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사 6,1-8; 마태 10,24-33 /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2024.7.13.
오늘부터 독서로 이사야 예언서를 읽습니다. 아모스와 호세아 등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우상 숭배에 맞서 용감하게 활약했던 예언자들에 이어, 남유다 왕국에서 활약했던 이사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에 맞서는 한편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메시아로서 오실 희망찬 미래를 선포하고자 자원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5ㅁ)
이사야 예언서는 예언서 중 가장 길고, 적어도 3대를 이어서 형성되어 왔으며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꼭지라 할 수 있는 바빌론 유배를 전후한 시대에 쓰여진 까닭에 다양한 형식과 문체가 망라되어 있고, 메시지에 있어서도 이집트 탈출 이후의 고전적인 형식을 넘어서서 보편적이고 역동적인 신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예언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불리웁니다.
특히 오늘 들으신 대목은 이 예언서의 제6장이지만, 예언자로서 이사야가 소명받은 정황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사실상 서두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들을 비롯한 등장 인물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에서 대개 사양을 하는데, 이사야는 다릅니다. 매우 용감하게도 자신을 보내 달라고 자청한 것입니다. 참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응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응답한 모든 성소자의 귀감이라 할만하지요.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과 응답의 소명기사 가운데 마리아의 순명에 버금가는 용감한 응답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뵈었을 때,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이사 6,3ㅁ) 하고 외치는 천사들의 찬송을 들으며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며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ㄴ) 그런데 천사가 이사야의 그 입술을 정화시켜 주었습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 6,7ㄴ) 이렇게 자신이 깨끗해짐을 느낀 이사야는 다시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이사 6,8ㄴ)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응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방방곡곡으로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에 관한 교육을 본격적으로 펼치셨습니다.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마태 10,28)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까지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유형 무형의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안다고 증거하는 길은 사회의 질서와 관계를 하느님의 뜻대로 다시 설계해서 이룩하는, 이른바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과업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는 길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데 있고, 그분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도 그분을 드러내는 길은 그분의 뜻대로 사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공정과 정의의 질서를 이룩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으뜸가는 것은 만물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드러내서 재화의 보편 목적성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서를 통해 메시아로서 당신이 받으신 사명을 천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루카 4,18)
자본주의 사상이 사회의 주된 질서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사유재산 소유권이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재산을 기준으로 세상을 편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을 비롯한 가족이 생존하고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재산이 필요하고 이 재산을 마련하기 위한 노동의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공정하지 않고 분배가 평등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세상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는 지옥을 만들고 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재산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세상은 살기 어려운 지옥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진 것이 많아서 돈이 돈을 벌어주는 부자들에게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 부귀영화가 보장된 천국입니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구매력은 천국 입장권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주택이든 학교든 병원이든 문화시설이든 구매력 없는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자본, 즉 돈이야말로 현대판 우상이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현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우상으로 군림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사랑을 기준으로 최후의 심판을 하시겠다고 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2백40여년 전 이 땅에 복음 진리가 들어왔을 때 조선 민중이 천주교를 수용한 근본 이유는 천주교가 신봉하는 복음 진리가 부당한 신분질서를 단죄하고 만민평등의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양반과 상민과 천민이라는 신분이 대대로 세습되어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부정당하고, 양심의 자유도 없이 살아가야 했던 그 숨막히는 신분사회에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양심의 자유가 존중되고 만민이 평등하며 남녀가 동등하다는 사회적 진리를 구현하는 교우촌을 방방곡곡에 건설함으로써 이 민족의 역사를 앞당겼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신분차별은 사라졌지만 빈부차별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분차별을 사회악으로 인식하여 박해를 받을지언정 그 차별을 부인하고 진리대로 살아가려던 천주교의 정신과 의지는 순교성지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현실에서 복음 진리에 역행하는 빈부차별에 대항하려는 의식조차 발견하기 어려운 지금의 천주교 신자들을 보면서, 자괴감과 함께 복음 진리를 오늘날의 사회현실에 비추어 새로이 좌표설정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성경책에 인쇄되어 있는 글자로서의 하느님을 말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회현실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으로서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침에 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면 동쪽을 가리켜야 하지만, 저녁에라면 서쪽을 가리켜야 맞습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해는 동쪽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면 틀린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나설 수 있는 이사야의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때입니다. 사실 인간의 능력이란 하느님의 도우심에 비하면 사람마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는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다시 한 번 이사야의 응답과 예수님의 부르심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