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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옛 터전에 피어난 한 떨기 무궁화
2역대 24,18-22; 로마 5,1-5; 마태 10,17-22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 2024.7.5.
오늘 교회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시복 기념일을 맞이하여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치명하여 1925년 7월 5일에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박해 받던 19세기 백 년 동안 온갖 수모를 당하며 죽임으로 내몰리던 한국교회 순교자들을 대표하여 첫 사제가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으니, 박해의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승리한 기쁨을 전 교우가 나누게 하고자 한국교회는 이 날을 대축일로 지정했었습니다. 그런데 1984년에 첫 사제 김대건을 비롯한 순교 복자 103위가 성인품에 오른 데다가 2014년에는 이들보다 앞서 치명하신 124위 순교선조들까지 복자품에 올랐으니, 성인품과 복자풍에 오르신 분들을 포함해 모든 순교선조들을 9월 20일에 순교자 대축일로 경축하는 대신에 김대건 신부가 복자품에 오른 오늘, 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기리는 신심미사로만 지내게 된 것입니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서 십 년 동안 준비한 끝에 1845년에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살던 경기도 은이 고을에서 머물면서 교우촌에서 숨어 지내는 신자들을 찾아 사목하기도 하고, 선교사를 안내할 뱃길을 개척하려다가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에 반역죄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아 새남터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사제가 되어 불과 일 년 만에 스물여섯 살 나이로 치명하였습니다. 그 후 1857년에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문근 신부가 곡을 쓰고 최민순 신부가 가사를 붙인 287번 성가(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노래)에는 젊은 나이에 치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했던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가 한 편의 시로 녹아 있습니다.
1.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 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이렇게 시작되는 1절은 전반적으로 조선에 복음 진리가 들어오기까지 한민족이 겪었던 정신적 상황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서라벌 옛 터전’은 한반도, ‘연꽃’은 불교, ‘선비네 흰 옷자락’은 유교, ‘무궁화’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천주교를 각각 상징합니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과 진리를 빛과 밝음으로 섬기는 높은 정신풍토를 조성하고 있다가 통일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는 불교를, 조선의 시대에는 유교를 우리 민족의 대표적 되는 종교로 삼아 왔었는데, 연꽃이 이울고(즉, 시들고) 선비네 흰 옷자락이 어둠에 짙어 가듯이 기울었을 무렵 천주교가 한민족의 정신을 이끌어 줄 진리의 빛으로서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조선 후기에는 억눌리고 쌓인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여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동요하던 민심이 이반되던 그 시절에 참된 진리를 목말라 하던 선비들은 천주교를 들여와 진리의 빛을 겨레에게 비추임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고, 김대건 신부는 그 서광과 기대를 한 몸에 담뿍 안고서 피어난, ‘한 떨기 무궁화’ 같은 존재였습니다.
