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사 26,7-19; 마태 11,28-30 /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2024.7.18.
오늘 복음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보내어 당신 대신 복음을 전하게 하신 다음에 귀환 보고를 듣고 난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께서 하셨던 대로 이스라엘의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도와주는 한편 그들을 괴롭히던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사도직 활동의 결과로 제자들은 철부지 어린아이들처럼 복음을 순수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들을 만났고, 그 성과를 예수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셨는데, 아마도 그들이 직접 스승을 만나보고 싶어서 제자들을 따라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하시며,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지칭하는 복수 2인칭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리적 사정과 경제적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유다 지방은 척박했으나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갈릴래아 지방은 비옥했으나 권력에서 소외되었기에 비옥한 만큼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이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부재지주들이 소유한 땅에서 소작농으로 일해야 했던 농부들이 많았고, 포도원에서 뙤약볕을 받으며 땀 흘려 일해야 하는 일용 노동자들도 많았으며, 그리고 푸른 풀밭을 찾아 한뎃잠을 자면서 밤낮없이 양떼를 몰고 다녀야 했던 가난한 양치기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같으면 등짝에 소금꽃이 맺힐 정도로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야 하는 노동자 특히 정규직에 비해 열악한 임금과 처우를 감수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생산비도 보장되지 않는 농산물을 재배하고자 뙤약볕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농부와도 같은 처지에 놓인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찾아온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그들 가난한 이들의 땀과 고생, 번뇌와 슬픔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들 못지않게 가난하고 힘 없는 이의 처지에서 살아오신 분이 이제 이들과 함께 연대하며 살아가시겠다는 사회적 강생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하느님께 돌아온 이 가난한 이들이 초대교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려온 아나빔들이 비로소 희망을 찾은 것입니다.
이 감격적인 상황에 관하여 이미 오래 전에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해 놓았었습니다. “의인들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이사 26,7-8) 이사야가 내다본 이 ‘의인’들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하느님을 섬겨온 아나빔입니다.
다른 어느 예언자들보다도 선명하게, 그러나 뜻밖에도 고난을 겪을 메시아를 내다본 이사야는 메시아의 고난으로 인해 다가올 새 날과 부활의 미래를 이렇게 그려 놓았습니다.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이사 26,19)
이사야의 예언과 예수님의 사회적 강생 선언에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도 이렇게 호응하였습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사목헌장, 1항) 이러한 공의회의 선언과 가르침은 초대교회 시절 이래 실로 오랜 만에 교회가 복음적 선명성을 회복한 쾌거였고, 이에 따라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 안에서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로 투신하는 사도직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노동 현장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에게 교회가 관심과 사랑으로 투신하는 행위를 노동자 사목이라고 합니다. 사회의 다양한 구성 계층 안에서도 수적으로 가장 많고, 또 경제 발전과 생산에 가장 크게 기여하면서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전 영역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인간적인 목소리를 억제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그 사목 대상입니다. 경제 발전의 그늘 속에 묻혀 버린 이들 노동자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보잘것없고 외면당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애정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다가가셔서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노동자 사목자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어 짓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산업 사회의 그늘에서 인간의 권리를 빼앗긴 채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 가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합니다.(노동사목 의안, 3항)
노동자 사목의 목표는 첫째, 노동계에서 복음에 대한 증언을 하고 증거하는 사도들을 양성하는 것. 둘째, 복음에 비추어 노동관·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관을 밝혀주는 것. 셋째, 노동자 스스로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 권리를 증진시켜서 정당한 임금, 작업 환경 개선 등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단결권·단체 교섭권·단체 행동권을 주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넷째 노동자 사목은 평신도 노동자들을 주체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노동사목 의안, 4항)
조직되지 못한 비정규직에서 노동하는 빈민 노동자들은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세입자들이기도 하기에 주거 불안에서 해방되어 사회적 권리로서의 주거권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 더 부가됩니다. 이 빈민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은 빈민사목이라 불리는데, 여기서도 중요한 사목 목표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집 없는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조직하고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민사목에서는 집 없는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생활양식을 취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당신의 짐이 가벼우니,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분의 멍에는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것이며 그분의 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의 기운이었습니다. 그래서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볍다고 장담하신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하든,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세입자로 살아가는 빈민 노동자를 상대로 하든 그들을 동료들의 복음화를 위한 사도로 양성하기 위해서 공통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사목 과제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그분의 방식이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신앙과 앞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현존 영성으로만 우리의 멍에도, 노동자의 멍에도, 가난한 이들의 멍에도 가벼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부활 신앙과 현존 영성을 깨우쳐주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솔선수범하며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