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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쾌거’
현대불교신문 기사 입력일 : 2018.06.30.
기자명 : 신성민 기자
30일 제42차 세계유산위서 결정… 통도사 등 7곳 모두 올라
한국의 전통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8년6월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7곳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번 등재로 한국은 13개의 세계유산을 갖게 됐으며, 불교 관련 세계 유산은 ‘석굴암·불국사’와 ‘해인사 장경판전’에 이어 3곳으로 늘어났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가지는 “7~9세기 창건 이후 현재까지의 지속성,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이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기준(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4곳만 등재 권고를 모두 등재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은 지난 2013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올해 1월 세계유산 등재신청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된 이후, 1년 반 동안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심사를 받았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지난 5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7개 산사 중 연속유산으로서의 선정 논리 부족 등을 이유로 통도사,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4개 산사만을 등재할 것을 세계유산위원회에 권고했다.
이에 문화재청(청장 김종진)과 주유네스코대한민국대표부(대사 이병현), 외교부(장관 강경화)로 이루어진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 대한민국 대표단은 위원회에서 7개 산사 모두가 같이 등재될 수 있도록 세계유산 위원국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지지교섭을 해왔다.
그 결과, 6월 30일 오후에 있었던 등재 결정 논의 과정에서 위원국인 중국이 7개 산사 모두를 등재할 것을 제안하면서 21개 위원국 중 17개국이 공동 서명했고, 20개 위원국이 지지발언을 했다. 결국, 전체 위원국의 지지로 성공적으로 등재됐다.
佛 ·官이 합심해 이룬 결과
한국 전통산사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세계에 인정받은 이번 세계유산 등재는 조계종과 사찰, 문화재청,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노력한 결과다.
전통산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사업은 지난 2014년에 본격화됐다. 조계종은 지난 2014년 8월 6일 ‘한국의 전통산사 세계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날 발족식에서는 조계종과 문화재청을 비롯해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보은군, 공주시, 순천시, 해남군, 안동시, 영주시, 양산시 등 14개 기관과 세계유산 등재 대상 전통산사인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등 7곳 사찰이 등재 제반 사항에 대해 상호 협력을 다짐하는 협약이 진행됐다. 또한 등재를 위한 전문위원들도 10명을 위촉했다.
이후 등재추진위원회는 등재추진을 위한 국내·국제학술대회와 학술서 발행 등을 통해 최종 보고서 발간에 만전을 기했다.
전통산사 등재 이후 과제는
산사들의 세계 유산 등재 결정과 함께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산사 내 건물 등에 대한 관리방안 마련 △산사의 종합정비계획 마련 △등재 이후 증가하는 관광객에 대한 대응 방안 마련 △산사 내 건물 신축 시 세계유산센터와 사전에 협의할 것 등 4가지 사항을 보완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세계유산위원회는 비지정문화재까지 포함하여 산사 내 모든 구성요소에 대한 보다 강력한 보존과 보호관리를 주문한 것”이라며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사항을 충실히 수행하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의 세계유산적 가치가 잘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세계유산의 체계적인 보존관리를 규정하는 ‘세계유산법’ 제정과 세계유산관련 국제기구유치를 추진하고 있다”면서 “세계유산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세계유산 관리 인력 증원 등 인프라 확충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등 한국의 전통산사 7곳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
글로벌이코노믹 기사 입력일 : 2017-02-02
노정용 기자
[글로벌이코노믹 노정용 기자]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등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된다.
문화재청은 2일 '한국의 전통산사'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의 전통산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현지 실사를 거쳐 2018년에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문화재청이 신청하는 한국의 전통산사는 빼어난 경관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사찰로 꼽혀온 곳이다.
선덕여왕 15년(646)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양산 영축산 통도사는 수행불교(修行佛敎)의 중심도량이다.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 사리와 금란가사는 자장스님이 문수보살로부터 바로 전해 받았다는 종교적인 신비감을 준다. 특히 통도사는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라는 역사적 의의도 갖고 있다.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안동 천등산 봉정사는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만들어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이곳에 내려 앉아 봉정사라 불렀다고 한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보은 속리산 법주사는 법등을 밝힌 후 1500년 동안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남겼으며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불린다.
공주 태화산 마곡사는 가을 단풍이 유명하며, 순천 조계산 선암사는 임제선풍의 대쪽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온 청정도량이자 천년고찰이다.
대흥사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이다. 무엇보다 풍담스님으로부터 초의스님에 이르기까지 대종사를 배출했으며, 초의선사로 인해 우리나라 차문화의 성지로 불린다.
한국의 전통산사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지난 2011년 5월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전통사찰 세계유산 추진 전문가협의회'를 구성하면서 시작됐다. 협의회의 심사를 통해 7개 사찰이 선정됐고, 2013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문화재위원회는 지난해 8월 한국의 전통산사를 2017년도 세계유산 신청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등재 신청서를 보완하라고 요청한 바 있다.
한편 올해 7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개최되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는 서울 한양도성의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양산 통도사(梁山 通度寺)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
646년(선덕여왕 15) 자장율사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창건한 사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8년6월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등 7곳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개설
양산 통도사에 관한 역사 기록을 통하여 양산 통도사의 사격(寺格)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가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킴으로써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 도량(根本道場)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佛寶) 사찰로서 우리나라 사찰을 대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람 배치와 사찰 조경 측면에서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018년 1월 4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8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경위 및 변천
양산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 창건함으로써 창건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었고, 후에 금강계단 이라고 불린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 뒤 고려 전기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전기 선종 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拜禮石), 봉발대(奉鉢臺)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 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현황
양산 통도사의 가람 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있는데,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다.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上爐殿)과 중로전(中爐殿), 하로전(下爐殿)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普光禪院) 이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 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정(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한편 금강계단 불사리탑(佛舍利塔)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 태화사탑, 그리고 양산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불사리 계단이다. 양산 통도사의 특징은 불사리 계단에 있으며, 또 이로 인하여 불보 사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부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고, 내부에는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다.
상로전의 법당에는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應眞殿), 명부전(冥府殿), 삼성각(三聖閣), 산신각, 일로향각(一爐香閣) 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된 통도사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건물로서, 창건한 시기는 1677년(숙종 3)이며, 내부에는 석가삼존과 그 주위에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후벽의 탱화를 위시하여 내외 벽화는 주목되는 불화들이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 비로암, 자장암, 백운암, 축서암, 취운암, 수도암, 사명암, 옥련암, 보타암, 백련암, 안양암, 서운암 등이 있다.
관련문화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된 통도사 명부전은 1369년(공민왕 18)에 창건되었고, 1760년(영조 36) 춘파(春波)가 고쳐 지은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十王像), 탱화를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고려 후기의 삼대화상(三大和尙)인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1870년(고종 7) 영인(靈印)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현존 건물은 1935년 경봉(鏡峰)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의 내부 측면에는 「산신탱(山神幀)」, 「칠성탱(七星幀)」을 봉안하고 있으며, 산신각은 1761년에 초창된 이래 철종 대에 중수를 거친 사방 1칸의 건물이다.
중로전의 건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통도사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통도사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통도사 대광명전(大光明殿), 세존비각(世尊碑閣), 장경각(藏經閣), 해장보각(海藏寶閣), 황화각(皇華閣), 감로당(甘露堂),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 전향각(篆香閣) 등을 들 수 있다.
