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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그 종당인 경수당기의 찬술에 대한 고찰.
儒碧 이선숙 승지공 34세
전 부산 북부교육청 교육장.교장
儒珍 이선동
서울 화수회 부회장/벽산회장.
승지공종회장. 박사과정수료
목차
1.시조공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
2.벽진장군 사실기와 경수당기 찬술 배경
3.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의 관계
본 논고에서는 벽리종인 후손 으로서 시조공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는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그 종당인 경수당기가 기술된 배경에 대해서 고찰하고, 두분의 가문관계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의 찬술 년도를 살펴보면,
1864년에 경수당기가 먼저 찬술되고, 1년뒤인 1865년도에 이총언 사실기가 찬술되어 1년의 기간내에 벽진이씨 시조공에 대한 사실기와 그 종당인 경수당기가 찬술되어 후손에게 전해져 오고있다.
벽진이씨 시조공 고려 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께서는 신라말기 858년에 태어나서, 고려 초기인 938년 별세를 해서 향년 81세수를 누리셨다.
금년이 시조기로 1167년이 되는 해로서 오랜 세월를 거쳐오는 동안에 그 후손들이 시조공및 선조님의 벽리 얼과 정신을 잘 받들어 오고 있다.
벽진장군 이총언에 대한 사실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및 동국여지승람 등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 더이상 언급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공의 후손으로서는 세월이 더해가면서 더욱 번성해서 우리나라의 대성이 되고, 고려조와 조선조에 명현과 거공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를테면, 대제학 견간, 문정공 극송, 도원수 희경, 전서 존인, 정간공 맹전, 평정공 약동, 판서 승원, 성산군 식, 대사성 철균, 좌찬성 승언, 정도공 장곤, 승지 언영, 참의 석경, 세마 후경, 노파 흘, 충숙공 상길, 충강공 상급, 감사 상일, 현령 세옥, 효헌공 세환, 봉조하 세근등이, 혹은 문장이나 학행으로 드러났고, 혹은 청백이나 절의 또는 사업으로, 명망이 당시에 나타나서 성문이 후세까지 널리 전해지고, 그밖에도 명현과 석학이 또한 많이 배출되었다고, 1865년 화서 이항로선생이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에 기록되어 있고. 근대에서도 사회의 저명 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덕망과 명망있는 대성의 가문으로 이어오고 있다.
다음은 경수당기에 대한 내용이다. 벽진장군의 옛 봉토였던,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1826년 지금의 자리에 작은 집을지어 시조공 단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준비와 숙소용으로 사용했다.
재사가 소박하여, 감 한채와 당 한채가 있는데, 서감은 두 칸 장방으로 운곡의 곁 이천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 한 자의 편액도 없으니, 동감은 화수헌 이라 현판을 달고, 서감은 경수당 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 두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이라, 크게 써 붙였다.
그후에 1864년 고종 원년인 갑자에 본당에 보소를 설치하고, 다음해 甲子譜 17권의 족보를 완간하고, 그 여력으로 시조공의 유허비와 표갈을 세워 경수당이 벽진이씨의 성지임을 대내외에 표방 하였다. 이에 후손 일하정 이학준공께서 족보 편찬일로 오래동안 경수당에 머물면서 시조공및 선조님의 얼과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기서 경종수족의 마음으로 경수당기를 찬술하였다.
이후로부터 200여년 동안 경수당을 가꾸고 발전을 시켜서, 현재의 번듯한 시조공 종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수당은 1당, 1각, 2사, 1청, 2재, 2문의 건조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명칭은 유허비각, 비현사, 세덕사, 전사청, 양정재, 근성재, 숙정문, 숭상문 이다.
유허비각은 좌측에 유허비를, 우측에 사마구가 안치되어 있는 비각이며, 진입로 양측에는 석등, 장군석, 사자석등을 각 쌍으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비현사는 으뜸을 나타내며, 시조공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이고, 세덕사는 대대로 쌓은 아름다운 덕이란 말로, 2세에서 10세까지의 선조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전사청은 향사를 위해 준비한 제수를 봉하는 곳이고, 숙정문은 사당권역에 출입하는 문이며, 양정재는 동재로 제관이 머무는 장소이고, 근성재는 서재로 대종회 회의장이며, 숭상문은 경수당 정문이다. 이들 건조물 전체를 경수당이라 한다,
매년 음력 10월 3일 제향를 지내면서, 시조공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종중의 구심점으로 삼아 오고있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를 기술한 당시의 두분 공에 대한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기술된 경수당기는 1864년에 평정공계 승지공 후손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이 연세 66세때에 벽진이씨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를 기술하고, 그후 7년뒤인 1870년에 경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촌에서 별세했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는 1865년에 평정공계 직장공 후손 27대 화서 이항로선생이 연세 73세때에,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경종수족의 마음으로 기술하고, 그 마음을 고이 간직 한채로 3년뒤인 1868년에 경기도 양평군 서정면 통정골에서 별세했다.
