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예레 1,1-10; 마태 13,1-9 /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2024.7.24.
하느님께서는 민족들의 예언자로 예레미야를 세우셨고,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오늘 말씀에 따르면, 오늘날 이 땅에 세워져야 할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할 일꾼들도 말씀의 씨를 뿌려서 영혼을 살리는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이거나, 또는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어서 곡식으로 육신을 먹여 살리는 농부들처럼 생명 산업 종사자들 가운데에서 부르실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연중 제16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자 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뜻을 따라서 오늘은 농민 사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 기적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그에 담긴 의미를 비유로 알기 쉽게 풀이해 주셨습니다. 양치기들에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주부들에게는 ‘누룩의 비유’를, 상인들에게는 ‘진주의 비유’를, 포도원 일꾼들에게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의 비유도 농부들 앞에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무릇 밭농사를 시작하자면 먼저 밭을 갈고 돌을 골라낸 다음 퇴비도 주어서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 놓고 나서 그 좋은 땅에 씨를 뿌리는 법인데,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도 씨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팔레스티나의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토양은 아주 비옥한 편입니다. 우리나라 농부들이라면, 척박한 토양에다가는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좋은 땅으로 만들어놓고 나서야 씨를 뿌릴 겁니다.
반만년 동안 우리 민족은 농사를 지어 왔고, 농업은 천하의 으뜸, 즉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불리었습니다. 토양도 비옥했지만 척박했던 땅도 그대로 두지 않고 좋은 땅으로 개간을 해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땅의 농민은 권력층과 부유층과 지식층 등 강자들에 의해서 수탈과 억압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는 양반 관료와 지주들로부터, 일제시대에는 토지조사사업 등 온갖 빌미로 수탈당하여 대다수 농민은 땅과 소출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고향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불완전한 농지개혁, 국내외 독점 자본에 의한 저곡가정책으로 희생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농민은 경제적 빈곤, 사회적 천대, 정치·교육·보건 등에서 소외를 받아 식량 생산자로서의 긍지를 느끼거나 보람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농민사목 의안, 4항) 그 원인은 단 하나, 농민들은 힘 없는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이나, 교수나 법조인이나 언론인 등 지식인은 물론 기업을 일군 재벌 총수 등도 죄다 농민의 자식이었지만, 정작 농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없었고 농업을 관장하는 정부 부서나 농업협동조합조차도 농민을 돕기보다 통제하는 일에 동원되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농민들은 로마식민통치로 인한 수탈을 당하면서 또 동족 안에서 가진 자·배운 자·힘센 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약자였습니다.(14항) 오늘 비유에서 농부가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리지 못하고,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다가도 씨를 뿌려야 했다는 현실은 팔레스티나의 토양이 척박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비옥한 토지는 다 빼앗기고 더 척박한 토지에 씨를 뿌려야 했던 탓도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북쪽에 위치한 갈릴래아 지방은 호수를 끼고 이즈르엘 평야라는 비옥한 토지가 있었던 반면, 남쪽에 위치한 유다 지방은 산악과 광야 지형이어서 농사를 짓기 어려웠지만 권력이 유다 예루살렘에 몰려 있었던 까닭에 갈릴래아 사람들은 유다 예루살렘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좋은 농지는 예루살렘에 사는 지배층·지식층·부유층 등 부재지주들이 차지했고 정작 갈릴래아 농부들은 소작농 신세이거나 더 척박한 토지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주로 농사를 짓던 농민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나 누룩처럼 작은 그 시작이 장차 커다란 나무나 부풀은 반죽처럼 큰 성취를 얻으리라고 내다보셨습니다.(16항) 그리고 그들부터 소유욕과 지배욕을 버리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보다 더 정의로울 것을 요청하셨습니다.(17항) 그리고 십자가로 부활하신 이후에,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초대교회의 신자들 안에 현존하셨습니다.(18항)
한국의 농민사목자들은 농촌에서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농민사목에서처럼, 구체적인 삶과 삶의 조건을 반영한 작은 현장 공동체가 뿌리내려야 함을 호소합니다. 말하자면 말씀의 씨앗도 좋은 땅에 뿌려야지 척박한 땅에다 뿌려서는 복음의 열매가 열리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좋은 말씀 토양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풍성한 복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이러한 공동체들이 성장하고 확산하며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나눔과 섬김의 하느님 나라가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0항)
한국교회의 모태는 농촌 공소였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정처 없는 피난길에서도 교우촌을 이루고 복음을 살았습니다. 한국교회 240여 년 역사의 반 이상은 현장 교회인 농촌 공소, 즉 농촌 신앙생활 공동체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60년대 이래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이농화의 물결이 밀어닥쳐, 농촌과 농민의 소외가 심화되면서 농촌 공소 역시 침체와 소멸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교회마저 도시화·대형화·물량화 추세에 편승해 왔습니다.(21항) 하지만 전체 농민이 도탄에 빠져드는데 농촌 공소만 활성화될 수 있는 묘안은 없습니다. 당연히, 전체 농민이 나아가야 하는 생명 공동체 운동을 선도하는 데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운동은 도농에서 모두 현장 공동체를 일구어서 연대함으로써 가능합니다.(49항)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꿈처럼, 그리고 농민사목자들의 꿈처럼, 장차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야 할 일꾼들, 하느님께서 부르실 그 일꾼들은 좋은 씨를 좋은 땅에 뿌려서 뿌린 씨의 백 배나 되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예레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