통도사 관음전은 1725년(영조 1) 용암(龍岩)에 의하여 세워졌는데, 내부에는 독존상으로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통도사 용화전은 1369년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주는 미상이며, 1725년 청성(淸性)이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역시 약 2m에 달하는 미륵좌상을 봉안하였다. 통도사 대광명전은 중로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불사리 계단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중국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 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르는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비신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1m이다.
개산조당(開山祖堂) 바로 뒤에 있는 해장보각은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는 고려 대장경 완질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寮舍)의 중심이 되는 감로당은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세워졌으나, 현존 건물은 1887년(고종 24) 덕명(德溟)이 중건하였다. 口자형 건물로서 약 86칸의 대소 방사로 이루어져 있다.
감로당과 가까운 원통방은 1341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존 건물은 감로당과 함께 탄해(坦亥)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화엄전은 창건이 1368년이며, 1762년에 중건하였고, 1882년 불타서 없어진 것을 1887년 구련(九蓮)이 중건하였고, 1970년 재건하였다.
하로전의 중요 건물로는 통도사 영산전(靈山殿), 통도사 극락전(極樂殿), 통도사 약사전(藥師殿), 만세루(萬歲樓), 영각(影閣), 범종각 등이 있다. 이들 건물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북쪽의 중심 건물과 그 좌우, 그리고 남쪽 앞면에 누각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하로전 일대의 건물군이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중심 건물은 통도사 영산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통도사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외 벽의 벽화가 주목받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하였다. 「팔상탱화」는 1775년에 그린 것이며, 「본존 후불탱」은 1734년(영조 10) 작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양식이나 구조로 볼 때 대웅전 건물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통도사 극락전은 1369년 성곡(星谷)이 창건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를 활주로 받치고 있는 아담한 법당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통도사 약사전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통도사 극락전과 동시에 창건한 아담한 맞배건물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통도사 만세루는 창건 미상이나 1644년 영숙(靈淑)이 중건하였다.
역대 조사(祖師) 및 양산 통도사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은 1705년(숙종 31) 처학(處學)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각은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상하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의 상하에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 대종(大鐘) 등 사물(四物)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석 예불 때 사용하는 의식 용구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凝香閣), 도서실인 명월료(明月寮)와 금당(金堂)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한편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으며,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불지종가국지대찰(佛之宗家國之大刹)’은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통도사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서 사찰 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된 불이문은 1305년에 창건되었으며, 편액 ‘불이문(不二門)’은 송나라 미불(米芾)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梁山 通度寺 大雄殿 金剛戒壇)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통도사 (지산리)
크기 : 정면 3칸, 측면 5칸
1997년 1월 1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통도사는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는 게 아니라 건물 뒤쪽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에 속한다. 금강계단은 금강석(다이아몬드)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란 뜻으로 부처가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이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고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통도사(通度寺)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45년(인조 23)에 다시 지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15칸 건물인데,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 내부의 기둥 배치가 특이하다. 앞쪽에는 동쪽으로 향한 평면 3칸 건물이 있고 뒤쪽에는 평면 3×2칸 건물이 남쪽으로 향하여 앞쪽 건물에 붙어 있는 형식이다. 이런 배치 때문에 지붕 모양은 특이하게도 정면을 향해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정(丁)'자형을 이루어 정면뿐만이 아니라 양쪽 측면에서도 박공 부분이 보인다.
이 대웅전은 독특하게도 사방에 모두 다른 이름이 걸려 있다.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모두 대웅전을 일컫는 말이다. 이 건물 동쪽과 남쪽의 돌계단은 양쪽 가장자리(소맷돌) 부분에 수려한 연꽃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 통상 불상이 놓여 있어야 할 불단에는 극락조. 청룡, 사슴 등 온갖 신비한 동식물이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의 북쪽으로는 구룡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통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금강계단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따랐다. 정사각형의 넒은 기단을 상하 이중으로 쌓고 가운데에 연꽃 모양의 받침돌 위에 종 모양의 사리탑을 봉안한 형태로 사리탑계단이라 불리기도 한다. 네 모서리에는 계단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서 있고 동서남북에는 석등이 세워져 있어 계단을 장엄하게 한다. 통도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법주사(法住寺)
종파 대한불교 조계종
창건자 : 의신 조사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
좌표 북위 36° 32′ 33″ 동경 127° 50′ 2″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역사
공민왕도 세조임금도 찾아온 명찰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은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공민왕이 직접 법주사에 와서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했다. 이때 사리를 모셨던 사리탑이 아직도 법주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도 법주사에 들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도와 절을 크게 중창했다. 조선 중기에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지닌 대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각성 스님이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했다.
1939년에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법주사 미륵불상을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했다.
문화재
법주사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유일한 고식(古式)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 다양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만 3점이고, 보물은 13점, 충북 유형문화재가 20점, 문화재자료 1점 등이다. 이외에도 법주사 자체가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 일원은 명승 제61호이다. 또한 천연기념물도 2점이 있다.
이 다양한 문화유산 가운데 법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나라 수많은 탑 가운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목탑으로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이다. 쌍봉사 대웅전과 두 기였지만 1984년에 쌍봉사 대웅전이 불타는 바람에, 목탑으로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팔상전 옆 사방이 트인 전각 안에 모셔진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도 법주사에만 조성되어 있는 보살상이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할 것을 서원한 보살이 희견보살로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신법 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은 불교와 관련 없는 문화재로 경종 3년(1723년)에 중국에 와 있던 쾨글러(I.Koegler)가 작성한 300좌, 3083성의 큰 별자리표를 관상감 김태서와 안국빈이 직접 배워서 그린 별자리그림이다. 쾨글러의 천문도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본으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아마도 영조 때 영빈 이씨의 원당을 만들고 이 병풍도 함께 하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자정국존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예다. 충혜왕의 명을 받아 국사의 반열에까지 오른 스님의 비문을 자연암벽에 새겨 놓았다.
대웅보전 뒤에 자리잡은 선희궁 원당은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원당이다. 청와대 옆 칠궁의 하나인 선희궁의 이름 그대로 절집 안에 후궁의 원당이 들어서 있는 특이한 예다.
지금 이 절에 있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목조 5층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하여 동쪽 암벽에 새긴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및 절 어귀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은 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들이다. 또 경내에는 고려 충숙왕 1년(1341)에 세운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비롯한 수십 개의 비와 부도(浮屠)가 있고, 높이 27m인 동양 최대의 거불이 1964년 6월에 점안식을 했다.
마지막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석옹이 있다. 현재 총지선원 왼쪽 40m 지점에 묻혀 있는 항아리 형태의 석조물인데, 문화재 전문가들도 용도를 알지 못하나 법주사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김칫독으로 사용했던 돌 항아리라고 한다.
또한 법주사 일원의 속리산은 대한민국의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종목 국보 제5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통일신라
소유 법주사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좌표 북위 36° 32′ 33″ 동경 127° 50′ 00″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 있는 석등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건립한 것으로 확인된다. 쌍사자가 마주 보고 서서 앞발로 중대(中臺)를 받들고 뒷발 밑에 연화좌가 있다. 중대의 둘레에 이중으로 연판(蓮瓣)을 새겼고 화대(火袋)를 팔각으로 하며 위에는 개석을 덮었으며 그 위에 보주(寶珠)가 있다.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3대 석등으로 일컬어진다. 높이는 3.3m이다.
