뜻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의 바탕에서 민족적 이질화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반공정책 포기, 국가보안법 폐지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해석 상의 차이는 정치 권력 담당자들과 이들에게 부역하는 학자들 내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존재할 뿐, 남북한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만약 중요하다면 여론을 들어서 그 차이를 해소하면 그 뿐인 그런 사소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이런 차이가 공동 합의 자체를 무력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을 들자면, 애시당초 그 합의를 한 당사자들이 남북 모두를 막론하고 결정적으로 합의를 실천할 진정성이 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남북에 살고 있는 평범한 겨레의 통일 염원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던 음모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대한민국은 유신 헌법 체제로 돌입하여 박정희 1인 종신 집권 체제로 돌아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확립한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였습니다. 평범한 남북 겨레의 소박한 통일 염원을 빙자하여 대내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려던 사기극을 연출했던 셈이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무릇 권력이나 재산, 지식이나 명예 등 사회적 자산은 사람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은총이지만, 그 양심이 멍들어 있거나 죽어 있다면 십중팔구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가리는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성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 듣고 양심을 살아 있게 하는 데에는 더 유용한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정치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는 세상의 특별함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부르심을 알아 듣는 양심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모스가 그 증인입니다. 평범함에로 도피하지 마십시오. 이는 그분께로 나아가는 발판이요 도약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