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ce homo(이 사람을 보라)!
윤석열이 탄핵재판에 참석했다. 역시 그는 뻔뻔했다. 그처럼 거짓말을 물처럼 하는 이가 또 있을까. 인간관계를 도외시하고 왜곡하는 이가 또 있을까. 그에게는 신의는커녕 깡패들의 덕목인 의리조차도 없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성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 말씀을 묵상해보라.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간이 노예라는 사실이다. 듣기가 거북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의 입장은 분명하다. 인간은 노예다. 다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두 주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 물론 될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된 사람들을 성서는 ‘카인의 후예들‘로 정의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카인에 대해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카인은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에덴을 떠났다. 그가 추방을 당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자신이 그 추방을 원했다. 하나님을 떠나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전지전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으면서도 하나님을 완전히 망각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아들의 이름과 그가 지은 성의 이름인 ‘에녹’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현실이자 정체성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런 ‘카인의 후예들’을 하나님의 사람과 구별한다. 카인의 후예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아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카인의 후예들은 그러나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반드시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다. 다시 말해 카인의 후예들은 재물의 노예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택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한다. 카인의 후예들과 마찬가지로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도로 카인의 후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재물은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삼는다.
나는 윤석열이 그렇게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정체성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가 하는 말 가운데 믿을 말은 없다. 동시에 그의 인간관계는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없다. 그는 깨어진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윤석열 본인은 그런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가 정말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재물의 노예로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재물의 노예들의 특성이다.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자아에서 찾는다. 재물은 인간의 자아를 부풀려 자신의 노예로 고착시킨다. 자아가 부푼 인간은 사랑할 수 없다. 자기의 유익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거짓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눈앞의 이익만이 보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신뢰도 보이지 못하는 인간관계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는 검사가 사적으로 권력을 사용한다면 그게 깡패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는 사적으로 권력을 사용하고 있고, 깡패들의 덕목인 의리조차도 없는 인간 행태를 보이고 있다. 바로 이 모습이 재물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의 전형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주인의 가장 명확한 특징을 구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들은 자아가 소멸된다. 이에 반해 재물이 주인인 사람들은 자아가 부푼다.
잘 생각해보라. 자아가 소멸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자아가 부풀기를 원하는가.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큰(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우문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문이다.
크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 그래서 누구든지 위대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섬김이란 봉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재물을 주인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서는 작은 자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위대한 자들의 이름은 소개하지 않는다. 이름이 소개되는 위대한 자들은(헤롯과 같은) 반면교사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다. 우리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눈 먼 걸인 바디매오를 안다. 성서는 가장 천대받던 하층민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그것이 인간 역사의 서사와 반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거지 나사로의 이름도 안다. 그리고 성서 기사의 주인공이 된 다른 여러 사람들 역시 작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노예들인 하나님의 사람들은 작은 자들이거나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아가 소멸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물(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력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을 따라간다. 힘과 영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다. ‘눈 감고 아웅’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9장에는 윤석열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헤롯이다. 그는 전형적인 카인의 후예로서 거짓의 사람이며 누구와도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라고 외친다.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
그의 주인은 재물이다. 돈과 권력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확인하라. 그리고 돌아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도 윤석열처럼 인간 말종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