2. 동지사 오가던 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 앞에 닫혀진 조국의 문 겨레의 잠 깨우려 애타신 그의 넋이 이역의 별빛 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이렇게 이어지는 2절은 교황청에서 동양 전교를 위해 설립한 파리외방전교회가 마카오에 세운 신학교에서 김대건 신부가 어렵사리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의 길을 준비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는 이 땅의 역사에서 서양 학문을 처음으로 배운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에 도무지 어두웠던 조선 사회는 진리는 물론 인재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실학을 연구하다가 서학에서 진리를 찾은 선비들이 복음을 들여온 길이 동지사 길이었는데, 동지사(冬至使)란 해마다 동짓날 전후해서 한양과 연경 사이를 왕래하던 사신이었습니다. 장춘에서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도 이 길을 통해 일시 귀국할 수 있었으나 외국 선교사들을 동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는 외국인들에게는 국경을 닫아 걸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조선의 국운이 트일 수도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3. 해지는 만리장성 돌베개 삼아 자고 숭가리 언저리에 고달픈 몸이어도 황해의 노도엔들 꺾일 줄 있을소냐 장헐 쏜 그 뜻이야 싱싱히 살았어라
계속되는 3절은 선교사의 입국통로를 개척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부제 시절에 만주를 통해 압록강물이 얼어붙는 한겨울에 입국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만리장성이 보이는 만주 벌판이나 송화강 언저리에서 고달프게 방황하던 시절 돌베개에서 선잠을 자야 했고, 만주어로 ‘숭가리 올라’로 부르던 송화강 언저리를 배회해야 했었습니다. ‘숭가리’는 은하수를 뜻합니다. 육로를 통한 입국 시도가 실패하자 그 다음번에는 바다를 통해 입국을 시도하여 가까스로 성공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나서는 허술한 돛단배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에서부터 황해를 통해 표류하며 제주도 용수에 표착했다가 충청도 나바위에 극적으로 입국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4. 한강수 굽이굽이 노돌이 복되도다 열두 칼 서슬 아래 조찰히 흘리신 피 타오른 가슴마다 하늘이 푸르러라
4절은 치명하던 장면을 그렸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계시던 경기도 은이 공소에서 첫 미사를 드리고 6개월 가량 숨은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하는 등 짧은 사제생활과 사목활동을 하던 중, 조선에 선교하러 파견되는 후속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확보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황해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6개월 가량 문초를 받고 회유와 고문을 당한 후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백사장이었던 새남터의 건너편이 노량진인데, 그 옛 지명이 ‘노돌이’입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를 참수하던 당시 휘광이들은 일부러 잘 갈아놓지 않은 무딘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열두 번째에 가서야 목이 잘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조정의 박해가 잔인했는지 그리고 김 신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요?
5. 가신 님 자국자국 남긴 피 뒤를 따라 싸우며 끊임없이 이기며 가오리니 김대건 수선탁덕 양떼를 돌보소서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주소서
5절은 후대의 교우들이 김대건 신부의 영웅적인 순교에 힘을 얻어서 조국의 복음화에 힘써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수선탁덕(首先鐸德)이란 첫 번째 사제를 뜻하는 옛 중국 천주교회 용어인데, 천상에 계신 김대건 수선탁덕께 전구를 청하여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펴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사실상 우리의 다짐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박해를 이긴 신앙을 첫 번째 밑거름으로 삼고, 식민통치에 항거하던 독립운동의 의기를 두 번째 밑거름으로 삼으며, 해방 후 분단 상태에서 들이닥친 독재에 맞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양심을 세 번째 밑거름으로 삼아서,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이 화해한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복음의 진리를 꽃 피워달라는 당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가 이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기까지 밑거름이 되어 준 인물들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사제 성소의 은인으로서 조선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모방 신부는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소년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발탁하였습니다. 그 다음, 선교사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중국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주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교수 신부들이 있습니다. 김 신부가 남긴 25통의 서한들 중 대부분은 마카오와 페낭 신학교에서 신학과 언어와 학문을 가르쳐 준 교수 신부들에게 존경의 안부를 전하는 한편 선교활동을 보고하느라 보낸 것들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신앙의 은인으로서 조선 교회를 세운 창립 선조들을 들어야 합니다. 본시 김 신부의 집안은 충청도에서 4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가문이었고, 그 증조부되는 김진후 비오가 내포의 사도로 불리우는 이존창 루도비꼬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이존창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었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아 입교하였으므로, 김 신부의 신앙은 초기 신앙 선조들에까지 그 뿌리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전국에 세워진 교우들을 순방하며 실제로 ‘주의 나라’를 교우촌에서 실현하고자 12년 동안 사목한 목자가 최양업 신부입니다. 