두분 공께서는 일생의 모든 삶이 마무리되어 가는 가장 원숙한 시기에 벽리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고, 또한 경종 수족의 마음을 담아서 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를 기술한 화서 이항로선생은 당대에 명문대가의 성리 학자요, 후학으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는등, 국가에 많은 공헌을 함으로서 역사적으로 훌륭한 명성을 받아오고 있다,
화서 이항로선생은 1792년 출생해서 1868년에 사망했으며,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로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출생이며.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초명은 광로(光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세때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다. 1808년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를 단념 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184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揮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64년 조두순(趙斗淳)이 천거하여 장원서별제, 전라도사, 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사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가 되어 주전론을 적극 주장 하였고,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경연관 으로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경복궁 중건 및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재건한 삼대가 이시다.
화서 이항로선생의 사상(思想)은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주리론(主理論)을, 우주론(宇宙論)에 있어서는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에 반대하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 섰다. 즉 理와 氣를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하여 理가 主가 되고, 氣가 役이 되어야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요, 한국 역사상 보기드문 민족교육자 (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들에게 역설, 춘추대의 (春秋大義)를 주장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내세워 민족 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양헌수(梁憲洙). 유중교(柳重敎). 박문일(朴文日). 유중악(柳重岳). 박문오(朴文五). 이근원(李根元). 유홍석(柳弘錫)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로서 이외에도 훌륭한 후학을 많이 배출했다.
저서로는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 60권, 벽계아언(蘗溪雅言)12권, 화서집 편저에 화서선생아언 문인어록 8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70권, 주자집차(朱子輯箚)20권,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등 270여권이 있다.
다음은 경수당기를 찬술한 일하정 이학준공에 대한 내용이다.
경수당기를 기술한 일하정 이학준공은 1798년에 경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촌에서 태어나 1870년 별세해서 향년72세 수를했다.
증조부이신 26대 유산 이정매 학자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아서,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 학문을 하고 지낸 조선후기 학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았다. 자라서는 금곡 송선생의 중용강론을 들었는데, 금곡이 여러번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모에게 처음으로 중용의 심오한 뜻을 들었다 하고, 또 홍매산과 이화서 제현을 좇아 교유하였는데, 다들 장려하고 칭예하여 허교하였다.
어진 경재 공경사대부들과 사귀는 인연이 되어, 선현과 조선의 미적을 강론하고, 포장함으로 모든 공들이 몸을 낮 추어 굽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살고있는 고을에 용호원이 있으니, 동계 정온선생을 제사하는 곳으로서, 공이 일찍부터 힘을 다하여 관리경영하고, 그 院에 主講이 되어, 엄숙한 규약으로 여러 학생을 창도하고, 인솔하여 유풍을 진흥케 하니, 향중이 공을 의뢰하였다. 항상 고상한 풍채를 가져 연연하여 머뭇거리고, 아첨하는 태도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때 청고를 지키고 자처하는 몇 분의 인사도, 반드시 공으로 수반을 삼았다. 일찍이 경학과 유행으로 향천과 도천, 그리고 수의어사의 천거가 여러번 있었으되, 마침내 처사로 돌아가셨으니, 공의는 애석해 하지마는 공의 심사는 어찌 손상함이 있었으리오. 화산 세칭유종 권용현이 지은 묘 갈명에서.
공이 여덟살 때 어른들이 조선으로 제목하여 시를 지으라 명령하니, 문득 지어 말하기를 일월의 밝은 빛이여 아침마다 거듭되도다 하니 좌중이 다 경탄하였다。이로써 공의 재지가 뛰어났음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일찍이 학덕이 높은 선생의 문하에 경례를 갖추고, 명현과 공명의 반열에 종유 하였으니, 용전 송내희 제주께서 추증하 여 허교하시고 말하기를 독서 한지 四十년만에 들어보지 못한 중용의 심오한 뜻을, 처사 이모는 의문나고 어려운 것을 해부하여 풀어주니 진실로 경학의 유사로다. 사람들이 묻지 않은 바를 물었다 하고 홍매산 직필은이모는 단아한 선비로 더욱이 선현을 포미하는데 부지런 하다 고 말씀하셨으며, 종중의 어른이신 화서 항로께서 일하정기문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유행은 도에 근접하고, 곤궁을 겪어도 안연히 처신함이 옛날의 현 인들도 이에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본 고을 부사인 매곡 송계수공도 말씀하기를 이모의 말은 아름답기가 문장고, 시율같아 시로 꾸민 것이 아니로되 자연히 우러나는 음성이라 일렀더라. 관부에서 천거한 요지는 명문세족으로 유행이 있고, 타고난 성이 효우하다 고 하였고, 도에서 천거한 요지는 경학에 침잠하여 주옥이 못물에 잠겨있는 것 같다 고 하였으며, 비단옷 입은 암행어사도 임하 자연에서 독서하고 안빈낙도하는 유사라는 요지로 공을 천거하였었다.