개요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報恩 法住寺 捌相殿)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에 있는 조선시대 목조 5층 불탑. 목탑. 국보.
종목 : 국보(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5층의 높은 건물로 5층 옥개(屋蓋)는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이다.
건물은 각 면에 돌계단을 가진 비교적 낮은 석조기단 위에 섰으며,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돌리고 공포의 헛첨차는 기둥머리에 꽂혔다. 공포는 2출목(二出目)으로 출목의 끝은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나, 점차 형태는 조선 말기의 매우 장식적인 파련각(波蓮刻)을 가졌다.
2·3·4층의 공포는 모두가 기둥 위에 놓이기는 하나 다포(多包)집 양식의 공포이며, 5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평방(平枋)을 돌려 완전한 다포집 양식이 되었고, 공포는 주두(柱頭: 대접받침) 위에만 있으나 형태는 역시 다포집 양식의 것이다.
이와 같이 1층은 주심포(柱心包)이고, 2층 이상은 다포집 양식의 포작(包作)은,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나 쌍봉사 대웅전(雙峰寺大雄殿) 등 3층 건물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는 특수한 수법이다.
내부 가구는 평면 가운데에 심주(心柱)가 있고 모서리 안쪽에 귀고주[隅高柱]를 세웠으며, 2층의 모서리기둥[隅柱]은 1층 변주(邊柱: 변두리기둥)와 귀고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 세워졌다.
3층 역시 귀고주와 2층 변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 그 기둥을 세우고, 4층 변주는 귀고주가 바로 4층 변주가 된다. 이 귀고주는 심주와 대량(大樑)으로 연결되며, 5층 변주는 이 대들보 위에 서게 되었다. 심주는 기단 윗면 심초(心礎) 위에서 5층 옥개 밑 중도리까지 이른다. 이러한 가구방식은 금산사미륵전의 가구방식과 같은 계통의 수법이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報恩 法住寺 石蓮池)
종목 국보 제64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시대 신라 시대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보은 법주사 석련지(法住寺 石蓮池)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연꽃 모양 화강석제 석련지. 석련지란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신라시대 당시 물을 담아 연꽃을 띄워 두던 조경석을 뜻한다.
국보 제64호로 신라 33대 성덕왕 19년(720)에 만들었다. 법당인 용화보전이 있을 때 정면에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 세계 연화지를 상징하며 화강암으로 조각하였다. 석조물 여기저기에 꽃·구름·덩굴 등의 무늬를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높이는 1.95m이다.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위치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는데, 현재는 균열되어 철제 꺾쇠로 연결해 놓았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불릴 만하다.
보물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보물 제216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 보물 제848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보물 제916호
보은 법주사 괘불탱: 보물 제1259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1360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361호
보은 법주사 철솥: 보물 제1413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보물 제1416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보물 제1417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보물 제1418호
보은 법주사 동종: 보물 제1858호
시도 유형문화재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보은 법주사 석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보은 속리산사실기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보은 법주사 석옹: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보은 법주사 능인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보은 법주사 궁현당: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보은 법주사 가경구년명 철종: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
보은 법주사 선조대왕 어필 병풍: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보은 법주사 주서무일편 병풍: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보은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5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보은 문수암 산신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8호
보은 보은사 지장시왕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3호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
보은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불좌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5호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부석사(浮石寺)
요약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8년6월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등 7곳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종파 : 해동 화엄종
창건시기 : 676년 (신라 문무왕 16)
창건자 : 의상조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부석사 입장요금은 어른 2천원, 중고등학생 2천원, 초등학생 1천원이다.]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국보 3점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법당으로서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무량수’의 의미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징하는 무한한 광명(無量光; Amitãbha)과 영원한 생명 즉, 무량수(無量壽; Amitãyus)에서 온 것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과 더불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국보 제45호)은 높이는 2.78m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온몸이 금빛 찬란하여 매우 정교한 솜씨로 지어졌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소상(塑像, 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은 1962년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부석사의 범종루를 지나면 나오는 마당에서 안양루를 바라보면 희귀한 광경을 접할 수 있다.
누각 속에 부처님 여섯 분이 보인다. 실제 부처가 아닌 건물의 빈 틈이 그 뒷 건물인 무량수전의 벽과 어우러져 햇볕이 만들어낸 부처 즉, ‘공포불(拱包佛)’이다. 그 틈이 6개가 되다 보니 6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있는 착시현상이다. 근래 부석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햇빛이 강한 여름일수록 더 선명하게 보인다.]
[공포(拱包)
전통 목(木)건축에서 기둥 위와 지붕 사이에 있는 여러 목재가 끼워 맞춰진 부분을 말하며,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전달하는 부분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두공이라 하며, 이 공포는 줄여서 포라고 하기도 한다. 전통 한국 건축의 경우에는 포를 보고 건물의 권위와 세워진 시기 등을 추측할 수 있다.
주심포 건축은 보통 조선시대 이전인, 고려나 삼국시대 때 주로 썼던 양식이며 다포 건축은 조선시대 때 주로 사용했다.
기둥 위에만 포가 있다면 주심포 형식이라고 하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로로 놓인 창방 위에도 포가 놓인 양식을 다포 형식이라고 한다. 다포식은 주심포보다 지붕의 무게를 더 효율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어서 공포 자체의 화려함과 더불어 장엄한 팔작 지붕을 올리는 등 건물의 대형화에 적합하다. 주심포와 비슷하게 기둥에만 있지만 공포가 기둥 위에 얹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둥을 감싸고 밖으로 날개처럼 삐져 나와 있다면 익공이라고 한다. 일반 공포보다 간소화된 형태로 공포에 비해 화려함은 떨어지지만 기술적으로는 더 효율적이다.
포에서 기둥의 중심 밖으로 뻗어나온 목재를 출목이라고 하는데, 이 출목의 개수에 따라 1출목, 2출목…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는다. 외부에 있는 출목은 외출목, 건물 내부에 있는 출목은 내출목이라고 한다. 이 출목의 개수가 많을 수록 건물이 높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에 역시 건물의 권위와 관계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조계사 대웅전인데,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출목의 수가 더 많다. 조선시대에 이런 짓을 했다가는 큰 벌을 받았을 것이다.
건축학과 학생들은 '동양건축사'나 '한국건축사' 등으로 불리는 과목에서 필수적으로 외워야 하는 내용이다. 복잡한 구조와 부재의 이름을 모두 외워야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다. 일부 악랄한 교수들은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하라는 시험문제를 내기도 하고 일일이 나무나 스티로폼 등을 깎아서 모형을 만들어오라고 하기도 한다. 학생들에겐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조사당과 조사당 처마 밑의 골담초(骨擔草)와 조사당 옆의 취현암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은 대한민국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축물로서 내부에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스님의 상(像)을 봉안하고 있다. 본래 벽면에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그린 6폭의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1962년 지정)가 있었다. 이 벽화들은 무량수전 안에서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박물관인 보장각(寶藏閣)에서 전시하고 있다. 조사당 앞 처마 밑에는 의상스님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밑 땅에 꽂았더니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골담초가 있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 선비화(禪扉花)는 의상대사(義湘大師ㆍ625~702)가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밑 땅에 꽂아 자랐다는 나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ㆍ1575~1641) 시절 영남 관찰사 정조(鄭造)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에 탐을 냈다. 덕을 쌓은 수행자가 가졌던 ‘대사의 지팡이’를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이 나무 줄기를 잘라갔다. 순간의 욕망을 채운 그는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이 잎을 닳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득남을 간절히 원했던 아낙들이 줄지어 잎을 훑어가면서 이 작은 나무의 수난은 끝이 없었다. 관절염에도 좋다 하여 ‘노린’ 사람들 또한 많았다.