그를 기리는 경칭은, “길에서 살고 길에서 하느님을 만난’ 최초의 사목자입니다. 일년에 7천여 리를, 그것도 밤에 산길로 교우촌을 순방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해서 그도 역시 신학교 교수 신부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니, 김대건 신부는 비록 짦은 생애였지만 순교함으로써 교회의 주춧돌을 놓았고, 최양업 신부는 순교하는 대신 김 신부가 떠난 조선을 두루 다니며 사목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최민순 신부가 작사한 가사에 따르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 뒤를 따라야 할 우리에게 빛나는 모범이 된 것입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빛나는 모범에 이어 순교자의 신앙을 꽃피운 후예가 안중근 토마스입니다. 안중근의 시대에는 그 끔찍했던 박해가 종식되어 모처럼 신앙의 자유를 얻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해 와서 민족을 노예로 삼고자 광분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박해에 이어 일본제국주의가 또 다른 시대적 악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박해 시대에 조선 왕조에 대하여 치명으로 저항하던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이 침략 시대에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대해서도 목숨을 걸고 저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중근 토마스는 부친 안태훈이 명동 성당에 가서 얻어온 교리 서적 120여 권을 독파함으로써 신앙 선조들의 신앙을 배운 후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빌렘 신부로부터 부친과 함께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황해도 지방에서 빌렘 신부를 도우며 천주교를 널리 전하는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전교 성적이 전국에서 으뜸이 되어서 뮈텔 주교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국이 풍전등화의 운명처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하여 국운이 기울자 독립의병이 되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했고, 감옥에서 재판을 받으며 침략의 부당함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군사력을 내세운 이토의 극동평화론이 부당함을 밝히고 한중일 세 나라가 이룩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를 동양평화론에 담아 후대에 남겼습니다. 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가 그를 살인자로 단죄했지만, 그는 살인행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국제범죄를 저지르던 일본 제국주의를 회개시켜서 한중일 삼국이 공존번영하는 동북 아시아의 참다운 평화를 꿈꾸었던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안중근 토마스의 이러한 꿈은 백 년 후인 지금 아직도 유효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습니다. 민족 화해와 통일을 내다보는 이 시기에 동양평화의 꿈을 꾸었던 안중근 토마스는 남과 북은 물론 한중일 모두가 존중해야 할 동북아시아 복음화의 아이콘입니다.
요컨대, 김대건 신부가 꿈꾸었고 최양업 신부가 가꾸었던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일제의 침략 속에서도 안중근은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제 가까스로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나라는 남북으로 갈리어 민족은 전쟁까지 치른 끝에 70년만의 화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녘 땅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물론, 통일 코리아가 중국이나 일본과도 공존·번영하는 동북 아시아의 균형자로서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하는 일도 남은 몫입니다. 그러자면 남녘 땅에서 복음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기는커녕 상식 이하의 수준으로 민족의 미래와 평화를 사사건건 발목잡고 있는 일부 시대착오적 여론을 정상화시키는 일도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 일이야말로 두 분 사제의 전구를 청해서 더욱 도움받아야 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북녘 동포와 화해하는 일이나 일본 및 중국과 공존번영하려는 일만큼이나 이 남남갈등을 해소하고 극복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합니다. 시대를 달리하는 또 다른 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이 축일을 지내며 두 사제의 전구를 청하는 일은, 북한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종교적인 몫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그야말로 복음적으로 개척하는 민족 복음화와 동북아시아 복음화의 몫까지를 포함해야 하고, 이를 가로막는 새로운 악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메시아를 따르는 길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파스카를 위하여 우리 교회가 겨레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어야 할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치명을 앞두고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서 남겼는데, 오늘날의 우리 교우들에게도 도움이 될 듯하여 현대 우리글로 풀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마지막 회유문(誨諭文)
교우님들, 보십시오.
우리 벗님들! 생각하고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제자리에 놓으시고, 그 가운데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만드시어 세상에 내놓으신 창조주님과 그 뜻을 생각해 봅시다.
온갖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태어나서 우리를 내신 주님을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살아 있더라도 쓸데없을 것입니다. 비록 주님 은총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주님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니, 이름은 또한 귀하지만 내용이 없으면 그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태어나 입교한 보람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고 은혜를 거스르니, 주님 은혜만 받고 주님께 죄를 짓는다면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한 것입니다.