공은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청빈낙도 하면서, 일생을 학문을하면서 지낸 조선후기 학자로서,
일하정문집이 4권 전하고있다,
권1은 詩 159수가 수록되어있고,
권2에는 書 37편과 問目이, 권3에는 序 7편, 기 11편, 상량문 2편, 제문 6편이 기록되어 있고,
권4에는 묘지 7편, 묘갈명 3편, 행장 4편, 사적2편, 부록으로 기· 만사· 행장· 묘갈명· 차운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홍석주· 홍재철· 이항로 등에게 보낸 증여시, 김경선· 김수근등에게 준 송별시,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 탄적상산성황폐난지·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등이 있다.
書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은 송내희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喪에 喪期와 服制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은 이기연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에 대한 기록 이다.
경종수족에 관한 글로서는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 청백리 평정공 노촌 이약동선생의 일대기 요약본인 노촌실기를 편찬하고, 합천입향조 판서공 승원선조님의 재실인 영모재실을 신축건립해서 영모재기를 찬술 현판을 만들어 걸어셨다, 또한 거창입향조 감천공 이건 선조님의 재실에 경수당기를 찬술해서 그 글이 1987년 10월 세자손의 총회를 거쳐서 편찬한 오담재 연혁집과 일하정문집에 전하고있다.
29대 일하정 학준공께서 생전에 사용하던 호패와 직인 (현물 가문에서 보관중)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일하정문집 과 합천 숭산의 일하정 묘소
(일하정문집은 현손 33세 동강 이창기공이 26대 유산 이정매공의 유산집과함께 1956년에 편찬)
경수당이 있는 성주 벽진은 동례촌 고향에서 합천 가야산을 사이에 두고있어 자주 왕래를 하며, 대동보 족보 편찬등 벽리 종인의 종사에 많이 참여하며, 벽리 종인의 후손으로 평생을 경종수족의 정신으로 살았다.
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화서선생은 경기도 양평으로 기호지역 이고, 일하정공은 경남도 거창으로 영남지역으로 천리가 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때로는 논쟁을 했던것으로 서신내용에 나타나있다. 한편으로는 청백리 노촌 이약동선생의 같은 후손으로 서로간에 애정어린 내용이 서신왕래를 통하여 깊은 유대관계를 해온 흔적이 이항로선생의 화서집과 이학준공의 일하정집에 여러건의 서신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내용을 보연, 1862년에 화서 이항로 선생이 6년 연하의 종인인 일하정공에게 보낸 봉화 일하정주인 이라는 서신과 1865년 3월에 이학준공에게 일하정 이라는 휘호와 일하정기를 기술해준 내용이다.
화서선생 유적 유묵집에 실려있는 일하정 휘호 와 일하정기 및 종씨 일하정주인 서신
1862년 화서선생이 봉화 일하정주인에게 보낸 서신내용이 화서집에 전하고, 서신은 현손 동례촌 동강 이창기가 보관하고있다,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율곡선생은 “理는 만물에 통하고, 氣는 개체에 국한된다.”는 “理通氣局說”을 주장했었고, 화서선생은 心傳主理論을 주장했다.
여섯 살 연상의 일가 할아버지인 화서 선생과, 예순다섯의 족손이 태극을 논하다 가 의견이 갈리자, 화서 선생께서 일하정주인에게 효성 깊은 그대가 내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야 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같은 내용이 있다.
이런 사항을 종합해 보면 이학준공도 나름대로 학문을 정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렇듯이 화서선생도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서로의 종인간에 때로는 동조하여 합심하고, 때로는 첨예한 대립을 통해서 각자의 학문을 주장하기도 했다,
서신내용에 "연원에서는" 라는문구는 일하정의 증조부인 26대 이정매공 유산거사(儒山居士)가 스승인 민진원(閔鎭遠)과 더불어 태극도설을 강론 했다.(一何亭主人曾王考儒山居士。與閔丹巖論太極圖云)”는 것을 말한다. 화서집(華西集).
또한 가문의~ 이었다네 는 본문의 당구(堂構)는 가학을 계승한다는 말이다. 유옹은 일하정(一何亭) 이학준(李學峻)의 증조부인 이정매(李挺邁)를 가리키는데, 1701년 출생해서 1767년 사망한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호는 유산거사(儒山居士),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문하생으로 저서로 유산집(儒山集)2권을 남겼다.