선비화가 ‘옥’에 갇힌 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보호받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딱딱하게 굳은 처마의 지붕 아래서 자라니 비와 이슬 한 모금도 구경 못했는데 이 나무는 잘 살고 있다. 누가 물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낮엔 해가 벗이 되어 줬고 밤엔 달빛이 동무되어줬을 뿐이다.
1300여년을 사람들에게 시달려 왔지만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오시는 날엔 개나리처럼 노란 꽃을 활짝 피운다. 놀랍다.
전해오는 말이 1300여년 지났다는 건데 그럼에도 나무는 고목이 아니다. 그저 손가락 굵기다. 키도 170cm 정도다. 누가 이 나무를 1300년 살아온 나무라고 믿을까.
7세기, 의상대사는 열반 직전 자신이 거처하던 부석사 조사당 처마에 중국서 가져온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나면 국운이 흥할 것이다. 나무가 살면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느니라”라고 했다. 그 나무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정말 그 긴 세월을 여기서 살아왔을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증언한 사람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 문에 기대니 /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린 것이라 하네 / 지팡이 끝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 비와 이슬의 은혜를 조금도 입지 않았네”
“擢玉森森依寺門 (탁옥삼삼의사문) /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 (장두자유조계수) / 不借乾坤雨露恩 (불차건곤우로은)”
부석사를 찾은 퇴계 선생도 이 작은 꽃나무를 두고 감탄한 나머지 찬양한 시 ‘선비화(禪扉花)’다. 그의 시가 이 나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때가 1548~1549년이니 이때 부석사에 들러 시를 지었다면 460여년 전에 이미 지금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기록을 시로 남겼다.
그 때도 지금 처럼 비와 이슬 한 방울 없이 스스로 물이 생겨 살고 있다고 밝혀 놓았다.
그런데 정말 물 한 방울 없이 나무가 살 수 있을까. 또 천년 넘은 나무가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한 대학교수의 분석에 귀 기울여보면 의문점이 좀 풀리려나.
이 선비화는 줄기가 계속 굵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면 죽고 새 줄기가 다시 나와 세대교체를 하며 생명을 이어간다고 한다. 여러 해 살이 풀과 같은 나무다. 그래서일까, 학명도 골담초(骨擔草)다. 나무인데 ‘풀 초(草)’자가 들어간다.
그럼 물 한 방울 없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이 나무는 비와 이슬을 맞지 않는 곳에 있다. 원래 건조한 땅에 강한 나무라고 하지만 물 한 방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뿌리를 길게 뻗게 했고 마침내 먼 곳에 있는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게 했다. 악조건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긴 뿌리를 뻗은 것은 마치 기린의 목이 긴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법이 있는 모양이다.
이 의문점을 풀어주긴 했지만 신비로움까지 다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선비화는 부석사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무량수전에서 삼층석탑이 있는 오솔길로 5분쯤 걸어 올라가면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 처마에 있다.]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壁畵)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 壁畵)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조사당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벽화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부석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곡사(麻谷寺)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태화산(泰華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사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8년6월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등 7곳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내용
마곡사가 위치한 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祕記)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 9)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田)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通度寺)·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한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교(極樂橋)를 사이에 두고 1984년 보물로 지정된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과 1984년 보물로 지정된 공주 마곡사 영산전, 천장의 무늬가 아름다운 1984년 보물로 지정된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강당으로 사용하는 흥성루(興聖樓), 해탈문, 천왕문, 16나한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명부전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요사채인 심검당(尋劍堂)이 ㄷ자형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또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碧眼堂)과 매화당(梅花堂)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염화당(拈花堂)·연화당(蓮華堂)·매화당(梅花堂) 등 승려가 거처하는 요사채가 매우 많다. 이들 건물 중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그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 한다.
또 대웅보전은 1651년에 각순이 중수한 것으로, 현판은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특이한 2층 건물로 조선 중기의 사원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며, 건물의 기둥을 안고 한바퀴 돌면 6년을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밖의 중요문화재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과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 1984년 보물로 지정된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1997년 보물로 지정된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197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곡사 동제 은입사향로,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곡사 동종 등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나 라마교 탑과 비슷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도난당한 지 오래이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은 전 국민의 3일 기근을 막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인도·중국 등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나갔다고 한다.
부속암자로는 심정암(深淨庵)·부용암(芙蓉庵)·북가섭암(北迦葉庵)·토굴암(土窟庵)·백련암(白蓮庵)·영은암(靈隱庵)·대원암(大願庵)·은적암(隱寂庵) 등이 있다. 이 절은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봄 경치가 뛰어나다. 백련암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특히 빼어나며, 북가섭암의 바위 뒤에 있는 천미장군수(天米將軍水)는 뛰어난 약수이다. 또 마곡사 앞 냇가 암벽에는 부여 고란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대흥사(大興寺)
천년고찰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8년6월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등 7곳은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제1대종사 풍담(風潭) 의심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의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 싸여 있으며, 크게 남원(南院)과 북원(北院) 그리고 별원(別院 : 표충사, 대광명전, 성보박물관)의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흥사 남원구역(南院區域)
두륜산의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 잡은 대흥사는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金塘川)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으로 전각들을 배치하였는데, 다른 절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전각들을 자유롭게 배치한 공간구성이 특징이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 두륜산 정상의 와불(臥佛)을 친견할 수 있다. 오른쪽의 두륜봉이 부처 얼굴이고 그 왼쪽 가련봉은 오른손, 노승봉은 왼손이며, 왼쪽 끝의 고계봉은 부처 발이라 한다. 그래서 전체 능선 모습이 두륜산에 누운 부처, 즉 臥佛의 모습이라고 한다.
정면에 전각들이 모여 있는 곳이 금당천의 남쪽에 해당하는 남원구역이다. 남원에는 중심 법당인 천불전이 있고, 용화당과 적묵당 등이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종무소, 동다실 등을 지나면 만나는 이층 누각 형태의 전각이 바로 대흥사 범종루(梵鐘樓)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 건물로 정면에서는 단층으로 보인다. 범종에는 '호국대범종(護國大梵鐘)'이라는 글씨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여느 범종과는 달리 다소 투박한, 그래서인지 조금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비천상(飛天像)이 장식되어 있다. 범종각 바로 옆으로는 대흥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품 느티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바로 '대흥사 연리근(連理根)'이다.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도 불린다. '삼국사기'와 '고려사기'에도 연리나무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연리나무가 나타나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吉兆)로 여겼다.
'대흥사 연리근'은 천년이 된 느티나무로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왼쪽은 음의 형태이며 오른쪽은 양의 형태로 언뜻 남녀가 천년을 사랑하고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이 함께 연리 나무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 하면 사랑의 소원이 성취되고, 사람의 마음 속에 바라는(사랑, 소원, 희망, 승진, 건강, 화합, 우정, 합격, 성공 등)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범종루를 지나면서 남원구역의 중심 법당인 천불전의 입구가 되는 가허루를 지나가는데, 가허루(駕虛樓)는 정면5칸, 측면 2칸의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남원의 출입문에 해당한다. 건물 중앙은 통로이고,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으며,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가허루 편액은 호남의 명필로 유명했던 원교의 제자인 전주 출신 조선 후기의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5)이 썼다.