밭을 심는 농부를 볼 때, 때에 맞춰 밭을 갈고, 거름을 주며, 더위의 큰 고생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을 거둘 때가 되어 곡식이 잘 되고 여물면, 마음에서 땀 흘린 수고는 잊고, 오히려 즐기고 춤추며 기뻐할 것입니다. 곡식이 여물지 않고 밭을 수확할 때 빈대와 껍질만 있다면, 주인은 땀 흘린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을 내고 들인 노력이 생각나 그 밭을 푸대접할 것입니다. 이같이 주님께서는 땅을 밭으로 삼으시고, 우리 사람을 벼로 삼으시며, 은총을 거름으로 삼으시어, 강생 구속하신 피로 우리에게 물을 주시어 자라고 영글게 하셨습니다. 심판 날 거둘 때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좋은 결실을 보았으면 주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누릴 것입니다. 만일 좋은 결실을 못 본다면 주님의 자녀라 하더라도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친히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에서도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맹렬히 싸운다 하더라도 감히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 승천 후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곳곳에 수많은 간난(艱難) 가운데서도 발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조선에 교회가 들어온 지 50~60년 동안 여러 번 군란(窘難)으로 교우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오늘날 군란이 불길같이 일어나 많은 교우들과 저까지 잡히고, 아울러 여러분까지 환난을 겪고 있으니, 우리가 한 몸으로서 어찌 애통한 마음이 없겠으며, 육정에서 어찌 이별하는데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교회에서 말씀하시기를 “작은 털끝이라도 주님께서 돌보신다.”고 하시고, “모르심이 없이 돌보신다.”고 하셨으니, 어찌 이런 군란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이 아니면, 주님의 상과 주님의 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거룩한 뜻을 따르면서, 온 마음으로 천주 예수님 대장의 편에 서서 이미 항복받은 세속과 마귀를 공격합시다.
이런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마음을 게을리 하지 말고 오히려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해서 마치 용맹한 군사가 무기를 갖추고 싸움터에 나가는 것과 같이 싸워 이겨냅시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며 돕고,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환난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리십시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해서 주님의 영광을 밝히고, 조심을 몇 갑절 더하고 더해갑시다.
여기 있는 20인은 아직 주님의 은총으로 잘 지내니 설령 세상을 떠난 다음에라도 여러분은 그 사람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할 말은 많지만 어찌 편지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만 그칩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싸움터에 나아갈 테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서 만납시다.
진심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님들께!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기를 만나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 삼구(三仇)에 맞서 군란을 받아 참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 대사를 계속적으로 펴나가십시오.
이런 군란 때에는 주님의 시험을 받으니, 세속과 마귀를 물리쳐서 덕행과 공로를 크게 세울 때입니다. 부디 환난에 짓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고 영혼을 구하는 일(事主救靈事)에서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난날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많이 본받아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이며 자녀가 되었음을 증거하십시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으며 돌보고 불쌍히 여기면서, 주님께서 가련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십시오.
할 말은 너무도 많지만, 있는 곳이 마땅하지 못해 더 적지 못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 온갖 일은 주님의 뜻 아닌 것이 없고, 주님께서 내리신 상이나 벌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군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여러분도 이를 달게 받아 참으면서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서 빨리 평안함을 주시도록 기다리십시오.
제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여러분 육정과 영혼의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곧 여러분에게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상으로 보내주실 테니, 부디 서러워하지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후에 함께 영원히 하느님 앞에서 만나 길이 영복을 누리시기를 천번 만번 바랍니다.
잘 계십시오.
김 신부 사정 정표
(밝힘 : 2021년 6월 6일 김정수 대건안드레아 신부)
첫댓글 김대건 신부님의 온 마음이 고스란히 다 담긴 성가 287번 5절까지의 성가를 뜻을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하고 불렸습니다 죄송한 마음 가득 합니다.ㅜㅜ
이제라도 깊은뜻의 풀이로 제대로 알게 해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많은분들과 공유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