권1은 詩 140수, 부록에 제인창수운32수,
권2는 書 10편, 부록으로 내서첩이라는 제목 아래 서 2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詩는 소박하면서도 청절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때로는 한가롭고 탈속한 선경을 노래하여, 고상한 취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유원학동에서는 절경 가운데 미몽의 세계에 도취된 신선의 꿈을 그리고 있으며, 야인행에서는 농업을 천부의 낙으로 삼아 생활하는 순수한 인간성을 묘사하였다.
서 중에는 민진원에게 보낸, 상단암 민상국진원에는 학문연구에 대한 의견을 비롯하여, 정치·시사 등 단편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정치란 仁의 道로써 시행 하여야만 민심이 복종하고, 그 결과로 태평의 덕치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 하였다.
창의격문은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이밖에 향약에 관한 글인 향약보장과 향약절목이 있다.
또한 거창부 여지승람에 영조36년 1760년에 거창부사 박종익이 유생 이정매 등으로 하여금 거창지도를 만들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1765년에는 촉성루의 삼장사관련, 송암 이로의 증시를 청원을하는 내용으로, 경상도 유생들과함께 경상도 관찰사 순상국에게 상서문을 올리기도했다.
이정매공은 말년에는 동례촌의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 유산재실을 지어 노년을 보냈다는 내용이, 개축된 가조입향조 통덕량 이난서공 재실인 영모재기와 거창군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유산재 현판인 유산정숙 편액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1865년에는 화서 이항로선생이 종족인 이학준공에게 일하정 휘호와 일하정기를 직접 지어 주었다.
화서선생은 일하정의 의미를 알고, 그 뜻을 쫓아 학문에 매진하기를 기원하는 애정어린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일하정 휘호 끝말에 증조부인 26대 유산 이정매의 종인인 일하정에게 라고 기술함으로, 학자 유산 이정매의 유산집 문헌을 통해서 학문이 높다는것을 알고 있으며, 장차 가문이 학문에 더많은 발전이 있음을 생각하여, 종족인 학준에게 일하정호와 일하정기를 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두가문의 깊은 유대 관계를 짐작할 수있다.
두글의 내용에는 화서선생의 높은 철학이 깃들어있어 두사람의 학문적 깊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화서선생의 친필인 봉하일하정 주인 서신과 일하정의 휘호와 일하정기는 우리가문에 대대로 보관해 왔으나, 2001년에 화서학회에서 화서선생 유집유묵을 발간했는데 이들 내용 게재되어있고, 지금은 서종면 노문리에 화서기념관이 건립되면서 부친인 33세손 동강 이창기공께서 화서기념관에 위탁 전시함으로서 사회의 공공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
화서기념관에 화서선생과 함께 중앙벽면에 전시되어있는 일하정 휘호와 일하정기(아래왼쪽 2번째)
끝으로 벽진이씨 시조공이신 고려 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그종당인 경수당기가 찬술된 배경을 알아보고, 찬술자인 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두 가문간에는 학문적으로나 벽리종족 및 평정공의 후손으로서 서로간에 깊은 유대감을 였볼수있다.
특히 화서이항로 선생은 기호지방의 덕망있는 학자요, 독립운동가로서 정부나 학계에서도 많은 지원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즉 가평군에서는 서종면 노문리에 화서선생 기념관을 건립해서 업적을 기리고, 노산사지에서는 후학들이 주자, 송시열과 함께 매년 시향을 지내고있다.
또한 학계에서는 후학들이 화서학회 재단을 설립해서 매년 화서선생의 정신을 연구하고, 발표회 행사를 함으로 사회적 인식을 함양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이 정부나 사회 단체 후학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데,
훌륭한 선조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 벽리 후손으로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화서선생의 높은공덕을 기리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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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자료
1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
2경수당기
3 화서선생서신 봉하 일하정주인
4일하정기
1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내용.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공의 휘는 총언이니, 곧 우리 이씨의 시조이다. 세계가 아득하고 멀어서, 그 상세한 것은 고증할 수 없으나, 오히려 국사에 나타난 것은, 가히 증험되어 믿을수있다.
삼가 고려사를 살펴 보건데 왕순식부전에 이르기를,벽진장군 이총언이 신라말에 벽진고을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을 입어 평안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 협력하여 화란을 평정하자고 요청하니, 총언이 글을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좇아 정토케 하였다.
