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가난, 교회의 길
아모 7,12-15; 에페 1,3-14; 마르 6,7-13
연중 제15주일; 2018.7.14.
1. 제자 파견과 파견 수칙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불러 모으신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계셨기에 기왕에 시작하신 복음 선포 활동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시킬 겸 제자들을 사도로 훈련시키실 겸 해서 파견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견되는 제자들에게도 당신이 하시던 일, 즉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일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가난한 생활양식을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즉, 지팡이만 들고 가되 빵이나 여행 보따리나 돈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토록 철저한 가난을 명하신 이유는 당신께서도 평소에 그렇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을 따르도록 하는 동시에, 그렇게 하더라도 그들을 맞아서 환대해 줄 지지자들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행하시자 이에 대한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사람들이 몰려 왔고, 기적을 목격하고 또 그 혜택도 입은 이들이 자기 고장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믿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토박이 지지자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기록인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제자 파견의 원칙과 목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6-7) 하고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길 잃은 양들’이란 목자 없이 흩어진 양떼에 비유된 사람들으로서, 병들고 마귀 들려 소외된 가난한 이들을 말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열두 제자를 파견한 기사에 더하여 일흔 두 제자의 파견도 전해 줍니다(루카 9,1-6; 10,1-12 참조). 그러니까 애초에 파견된 열두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한 활동 덕분에 토박이 지지자들 가운데에서 예순 명이 더 합류한 셈입니다. 그리고 일흔 두 제자가 돌아와서 마귀들을 쫓아낸 활동을 보고하자 예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성령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혜와 슬기를 자부하던 사두가이들이나 바리사이들 같은 엘리트 계층으로부터는 거부를 당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지만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 들인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로 가라고 파견하셨던 원래의 파견 목적이 성취된 것으로 보시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2.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그런가 하면,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사제 아마츠야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살던 그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무법천지를 방불케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직 강대국 앗시리아가 일어서기 전에, 고만고만한 나라들끼리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 같이 힘을 겨루며 온갖 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보면,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타작기로 길앗 사람들을 짓뭉갰으며(아모 1,3), 가자와 티로 사람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이들을 모조리 끌고 가서 에돔에게 노예로 팔아 넘겨 버렸습니다(아모 1,6.9). 에돔 사람들은 칼을 들고 제 형제를 뒤쫓으며 무자비한 분노를 품었고(아모 1,11), 암몬 사람들은 저희 영토를 넓히려고 길앗 여자들의 임신한 배를 갈르는 죄도 저질렀습니다(아모 1,13). 모압 사람들은 에돔 임금의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들어 버렸고(아모 2,1), 동족인 유다 사람들은 주님의 법을 배척하고 우상에게 홀려 버렸습니다(아모 2,4).
그런가 하면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도 사람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 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 넘겼습니다(아모 2,6). 또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 길을 막았으며,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고 있었고(아모 2,7),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그 위에 드러누워 즐기고 벌금을 모아 사들인 포도주를 제사를 드려야 할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대고 있었습니다(아모 2,8).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았으며, 공정한 재판을 펴야 할 성문 앞에서 빈곤한 이들을 밀쳐 내기도 했습니다(아모 5,12).
이토록 불의한 무법천지에서 벌어지는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돌무화과 나무를 재배하며 양떼를 키우던 농부 아모스(아모 7,14-15)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시고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시끄러운 노래를 집어치워라(아모 5, 21-23).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아모 5,1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고 분부하시고,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복음적 가난의 생활양식을 철저히 지키라고 명하신 뜻도, 바로 아모스 예언자가 고발하는 시대적 사회악 현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정과 정의가 살아 있어야 억울한 이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고, 가난한 이들이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복음적 가난의 역사
또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자신이 전해 받은 계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내려 주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이라서 추상적으로만 들리는 이 심오한 계시가 그 당시 교회의 역사 안에서 실천된 바를 따라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나타났는지를 추정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에페소를 비롯하여 소아시아에 사도 바오로와 그 동료들과 후계자들이 건설한 공동체들은 작은 교회들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은 서로 수평적인 연대망을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교회 안에서 사제들은 신자들이 그 생활과 성품을 검증해서 선출했고, 사제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가정과 직업을 유지하면서 봉사직으로서 사제의 몫을 감당했습니다.
그 후 신자들이 늘고 공동체도 늘어나면서 사제들을 지도 감독하는 주교직무가 필요했졌고, 이들은 특별히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독신을 유지하면서 교회들을 순회하며 사목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더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유입되면서 신앙신조들을 확립할 필요를 느껴서 공의회들을 여러 번 열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신앙고백문이 공인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나 사제들에게 복음적 가난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은 당시 교회의 현실과 역사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로 간주되어 조문화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천 년도 더 넘게 흐른 오늘날에 와서는 고대 교회에서 당연시되었던 복음적 가난의 전통이 새삼 부각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침 오늘이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날입니다만, 그 당시 왕정의 편에 서서 국가의 부를 독점할 만큼 부유했던, 그래서 혁명을 지지하던 프랑스 국민에게 핍박을 당해야 했던 프랑스 교회가 근대에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많은 지역의 교회들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0세기 중반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희망이요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사목헌장, 1항)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일은 오늘날 정의평화 사도직으로 계승되어야 하며,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고 명하신 분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명제로 계승되어야 하고,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적 가난이라는 수칙을 명하신 것도 에누리 없이 계승되어야 합니다. 복음적 가난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고 계시하시고 이어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ㄷ)고 못 박듯이 말씀하신 뜻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교회 역사상 수없이 많은 실제 증거로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 역사적 교훈을 잘 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당시 한국교회에 당부했던 대로, 가난한 이들에 의한, 가난한 교회는 사도시대의 이상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려는 모든 시대의 교회가 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