보물 제1807호인 대흥사 천불전(千佛殿)은 조선 순조11년(1811)에 불탄 것을 완호스님이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팔작지붕 다포계통의 목조건물로서 높이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다.
천불전은 언제 어느 곳에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며 정면3칸의 분합문 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로 꾸며져 있다. 법당에 모셔진 천불상 조성과 관련된 일본표류 일화가 1821년 풍계 현정스님이 저술한 '일본표해록'에 전해져 온다. 이 천불은 순조 13년(1813), 천불전을 중건한 완호스님이 풍계대사에게 의뢰해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석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0명의 대둔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千佛을 완성했는데,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을 품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불(千佛)은 3척의 배에 실려 해남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長岐縣)에 닿았다. 일본인들은 이 옥불(玉佛)을 보고 기뻐하면서 절에 봉안하려 하였는데 꿈에 옥불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지금 조선국 해남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될 수 없다” 말했다. 할 수 없이 일본인들은 이 옥불들을 해남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때 일본인들이 옥불 밑에 ‘日’자를 새겨 넣었다. 옥불들은 경상도의 불교신자들의 꿈에도 나타나 몸이 추우니 가사를 입혀달라고 했다. 그래서 불자들은 천불전 천불상에게 4년마다 가사를 갈아 입히고 있다. 벗긴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천불전(千佛殿)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고 한다.
천불전이란 과거에도 천불, 현재에도 천불, 미래에도 천불이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으로,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건물이다. 즉,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나타낸 것이 바로 천불이다.
봉향각(奉香閣)은 가허루를 지나면서 마당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로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기둥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아 용화당보다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층 주심포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5칸이며 단아한 글씨체의 편액이 걸려 있다.
용화당(龍華堂)은 봉향각의 맞은 편에 있는 요사채로 정면8칸, 측면3칸 규모의 단층팔작지붕이며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이다.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의선사의 스승인 완호대사가 1811년(순조11)에 준공하였으며, 그 뒤 이용에 편리하도록 증축된 부분이 있다. 현판은 성당 김돈희(1871∼1936)가 썼는데, 그는 서화협회회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안진경, 황정견의 서법을 익혀 예서, 해서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천불전의 앞마당에는 맑은 약수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시원한 물맛이 이렇게 청량할 수 없다.
가허루를 지나면 적묵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는데, '관람객은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적묵당(寂默堂)을 중심으로 정진당(精進堂)과 세심당(洗心堂)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좌측으로 일로향실(一爐香室)이 있다.
원래 서산대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적묵당을 지나면 관음전이 자리잡고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관음전 대신 관음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관음전에는 33응신을 관세음보살 후불탱화 4폭에 담아 봉안하고 있는데, 33응신은 사찰에 따라 조각상으로 봉안한 경우도 있다. 관음33응신전이란 고통과 고난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은 때와 장소, 까닭을 막론하고 중생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 중생을 구해준다고 한다. 이를 응신(應身)이라 하며, 응신의 수는 경전에 따라 32신 또는 33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흥사 북원구역(北院區域)
이곳은 침계루 앞의 금당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원이라고 한다. 신라 말에 조성된 응진당 삼층석탑이 있으며 사찰에서 가장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북원의 중심인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편액이 걸려 있고, 백설당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무량수전 편액과 해사 김성근(1835∼1919)이 쓴 백설당 편액이 걸려 있어서 조선후기 명필의 필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김성근(金聲根)은 구한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그리고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직위를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이 올라있다.
현재 북원의 건물 대부분은 1899년 북원 일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대흥사의 남원과 북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당천(金塘川)에 놓여 있는 다리가 심진교(尋眞橋) 이다. 심진교를 건너면 침계루를 만나게 되는데, 침계루(枕溪樓)는 맞배지붕의 정면5칸, 측면3칸의 2층 누각식 건물이며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원과 북원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에 접하여 자리잡고 있는 2층 누각 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中庭)으로 출입하며, 대웅보전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침계루로 들어 가는 입구에 걸려 있는 침계루(枕溪樓)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동국진체 글씨이며, 반대편에는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역시 이광사의 글씨이다.
침계루를 지나면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ㆍ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고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한 투박한 수법이지만,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낸 충량의 용두는 불전의 신성함을 더하며 다소 과장된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후불벽 앞에 가설된 수미단 상부에는 목조 삼세불을 비롯하여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가 헌괘되어 있으며, 중앙 불단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ㆍ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 삼장탱ㆍ신중탱ㆍ칠성탱ㆍ감로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 대웅보전에는 영단을 비롯하여 수미단 우측에 근래 조성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 관음탱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 상부에 서수를 탄 동자들이 비천하는 목조각이 장엄되어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침계루에 걸린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梁文)’과 ‘대웅전중건기(大雄殿重建記)’를 통해 1667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육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은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는데, 여기에는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04년 제주도로 귀양 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현판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현판 대신 걸게 하였는데, 이광사의 글씨를 폄하한 자신의 오만함을 뉘우치고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다시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보전 바로 옆으로는 오색연등 아래 윤장대가 자리잡고 있다.
윤장대(輪藏臺)는 절에서 경전을 놓은 공간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이다.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는 의미가 있다. 전경(轉經)이란 경을 회전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처의 법을 법륜(法輪)이라고 하며, 부처가 법을 설하는 것을 전법륜(轉法輪)이라 한다. 법의 수레바퀴가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굴러갈 수 있듯이, 부처의 가르침 역시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든 곳에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법륜이라 하는 것이다.
윤장대는 오른쪽으로 세번 돌리며, 윤장대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고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대웅보전 옆으로 위치한 윤장대를 지나면 응진당과 산신각이 한 건물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전체건물은 정면5칸, 측면3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응진당(應眞堂)이 정면3칸, 측면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山神閣)은 정면2칸, 측면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이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응진(應眞)은 번외를 끊고 불법의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聖者)를 뜻하며, 응진당(應眞堂)에는 목조석가삼존(석가부처를 중심으로 문수, 보현보살)과 16나한, 판관, 사자, 인왕을 권속으로, 그 후면에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다.
응진당(應眞堂) 현판은 해사 김성근(1835∼1919)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대흥사 명부전(冥府殿)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이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보살로 남아있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열왕을 모시고 있어서 시왕(十王)전, 지장전, 또는 쌍세전이라고도 부른다. 정면3칸, 측면2칸의 조심포식 맞배지붕 건물은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뒤에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 권속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의 현판은 구한말 서예가인 해사 김성근의 글씨라 한다.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은 대흥사 내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통일신라 9세기 후반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신라 자장(慈藏)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탑의 규모는 조금 작으나 세련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마치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돌의 색깔이 무척 밝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 1점이 발견된 바 있다.