그때 영의 나이 18세였는데, 대광 사도귀녀를 처로 삼게하고, 총언을 벽진장군으로 임명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 229호를 더 주고, 또 충주, 광주, 제주 현제천의 창곡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같은 신표를 보이면서이르되,자손에 이르기까지 이마음 변치 않으리라 고하니, 총언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시키고, 군량을 저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 있어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되었다.
태조 22년 무술 938년,칠월 임자일에 별세하니, 향년 팔십일세 였다고하였다.
그밖에 가승과 여지승람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함에 이총언에게 명하여, 벽진 옛 터를 진호케 하고, 이웃 고을 민세로서 식록케 하여, 백자 천손까지 종시일절의 맹서를맺어, 신하의 예로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 할때에 이총언이 벽진 태수로서, 오직 의연히 항복하지 아니하고, 동남의 명성과 위세로 서로 의지하여 안연하였다.
태조가 도멸코자 하였으나, 총언과는 옛부터 친한사이 임으로 참아치지 아니 하니, 총언도 또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왕씨에게 돌아감을 알고 아들 영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귀의 케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총언을 봉해서 벽진장군으로 삼고, 혼인을 맺어 대려의 맹서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아 , 공은 신라말 도탄의 때를만나 고성을 지키고, 백성을 어루만져 덕망과 위의가 진실로 드러났으며, 한나라가 거듭 솔복될 즈음에, 새 임금을 만나 대업을 도와서 풍성한 공훈과 위대한 충열이 태상에 기록되고, 역사에 실렸으니, 어찌 그리 훌륭하였으리오 .
그러나 이미 사업이 밖으로 들어남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덕행이 안으로 온축됨이 있으련만,도리어 문헌의 증거가 없어 능히 상세한 설명을 못하니, 슬프고 애석하도다.
일찍이 듣건대 군자가 도통을 전하면, 후인들이 가히 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자가 도학으로써, 천하 만세에 교조 하였으나, 그 근본을 거슬러 보면, 글이 오륜을 가르친데에서 나왔고, 맹자가 백묘 농상으로써 제나라와 양나라의 임금에게 권하였으나, 그 근본을 거슬러보면,직이 백곡을 뿌린 데에서 나온 것이니, 크고 작음과 미미하고 들어남이 비록 같지 않으나, 단서의 출처는 가히 속일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공 후손의 명성과, 덕행의 실상을 좇아 그 근본을 거슬러 찾아보면, 거의 공으로부터 비롯 되였음을 알수있을 것이로다.
공의 후손이 번성해서 우리나라의 대성이 되고, 고려조와 조선조에 명현과 거공이 우뚝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대제학 견간, 문정공 극송, 도원수 희경, 전서 존인, 정간공 맹전, 평정공 약동, 판서 승원, 성산군 식, 대사성 철균, 좌찬성 승언, 정도공 장곤, 승지 언영, 참의 석경, 세마 후경, 노파 흘, 충숙공 상길, 충강공 상급, 감사 상일, 현령 세옥, 효헌공 세환, 봉조하 세근등이, 혹은 문장이나 학행으로 드러났고, 혹은 청백이나 절의 또는 사업으로, 명망이 당시에 나타나서 성문이 후세까지 널리 전해졌으며, 그밖에도 명현과 석학이 또한 많이 빛났으니, 어찌 그 근본이 없고서야 그러했겠는가?.
또 가만히 듣건대,산화공의 증손 희길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운남에 살았는데, 그후손으로 이성량이 있어, 아들인 제독 여송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할 때에 본국이라고, 일컬으면서 심력을다해 힘쓴뜻은 대개 의의가 있었다고 이르기도 한다.
벽진은 지금 경상우도 성주목이니, 시조공께서 일어나신 땅으로서 자손들이, 이로 인해서 관향을 삼았다.
치소 서쪽 십오리의 명암방 수촌은 곧 공의 유허이고, 그 좌강 수백보는 곧 공의 묘소였으나, 임진병난 이후로는 그 장소를 정확히 알수가없어서, 일찌기 우암 송문정공의 말씀에 따라, 설단하여 봉사하게 되었다.
고종원년 갑자1864년에 후손들이, 보첩 간행을 위하여 유허에서 모였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해서, 비를 다듬어 비문을 쓰고자 하면서 나에게 의론하거늘, 내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의 후덕과 풍공은 진실로, 만 자손의 근본이 되고, 토구의 땅과 하구의 집에 이르러서는, 또한 능히 수백천년까지, 보수하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조선의 유덕을 , 소술하는 것은 근본이요, 조선의 구기를, 수호하는 것은 말단이니, 우리 백세지친이 되는 이는 진실로, 그 말단을 소흘히 하는 것도 옳치 아니하거니와, 더욱 그 근본에 힘써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구불변의 도리가 되는 것이니, 조선의 영혼 또한 반드시 오르 내리면서, 나도 후손이 있다 하리라 고 하였다.
