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충고, 카파르나움에 내린 경고
이사 7,1-9; 마태 11,20-24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2024.7.16.
오늘 독서는 바빌론 유배 이전 시기에 활약했던 이사야가 불행하게도 앗시리아 왕국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될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남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알린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신탁(信託)의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남 유다 왕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이집트나 앗시리아 같은 강대국들의 우두머리들이 타고난 운명은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이사 7,4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고, 이런 헛된 힘에 기대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맡기고자 하는 시도 역시 헛되리라는 매서운 경고가 신탁의 첫째 메시지였습니다.
북방의 앗시리아든 남방의 이집트든 하나 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강대국이기 때문에, 이사야는 이 우상 숭배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주체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충고가 둘째 메시지였습니다. 그 경고와 충고의 뜻을 담은 예언이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 7,9) 이러한 이사야의 경고와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이스라엘의 북부 지방인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소문을 듣고 질병이나 장애 또는 정신적 상처를 치유받고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이들도 많았고, 심지어 이스라엘보다 북쪽인 해안 지방 티로와 시돈이나 요르단강 서쪽인 데카폴리스 지방에서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기꺼이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들을 직접 체험하거나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본 고장 갈릴래아 사람들이 회개하기는 커녕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특히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주민들이 더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교인들이 살던 티로와 시돈보다, 심지어 타락의 대명사로 알려진 소돔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으리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였을 것이고 소돔도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4) 이사야가 던진 매서운 경고보다 훨씬 더 매서운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흔히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는 말씀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셨다고 막연히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 활동의 근거지로 삼으신 카파르나움에 그분의 집이 있었습니다.(마태 4,13) 그러니까 지금까지 ‘예수의 마을’이라고 불리우는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선교 본부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로 카파르나움으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마르 2,1; 9,33) 그런데도 이를 목격한 그곳 카파르나움 주민들이 회개하지 않으니, 매섭고 강력한 경고를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을 증거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당사자들의 개인적인 내면 사정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이 속한 민족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이사야의 교훈이며, 특히 예수님께서 베푸신 각별한 관심과 배려에 보답하지 않고 기대를 저버리면 그만큼 더 가혹한 심판을 받으리라고 카파르나움에 내리신 경고입니다.
우리 교회가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을 전망해 보면, “제1천년기와 제2천년기 동안에 보편교회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온 ‘동방 제1교회’와 ‘라틴 제2교회’에 속한 서구 지역교회들이 더 이상 주도권을 행사하는 다수 교회가 아니라 쇠퇴해가는 소수 교회로 전락하는 데 비해,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제3교회들이 제3천년기에는 보편교회 안에서 섭정(攝政)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다수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3교회에 속하는 지역의 대다수 민중이 고질적인 빈곤과 만성적인 사회부조리로 말미암아 진통을 겪고 있고, 그 중에서도 아시아 교회들은 인구 대비 신자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 이슬람교나 힌두교, 불교 등 다른 전통 종교들의 위세에 눌려 현상유지에 급급한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일본이나 대만에서도 교회들은 나라 사정과는 정반대로 현상유지도 힘들 정도로 침체일로에 처해 있는가 하면, 공산 사회주의 국가들인 중국과 북한 교회들은 신앙의 자유를 크게 아니면 거의 전적으로 제약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적이고 아시아적인 교회의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지난 70년대 이래 높은 경제 성장력을 이룩한 사회 안에서 이례적으로 경이적인 외적 성장을 지속한 결과, 무려 500만의 신자들을 포용하면서 아시아 교회 안에서 필리핀 다음으로 공산 베트남과 함께 국민 대비 10%에 이르는 가장 높은 신자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아시아에서는 대규모의 본당, 회관, 학교, 병원, 복지시설 및 기타 시설을 다수 건립할 수 있는 재정 능력을 확보한 가운데 본당 사목과 사회복지 사목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70년대 이래 인권이 제약되는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하에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및 민주화 실현을 위해 투신하는 가운데 범국민적 신뢰를 받으며 사회적으로도 다른 어느 집단에 못지않은 높은 위상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며, 아시아에서 독보적으로 강력하고 드높은 위상을 사회적으로 확보하였습니다.”
따라서 1980년 이래 교황청은 물론 1999년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 모였던 아시아 주교들은 한국교회가 아시아 복음화의 본부 역할을 맡아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3천년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새 복음화는 민족 복음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국내적 사목을 겨냥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으로 아시아 내지 인류 복음화를 자기 본연의 새 복음화 목표로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심상태)
역사적으로 하느님의 기대는 여러 번 좌절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새 하느님 백성으로 불리운 그리스도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만일 제1천년기에 주도권을 쥐었던 동방교회나 제2천년기에 주도권을 쥐었던 라틴 교회가 이사야의 교훈과 카파르나움에 내린 경고를 유념했었더라면 인류의 복음화 진도가 앞당겨졌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에 이르러 한국교회가 처한 위상은 매우 중차대하며 “믿지 않으면 서 있지 못하리라”는 이사야의 교훈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았던 카파르나움이 받은 경고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7.8, 복음 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