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1요한 4,7-16; 루카 10,38-42 /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2024.7.29.
라자로는 마르타와 마리아 두 동생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에서 지치실 때마다 라자로의 집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쉬시곤 하셨습니다. 생의 마지막 주간에도 이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그만큼 가깝고 편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열두 제자 일행을 대접하는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마르타의 수고로운 몫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으로서는 가는 곳마다 군중에게 환영을 받으시기는 했으나 주로 그들이 받았거나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혜택 때문에 받으신 환영이었지 그분의 말씀 때문은 아니었기에, 당신의 말씀을 들어주고 알아듣고 영에 의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말벗도 필요하셨습니다. 다행히 그 몫을 마리아가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라자로는 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으셨을 때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고 하시며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을 만큼 예수님과는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과 하느님 나라를 믿고 자비를 서로 주고 받으며 나누던 대표적인 토박이 지지자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요한 11,35) 만큼 슬퍼하셨고, 이미 무덤에 묻힌 지 ‘나흘’(요한 11,39)이나 된 그를 소생시키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각오하셔야 했을 만큼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때는 파스카 축제일이 가까운 무렵이었고,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만일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순식간에 그 소문이 퍼져서 파스카 축제에 모인 반로마적 성향의 군중이 예수님을 지도자로 내세워 폭동을 일으킬 공산이 컸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고(요한 11,43-44), 유다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들었으며(요한 11,53),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 마리아는 소생한 오빠를 위한 잔치에서 나르드 향유로 예수님의 장례의식을 미리 치루었습니다.(요한 12,7)
이토록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으시고도 이틀이나 더 미적거리셨고(요한 11,6) 결과적으로 그가 죽기를 기다리셨다가 소생시키신 의도는 바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부활 신앙을 일깨워 주시려고 라자로 소생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서 소개하는 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일곱 번째이며 마지막 표징이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비중과 의미가 라자로 소생 기적 사건에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전례가 던져주는 의미는, 마르타가 보여준 봉사의 자세와 마리아의 관상의 태도와 함께, 라자로의 소생 기적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시려던 부활 신앙의 중요성에 있습니다.
당시 많은 유다인들처럼 마르타도 부활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일이라고 있었고(요한 11,24 참조), 이는 가톨릭교회에서도 중세 이래 가르치던 전통 교리의 주요 내용이어서 오늘날 많은 가톨릭 신자들도 믿고 있는 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현재형 시제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요한 11,25-26)
마르타와 마리아와 그리고 라자로는 물론 이 사건의 전말을 바로 예수님 곁에서 목격한 열두 제자들도 이 말씀이 지닌 중대한 의미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더디었던 탓으로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실의와 충격에 빠졌던 것이며,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 부활 신앙을 다시 한 번 일깨우시고 한때의 불신을 용서해 주시자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과 부활 신앙에 대한 확신을 되찾고 놀랍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행전의 증언 기록이 이러합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사도 5,12) 이렇듯이 공생활 당시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사도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14)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위력적인 선교 성과를 거둘 수 있던 비결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라자로는 토박이 지지자로서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고, 마르타는 봉사의 달인이었으며, 마리아 또한 말씀을 통한 관상의 대가로서, 오늘날 평신도 사도직의 모범입니다. 특히 라자로는 제자들과 믿는 이들 모두에게 부활 신앙을 일깨워 주시고자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소생 기적을 일으켜 주셨던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를 다시 살리신 이 사건에 담긴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ㄴ-26)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