내 어리석어나 삼가 순서에 따라 이 사적을 기록하였으니, 당세의 입언군자를 뵈옵고 기리는 글을 청하도록 하여라, 라고 고종 을축년 1865년 9월11일에 화서 이항로가 기술했다.
2. 경수당기의 내용은
가야산 동쪽에 있는 성주는, 산천의 수려함 과 인물을 배출함에 있어, 경주, 진주, 상주,안동과 서로 앞을 다투며, 스스로 큰 고을을 이룬다. 국사와 야사를 상고하건데, 이미 선배 들이 지은 글 속에 이런 사실이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갑자 1864년 봄에 족보일로 인하여 단소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지세의 아름다움을 두루 돌아보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훌륭한 땅으로서, 지금은 명암방 수촌이라 일컫는데, 여기가 우리 시조 벽진부군께서 예전에 살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외로운 성에서 성원하신 일은, 신라 말기에 뛰어나 시고, 천호의 봉읍을 받은 일은, 고려 초기에 특출하셨으니, 주나라 서울을 떠나서 양산을 넘은것과 같이 조상이 옮겨 사신 것은, 어느 시대이었 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산화공이 명곡에서 생장하시어 나라를 빛낸 계책으로서, 명망이 천하에 퍼졌으니, 옛 일을 회고하건대, 상전벽해의 감개한 눈물이 흘려내려, 옷깃을 적시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우리 시조의 수천 후손들이,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1년에 한 차례씩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고 다행히 전해지고 있으나, 남아있는 재사가 오히려 소박하여, 감 한채와 당 한채가 있는데, 서감은 두 칸 장방으로 비록 노나라의 큰 집인 영광전 만은 못하지마는, 운곡의 곁 이천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한자의 편액도 없으니, 아! 슬프도다. 면상을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산봉이라 일컫고, 기산에 오르는 사람은, 허유의 무덤이라고 이르는 사람도 있는데, 두예의 침비는 무슨일이 었으며, 악의 즉 전국시대 연나라 장수의 무덤길을 징험 할 바 없는것 같이, 길가는 나그네 들이 이 지점을 가리켜, “벽진이씨 단소와 재사이다”,라고만 말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운거족종이 도배를 하여, 옛모습 보다는 약간 나아졌으나, 조금 모자라는 것은 명칭이 없는 것이다.
동감은 화수헌이라, 현판을 달고 서감은, 경수당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 두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이라, 크게 써 붙였으니, 모두 친구 여응규의 서까래 같은, 큰 글씨를 빌린 것이다. 외면으로 보면 불가에 도금한 아름다움 같으나, 그 속이 어떠한 가는 알지 못하겠다. 이에 갑자기 백천의 흐름이, 한 근원에서 비롯되고, 만엽의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누어진다는 것이 생각되어, 그 감동으로 7률 한수 와 오언시 한수를 읊었으니, 어찌 5언 7언으로 장성 명문 대가의 솜씨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원래 문장을 짓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한데, 진실로 운거족종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마침내 기문을 짓는바이다 라고, 승지공 일하정 학준공이 경수당에 관해 기술했다.
3.奉和 宗氏一何亭主人
종씨 일하정 주인께 화답합니다.
今年花太晩, 逢子杜門中
貧保心廉白, 衰餘面潤紅
淵源論太極, 堂構襲儒翁
忠孝吾家法, 他時驗局通
玄黓閹茂暮春下幹 華西山人書
올해엔 꽃소식이 매우 늦었는데
두문杜門중에 그대를 만났네.
가난해도 청렴결백한 마음 지켰고
노쇠해도 붉은 얼굴 윤기가 났었지.
연원을 헤아리니 태극을 논했었고
2)가문의 사업은 유옹(儒翁)을 이었다네. 3)충효는 우리 가문의 법도이니
훗날 국통(局通)을 징험하리라.
1862년(임술4년) 삼월(음) 하순 종말宗末 화서산인華西山人5) 쓰다.
이 시는 “거창에 거주하는 일하정一何亭 주인이 남녘의 꽃소식과 함께 시 한
수를 지어 양평으로 보내오자, 화답한 것”이라고 가정하고 풀어보겠습니다.
수련首聯을 보면, 일하정 주인은 늘 이맘때면 꽃소식을 전하며 안부 편지를 올렸던 듯한데, 이 해에는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늦게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실제로 꽃이 늦게 피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
면 전자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아무튼, 화서선생은 기다림에 지쳤던지 급기야
문을 걸어 닫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대가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대가 보낸 “시詩”가 온 것입니다.
미련尾聯의 국통局通은 철학 용어입니다.