대흥사 별원(別院) 구역
무염지를 지나면 대흥사의 별원구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초의선사가 조성한 대흥사 무염지(無染池)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이라는 이름의 연못이다.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불의 기운을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 시 물 공급자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무염지를 뒤로 하고 조금 걸으면, 별원(別院) 구역에 속하는 성보박물관이 나타난다. 성보 박물관 입구에는 초의대선사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성聖寶博物館)은 서산대사 휴정의 유물(보물 1357호)을 전시하기 위해 1978년 문을 연 공간이다. 유물관 안에는 서산대사가 쓰던 벼루, 칠보염주, 신발 등을 비롯하여 승병을 이끌며 사용했던 승군단 표지, 소리나팔, 호패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서산대사에게 내려진 선조의 교지와 친서, 금병풍 등도 감상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양식의 탑산사 동종(보물88호)과 조선시대 양식의 태극무늬 동종 등도 있다. 성보 박물관 옆에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초의선사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성보박물관 건너편에는 '만월당(滿月堂)'이 위치한다.
만월당과 성보박물관 사이에 위치한 '문수전(文殊殿)'은 대흥사의 가장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전각이다. 문수전(文殊殿)의 현판은 학정 이돈흥 선생이 썼다고 한다.
별원구역의 남쪽에는 표충사구역이 자리잡고 있다.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서산대사는 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서울에 올라와 절에 기거하며 글과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명종 4년(1549)에는 승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유명한 산을 돌아다니며 후학들을 만나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묘향산에서 1,500여명, 그의 제자인 유정은 금강산에서 700여명, 처영은 지리산에서 1,200여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 평양 등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승려로서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받았으며 묘향산에서 선조 37년(1604) 입적하였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禪)과 교(敎)의 종원으로서 자부하였다. 이에 1788년에 사액사우의 건립을 추진하여 표충사로 지정되었고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表忠祠) 편액이 내려졌다.
표충사의 외삼문인 호국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보련각이 눈에 들어온다. 보련각은 초의선사가 1852년(조선철종3년)에 역대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처음 건립하였다. 1920년 이 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태능 (1562~1649)스님과 편양영기 (1581~ 1644) 스님의 법손들이 두문파의 선사 22위의 진영을 보련각에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내삼문인 예제문(禮齊門)을 지나가면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과 조사전이 보인다. 1669년(현종 10)에 건립된 표충사(表忠詞,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의 내부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동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처영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고, 1789년(정조 13)에 정조대왕이 하사한 ‘표충사(表忠祠)’ 편액과 ‘어서각(御書閣)’ 편액 2개가 걸려 있다. 표충사는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ㆍ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으며,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광명전 구역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광명전은 표충사 동쪽에 위치하며, 초의선사가 조선 헌종 7년(1841)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집이다. 내부는 불단이 있는 중앙부 위에만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을 높게 달고, 연꽃무늬와 구름·학 등을 그렸다. 초의선사가 직접 단청하였다고 하는데, 색채와 문양면에 있어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자연적인 곡선을 보이는 내부의 대들보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광명전 구역은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동국선원(東國禪院), 수심당(修心堂) 등이 있으며, 선원(禪院)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海南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종목 국보 제308호 (2005년 9월 28일 지정)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 북미륵암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海南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 북미륵암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바위면에 고부조(高浮彫)되어 있는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좌상으로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양감이 있고 유려하여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본존불의 육계(肉髻)가 뚜렷한 머리는 언뜻 머리칼이 없는 민머리(素髮)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다. 그러나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입을 굳게 다물어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니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유난히도 굵고 짧아진 목에는 두 가닥의 선으로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손(手印)과 발은 항마촉지인에 오른 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를 하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냘픈 듯 섬세하고 가지런히 묘사하여 사실성이 엿보임과 더불어 곱상한 느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그 주름은 거의 등간격으로 선각화(線刻化) 하여 사실성이 뒤떨어지고, 무릎 사이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마치 키를 드리운 것처럼 늘어지는 등 도식적(圖式的)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대좌(臺座)는 11엽의 앙련(仰蓮)과 12엽의 복련(覆蓮)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대좌로 두툼하게 조각되어 살집 있는 불신(佛身)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頭光)와 몸 광배(身光)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三重圓)으로 아무런 꾸밈도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火焰紋)가 장식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둔중한 체구로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본존불과 달리 경주 석굴암 내부 감실(龕室)의 보살상을 연상케도 하는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대흥사에는 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편액이 4점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침계루(枕溪樓),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그리고 천불전(千佛殿)의 현판 글씨가 그의 작품이다.
원교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양명학자, 서화가로, 소론 명문가였던 집안이 몰락하고 유배생활을 하게 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원교서결' 등 서예이론서를 저술하여 조선 서예사에 이론적 체계를 구축했고 조선 후기 서예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후기에는 자신만의 원교체를 만들었다. 그는 문인 취향의 산수화, 인물화, 초충도 등의 그림도 남겼다.]
[추사 김정희가 편액을 떼라고 한 까닭
대흥사 편액에서 얻은 깨달음 하나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11.05.24.
글 : 김대오(dae55555)
개교기념일을 맞아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해남 대흥사로 야유회를 갔다. 신록이 우거진 산책길을 따라 걸어 부처님이 누워계신 와불 형상의 두륜산 산 능선 아래 자리 잡은 대흥사 경내에 들어섰다. 서산대사가 입적을 앞두고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렵혀지지 않을' 해남 대흥사에 보존하라고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왠지 신성한 땅에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일본으로 떠내려갔다가 돌아온 옥불이 있는 천불전(千佛展), 1000년 사랑나무 연리근(連理根)도 모두 나름 의미 있고 멋졌지만 추사 김정희의 편액 이야기가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다.
헌종5년(1839년) 9월, 전라도 강진을 출발하여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는 초의(草衣) 선사를 만나기 위해 잠시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의 글씨를 보고 누가 썼냐고 묻는다.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라고 하자 촌스럽다며 당장 떼어 내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현판을 써 주며 대신 걸게 한다.
헌종14년(1848년) 12월 6일, 추사는 제주도 유배에서 해배된다. 8년 3개월 만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끝마치고 교분을 나누던 초의선사를 뵙기 위해 다시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쓴 현판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그 편액 속에 담긴 자신의 교만과 독선을 깨닫는다. 그리고 추사는 스스로 명필 이광사의 글씨를 못 알아보았으니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고 자신이 쓴 편액을 내리라고 말한다. 추사 김정희는 8년여 간의 힘든 유배 기간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타인의 부족함도 포용하고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지혜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추사는 대웅전 우측의 백설당에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글씨를 써 준다. 지금도 남아있는 추사의 편액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모두를 포용할 것 같은 자태로 대흥사 대웅전 곁을 지키고 있다.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의 사찰 편액이 적지 않은데 죽기 3일 전에 썼다는 봉은사의 경판전(經板殿)에 걸린 '판전(版殿)'과 영천 은해사(銀海寺)에 걸린 '대웅전(大雄殿)' 편액만이 직접 쓴 것이고, 다른 사찰에 걸린 추사의 대웅전 편액은 모두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어수룩하게 보이기 어렵다는 의미로 중국어에 '난더후투(難得糊塗)'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꼭 빼어난 재능을 휘두르며 뽐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알고 때와 장소에 맞게 자신의 처신을 올리고 내리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물이 깊으면 파도는 고요하고 배움이 넓으면 언성은 나직하다(水深波浪靜, 學廣語聲低)'는 이치를 추사는 어쩌면 고단한 유배기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는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품어 안는 그 깊은 성찰의 깨달음을 말이다.