율곡선생은 “리理는 만물에 통通하고
기氣는 개체에 국한局限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設”을 주장했었고,화서선생은 심전주리론心專主理說을 폈습니다. 여섯 살 연상의 일가 할아버지인 화서 선생과 예순다섯의 족손族孫이 태극太極을 논하다가 의견이 갈리자,
선생께서 일하정一何亭 주인에게 “효성 깊은 그대가 내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야!”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선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불효자가 되고 말 지경입니다. 전술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볼까요?
화서선생은 일찍이 민본주의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며 과감한 국정 개혁론을 주장한 바 있는데, 토지의 재분배를 통해 농민층의 몰락을 막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1862년은 삼정의 문란과 지배계층의 횡포로 농민의 불만이 폭발하여, 음력 2월 단성민란丹城民亂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대된 해였습니다.
이 시기에 詩가 오갔던 음력 3월 하순은 거창도 예외가 아니어서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께서 주장하셨던 개혁안들이 미리 실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안타깝습니다. 선생께서는 대문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하정께서 선생께 보낸 원운原韵을 볼 수 있었더라면 좀 더 풍성하면서도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일하정문집에는 그 시가 실려있겠지요. 선생은 이 시에서, 여섯 살 연하의 족손族孫에게 조차 봉화奉和라 하여 상대는 높이고, 자신은 종말宗末이라며 낮추고 있으니 조선의 범절은 정말 어렵습니다. 종씨宗氏는 애매하여 바꾸지 않고 그냥 두었습니다. 촌수를 따질 수 있는 관계일 때는 일가一家를 쓰고, 불분명할 때는 종씨를 쓴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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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하정주인(一何亭主人) : 생몰년이 1798~1870인 유학자 이학준(李學峻)을 말한다. 본관은 벽진, 자는 덕오(德吾), 호는 일하정(一何亭)이다.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문집 《일하정집(一何亭集)》을 남겼다.
2) 연원~논했었고 : “일하정의 증조부인 유산거사(儒山居士)가 스승인 민진원(閔鎭遠)과 더불어 태극도설을 강론했다.
(一何亭主人曾王考儒山居士。與閔丹巖論太極圖云)”는 것을 말한다.
《화서집(華西集)》
3) 가문의~ 이었다네. : 본문의 당구(堂構)는 가학을 계승한다는 말이다. 유옹은 일하정(一何亭) 이학준(李學峻)의 증조부인 이정매(李挺邁)를 가리키는데, 생몰년은 1701~1767년인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호는 유산거사(儒山居士),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문하생으로 저서 《유산집(儒山集)》을 남겼다.
4) 1862년(임술) : 원문의 현익엄무(玄黓閹茂)는 고갑자(古甲子)로, ‘현익(玄黓)’은 ‘임(壬)’이고, ‘엄무(閹茂)’는 ‘술(戌)’이니 곧 임술(壬戌)이다.
5) 화서산인(華西山人) : 이항로(李恒老, 1792~1868)를 말한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字)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초명은 광로(光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지금의 경기도 양평인 양근군(楊根郡)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회장(李晦章)이고,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며 후진 양성에 매진하여 화서학파를 이루었다.
주요저서로 화서문집, 화동합편강목, 벽계아언, 문인어록등이 있다.
4.일하정기一何亭記
일하一何의 본뜻은 알지 못한다. 이제 문헌文獻에 드러난 것에 따라 그 대강의 뜻을 모아 보면, ‘일一’은 주자朱子의 주일무적主一無適1)이라는 설說이니,
만수萬殊가 일본一本으로 귀결되는 까닭이다. ‘하何’는 공자孔子께서 “‘어찌할까 어찌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2)라고 했던 설說이니, 일본一本이 만수萬殊로 나눠지는 까닭이다. ‘일一’이 없으면 이랬다저랬다
할 뿐3)이지 존덕성尊德性4)이 아니고, ‘하何’가 없으면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뿐이지 도문학道問學이5) 아니므로 한 글자라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에 와서 우리 두 사람의 처지에 따라 말해보더라도 통通한다.
우리 둘은 ‘이理’로 말하면, 같은 평정공平靖公의 후손이니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어찌 그대와 나 사이에 피차의 간격이 있겠는가? ‘기氣’로 말을 하자면, 형제라 하더라도 세대가 내려가서 복服을 입어야 하는 관계가 끝이 나면 은택도 끊겨6)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군자의 학문은 사욕私欲을 제거하여 공리公理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사해四海도 모두 형제동포이고 인仁이 천하를 덮는다.
하물며 한 할아버지의 손자인 우리 두 사람임에랴.