대흥사를 내려오며 생각해 본다. 온 산을 물들이는 것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그 꽃을 받들며 피어나는 수많은 나뭇잎들의 푸르름이라고.]
순천 선암사(順天 仙巖寺)
지정번호 : 사적 제507호(2009년 12월 21일 지정)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종파 : 한국불교태고종
창건자 : 도선
별칭 : 해천사(海川寺)
선암사(仙巖寺)는 전라남도 순천시의 조계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백제 성왕 7년인 529년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해천사(海川寺)라고 부른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 경문왕 1년(861년)에 도선이 선암사를 창건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
고려 시대에 의천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천태종의 본거지로 번창했으나,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큰 피해를 입어 절이 거의 소실되었다. 복구도 늦어져 1660년에야 중창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전각 9동을 비롯한 총 65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전쟁 중에 불에 타서 소실됐다. 현재는 대웅전, 원통전, 팔상전, 불조전(佛祖殿), 강선루(降仙樓) 등 크고 작은 20여 동의 건물이 남아있다.
태고보우 조사의 가풍을 이어받아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선조사의 법맥상속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하여 2018년 6월 세계문화유산(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재됐다.
순천시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봄에는 매화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며, 겨울에는 동백꽃이 피어 사시사철 관광객이 많다.
문화재
대한민국의 보물 4점과 전라남도도 지정 유형 문화재 5점, 불교회화, 조각, 공예품 등 약 1천 8백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성보박물관이 2001년에 개관되었다.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선암사 3층석탑과, 보물 400호로 지정된 절 입구의 무지개다리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 불교 사상을 구현한 독특한 양식의 연못인 삼인당(三印塘)도 유명하다. 그 외 선암사 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등이 있다.
순천 선암사 대웅전(順天 仙巖寺 大雄殿)
대한민국의 보물 제1311호(2001년 6월 8일 지정)
수량 1棟
시대 조선시대
주소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802
좌표 북위 34° 59′ 47″ 동경 127° 19′ 52″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순천 선암사 대웅전(順天 仙巖寺 大雄殿)은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선암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웅전이다. 2001년 6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311호로 지정되었다.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보물 지정사유
선암사대웅전은 조선후기 순조 24년(1824년)에 중건된 팔작다포집 건물로 공포는 외3출목, 내4출 목,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 머리에 용머리장식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계보를 이룬 부안의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부안 개암사 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화려한 건축양식과 가구의 수법 및 포작의 장식성이 뛰어나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順天 仙巖寺 東·西 三層石塔)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395호(1963년 9월 2일 지정)
제작시기 신라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順天 仙巖寺 東·西 三層石塔)은 절 안의 승선교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좌우로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395호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암사 승선교(仙岩寺 昇仙橋)
대한민국의 보물 제400호(1963년 9월 2일 지정)
제작시기 : 조선
선암사 승선교(仙岩寺 昇仙橋)는 보물 제400호로, 길이 14m, 높이 4.7m, 폭 4m로 숙종 39년(1713)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 중심석 아래에 석재가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다.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선암사
조계산 기슭 동쪽에 자리 잡은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년)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짓고, 신라 경문왕 1년 도선국사가 선종 9산 중 동리 산문 선풍으로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하셨다. 반대편 서쪽 산 중턱에는 유명한 승보사찰 송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 주위로는 수령 수백 년 되는 상수리, 동백, 단풍, 밤나무 등이 울창하고 특히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또한, 절 앞에 아치형의 승선교가 있는데 (보물), 받침대가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며, 중앙부의 용머리가 매우 신비롭다. 대웅전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도(보물) 관광객의 시선을 끈다.
사찰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절의 하나로 보물 7점 외에도 장엄하고 화려한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로, 일주문 등 지방 문화재 12점이 있고, 선암사 본찰 왼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높이 7m, 넓이 2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800년 전통을 지닌 자생 다원,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잇는 조계산 등산로, 수정같은 계곡물, 울창한 수목과 가을 단풍이 이곳의 멋을 더해 준다. 또한, 선암사 인근에는 지리산과 백운산과 마찬가지로 고로쇠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매년 경칩을 전후하여 약수를 맛볼 수 있다.
* 선암사 칠전선원 *
전남 순천시 송주읍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 선암사에 있는 참선 장소.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칠전’이란 선암사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일곱 채의 건물군이다. 선암사 뒤편의 야생차밭에 800년이 넘는 자생 차가 군락지가 있다. 차 배지에서 생산한 야생차는 화개 차를 최상품으로 치지만, 순 자연산 야생차는 선암사 차를 최고로 친다. 선암사 야생차의 특징을 ‘구수하고 깊은 맛’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차나무가 삼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음지에서 자라 찻잎이 연하고 운무와 습한 기후가 깊은 맛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선암사 차를 맛보기란 쉽지 않다. 선암사 차밭은 규모가 크지 않아 수확량도 적고 귀한 대접을 받는다.
봉정사
위치 :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1. 개요
봉정사(鳳停寺)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에 있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대사(能仁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작고 아담한 절이지만, 산사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한국에 오늘날 남아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고려시대 지어진 국보 제15호 극락전으로 유명하며, 오래된 절인 만큼 이 외에도 국보 제311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등이다.
2. 가람
사실 극락전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결코 극락전이 중심건물은 아니다. 절의 중심은 엄연히 대웅전이며, 봉정사 대웅전도 국보 제311호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건축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극락전보다 못할 것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그 외에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했던 '영산암' 등 딸린 암자도 있다.
2.1.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대한민국 국보 제15호(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봉정사 (태장리)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이후 지금까지 서 있는 건물이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목재를 층층이 쌓아 만든 구조가 명쾌하게 보이는 한국 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오래되었으리란 추측은 있었으나 확실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건물을 해체수리하던 중 마룻바닥 부재 안을 파서 넣은 한지에 쓴 상량문(上樑文)을 발견하였다. 이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옥개(屋蓋)를 크게 수리하였으며, 조선 인조 3년(1625)에 중수(重修)하였다.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한 후 대략 100∼150년이 지나야 옥개를 크게 수리하므로 약 120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볼 근거가 생긴 것이다. 이는 13년 늦게 1376년에 중수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봉정사 극락전이 앞서 건립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므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엎치락 뒤치락 한다. 일반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을 가장 오래됐다고 하지만.
참고로 현재까지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것으로는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한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1.1. 비판
1972년과 2000년 이후에 해체수리를 했음에도, 검증도 안 된 방법을 쓰거나 부실하게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리고 복원전 모습과 지금 모습을 보면 과연 같은 건물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옛 사진자료를 보면 현재의 복원은 조선시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들을 제거하고 좀 더 과거의 원형으로 되돌리는 걸 목표했다고 추측되는데, 주남철(75) 고려대 명예교수는 극락전에서 잘못 복원된 부분을 5가지 요소로 집약했다. 정면의 띠살창호와 전면 툇마루, 내부 우물마루, 동서쪽 측면의 창호와 바람을 막는 풍판, 단청이 그것인데, 이런 건물의 부분 요소들이 고려시대 원형인지, 후대 변형된 것인지 확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모두 제거해버려 원형을 더욱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풍판이나 정면 띠살창은 함께 맞물린 여러 부재들의 흔적이나 접합된 결구 상태 등으로 미뤄 12~13세기 절의 원형을 간직했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해체 복원을 강행한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60년대 극락전의 본래 모습을 묻고 70년대 작위적으로 복원한 중국풍의 모습을 원형처럼 고착시켰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진한 화학안료로 단청을 새로 입혀버려서 오래된 느낌이 전혀 안 난다. 비슷한 연배라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비교하면 처참할 정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安東 鳳停寺 極樂殿)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봉정사 (태장리)
대한민국 국보 제15호(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봉정사(鳳停寺)는 672년(신라 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 중수상량문>등 발견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7세기 후반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安東 鳳停寺 大雄殿)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에 있는 조선전기 다포계 팔작지붕의 사찰건물. 불전. 국보.
대한민국 국보 제311호(지정일 2009년 6월 30일)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태장리)
2009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천등산 자락에 자리한 봉정사는 의상(義湘)대사와 그의 제자인 능인(能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봉정사 대웅전은 주불전으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집주1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1999년 대웅전 해체공사를 하면서 1435년에 쓴 「법당중창기(法堂重創記)」 등 4종의 묵서(墨書)주2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역사적 변천
봉정사는 1973년 극락전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1625년), 「천등산 봉정사기(天燈山 鳳停寺記)」(1728), 「양법당 중수기(兩法堂 重修記)」(1809년) 등에 창건 기록이 있다. 대부분 7세기 후반 의상과 능인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작성 시기가 가장 빠른 「법당중창기(法堂重創記)」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500여 년이 흐른 1435년(세종 17) 대웅전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봉정사는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경내에 있는 석조물들도 시기적으로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봉정사 대웅전은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극락전 상량문에는 1363년에 극락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비슷한 시기에 대웅전도 중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7년에는 영산회상 벽화(보물, 2009년 지정)가 발견되었는데 그림의 표현기법이나 색조가 고려 불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1999년 해체 보수하면서 대웅전 우측면 불단의 상판 하부에서 1361년 봉정사의 탁자를 조성했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대웅전의 건축연대를 고려시대로 올려보기도 한다.
봉정사 대웅전은 「법당중창기」(1435년), 「정면어칸기둥묵서」(1436년), 종도리주3 하부에 기록된 「대웅전개연중수기(大雄殿改緣重修記)」(1601년) 등을 볼 때 1625년(인조 3) 이전에 6번의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3차례 정도 중수를 거쳤으며 1809년(순조 9)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단청을 다시 하였다. 1963년과 1975년, 1996년에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1999년부터 이듬해까지 전체적으로 해체 보수하였다.
내용
봉정사는 동서로 긴 대지 위에 대웅전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영역이 구분되어 있다. 만세루 밑으로 들어서면 대웅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대웅전은 만세루와 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대웅전 앞마당을 향하여 화엄강당과 종무소가 마주보고 서 있다. 대웅전의 서쪽에는 극락전, 삼층석탑, 고금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자연석 허튼층쌓기주4 한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주5의 원기둥을 세웠는데 바깥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주6이 있다. 공포는 내외(內外) 2출목(出目)으로 심원사 보광전(1374년 중창) 및 서울 숭례문(1396년 창건)과 양식이 유사하다. 주두는 굽받침이 없으며 첨차는 소첨차와 대첨차를 사용하였다. 초제공은 쇠서가 없는 교두형(翹頭形)이고, 2제공은 쇠서가 아래쪽으로 힘차게 뻗은 수서형(垂舌形)이며, 3제공은 삼분두(三分頭)로 조각하였다.
가구 구조는 1고주(高柱) 5량(梁) 형식이다. 고주는 직접 종보를 받으며 측면 기둥열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려 세웠다. 이것은 구조를 고려하면서 불단 앞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 위한 수법이다. 대들보주7와 툇보주8는 고주에 결구시켰으며 2제공 위에 걸쳐져 보머리가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대들보 위에는 짧은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으며 뜬창방이 동자주를 잡아주고 있다. 종보 위에는 다시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쳤고 종도리 양 옆에는 솟을합장을 설치하였다.
창호는 정면의 경우 어칸에 4짝 분합문을 달고 좌우 협칸에는 2짝 띠살문을 2개씩 설치하였다. 측면에는 어칸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 모두 2짝 띠살문을 달았으며 배면에는 모든 칸에 2짝 판문을 달았다. 천장은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으며 불상 상부는 보개천장주9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주10이다.
특징
봉정사 대웅전은 일반적인 불전과 달리 정면에 툇마루와 난간을 시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도 복원하기 전에는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조적인 특징은 일반적인 팔작집과 달리 측면 기둥과 대들보를 연결하는 충량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가구수법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962년 지정)과 심원사 보광전 등 오래된 건축물에서만 볼 수 있는 수법이다. 또한 복화반(覆花盤)주11을 사용한 것, 공포재의 구성 형식, 종도리 하부에 솟을합장을 사용한 것, 예전의 부재로 보이는 굽받침이 있는 주두, 연화두형(蓮花頭形: 일명 쌍S자 곡선)으로 초각한 첨차주12 등에서도 오래된 건축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의의와 평가
봉정사 대웅전은 건실한 가구구조와 세부 건축 수법 등에서 초기 다포계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내에 남아 있는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 화엄강당(보물, 1967년 지정), 고금당(보물, 1967년 지정)과 함께 한국건축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목조 건축물이다. 내부에 있는 불단은 고려 말기인 1361년에 제작된 것이며 단청도 고려시대의 수법을 일부 간직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
3. 여담
1999년에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을 방문했을 때 하회마을을 방문한 것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곳 봉정사도 같이 방문했다.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 돌무더기에 여왕이 돌 하나를 얹고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2018년 5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권고 목록인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의 7개의 사찰 중 4개의 사찰만이 '등재 권고'를 받았으나 안동 봉정사는 당시 제외되었다. 제외 사유로는 역사적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았고, 특히 다른 4개 사찰에 비해 규모가 작아 제외되었다고 문화재청이 밝혔다.(링크) 하지만 봉정사가 가지는 가치가 크고, 특히 의상의 화엄종이 제창된 영주 부석사와 함께 중요한 역사적,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수덕사 대웅전을 포함하여 다포식 건축물의 특징을 가진 봉정사 극락전이 있으므로 문화재청에서 다시 등재 신청을 할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청의 노력과 설득을 거쳐 결국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한국의 산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봉정사를 주제로 한 가곡이 탄생했다. 봉정사에 대한 감흥을 담은 시에 작곡가 성용원이 노래를 붙여 소프라노 김지현이 불렀다. 봉정사
낙동강 휘감아 도는 천등산 기슭에
살포시 내려앉은 봉황을 찾아 나선다.
강파른 솔 숲길 따라 한걸음 오르니
고색창연한 만세루
허공에 달린 목어가 눈인사를 건넨다.
대웅전 팔작지붕 용마루
청기와 한 장 햇살에 반짝이고
천년의 신비 배흘림기둥에 서서
국화차 향기에 취하니 가슴에 꽃비가 내리네.
낙동강 휘감아 도는 하회마을을 지나
천등산 기슭에 내려앉은 봉황을 찾아 나선다.
강파른 솔 숲길 따라 한걸음 한걸음 오르니
가슴에 꽃비가 가슴에 꽃비가 가슴에 꽃비가 내린다.
(서영순 작시 봉정사)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경이 되는 절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영산암이 주 배경으로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한국 전통 산사 7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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