공자께서 이르기를, “적선지가積善之家면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면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7)고 하셨다. 무릇 성인은 무고無固와 무필無必8)을 덕으로 여겼지만, 오늘날 ‘필必’자는 그 이치가 일월日月처럼 분명해서의심스러운 것이 없으리라. 그런데도 적선積善은 어렵고 적불선積不善은 쉬우니그 까닭은 무엇인가. 선善은 먼지를 치우는 것과 같아서 치우려 해도 치워지지않고, 불선不善은 먼지를 치우지 않는 것과 같아서 쌓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쌓인다. 이 때문에 그 어렵기가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고, 그 쉽기는 털을 태우는 것과 같으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듣기로, 종씨 학준學峻 덕오
德吾씨는 연원淵源을 이어받아 이미 포부抱負가 아름답다는 소문이 있다. 나는
종씨의 집에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다고 보고, 우선 이로써 분명히 해 둔다. 숭정崇禎 네번째 을축乙丑, (1865년) 재중양再重陽9)에 종말宗末 화서산인華西山人항로恒老는 기記한다.
조선 철학사에서 단연코 우뚝하신 선생께서는,일하정에는,‘오로지 한곳에 집중하여 존덕성尊德性하고, 삼가고 전전긍긍하며 날마다도문학道問學에 힘쓰는 정자’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보셨습니다.
웃갓마을에 사는 傍後孫 鎭式은 삼가 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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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무적(主一無適) : 주자(朱子)는 ‘경재잠(敬齋箴)’에서, “두 개의 일이 있다고 해서마음이 둘이 되면 안 되고, 세 개의 일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셋이 되면 안 된다.”고 하였고. 《논어》에 나오는 ‘경사이신敬事而信’을 풀이하면서 “경敬은 주일무적主一無適을 이른다.
[敬者, 主一無適之謂]”고 하였으니, 주일(主一)은 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이고, 무적(無適)은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다. 결국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당면한 일에만 오로지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2)어찌할까?~ 없다 : 익숙히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서 대처하라는 말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온다. 공자孔子의 이 말씀을 실학자 위백규魏伯珪는 존재집存齋集에서, ”‘어찌할까’를 거듭 말씀한 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도 마음속으로 잊은 적이 없고 감히 나태하지 않다는 뜻이다. 옛 성인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날마다 부지런히 힘쓸 것을 생각하며,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한 것이 모두 ‘어찌할까, 어찌할까.’라는 의미이다.”라고 풀었다. 즉, “전전긍긍하며 잠시라도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인 나도 도와줄 수가 없지만, 그렇게 한 사람은 하나의 이理가 만 가지의 기氣로 분별되어 발현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3)이랬다저랬다 할 뿐 : “그 남자는 확고한 신념이 없어서, 자꾸만 이랬다저랬다 한다.[士也罔極 二三其德]”라고 한 말이 《시경》 위풍(衛風) 맹(氓)에 나온다. ‘二三’은 (사상이나 절개를) 자주 바꾼다.’는 뜻이다.
4)존덕성(尊德性) : 덕성(德性)을 높이는 것으로 본질을 함양하는 공부이다.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미암는 것이니, 광대함을 이루고 정미함을 다 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용을 말미암는다. 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는 말이 《중용 27장》에 나온다.
5) 도문학(道問學) : 학문을 통해 이치를 탐구하는 것으로 격물치지의 공부법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도문학은 치지(致知)를 하여 도체(道體)의 은미한 것까지 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6) 은택이 끊겨 : 본문의 택참(澤斬)은 《맹자(孟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 보면, 군자지택(君子之澤)도 오세이참(五世而斬)이요, 소인지택(小人之澤)도 오세이참(五世而斬)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선대(先代)의 일이 후손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고 끊기는 것을 말한다.
7)주역〈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온다.
8)《논어》 자한(子罕)에 “공자는 네 가지를 사절하셨으니, 함부로 억측하지 않았고, 함부로 단언하지 않았으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아집도 부리지 않았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하였다.
9) 재중양(再重陽) : 두 번째 9월 9일이니 1865년 윤9월 9일을 말한다.
10) 旃蒙赤奮若(전몽적분약) : 고갑자(古甲子)로 전몽(旃蒙)은 을(乙)에 해당하고 적분약(赤奮若)은 축(丑)에 해당한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태세(太歲)가 갑(甲)에 있는 것을 알봉(閼逢)이라 하고, 을(乙)에 있는 것을 전몽(旃蒙)이라 하며, 병(丙)에 있는 것을 유조(柔兆)라 하고, 정(丁)에 있는 것을 강어(强圉)라 하며, 무(戊)에 있는 것을 저옹(著雍)이라 하고, 기(己)에 있는 것을 도유(屠維)라 하며, 경(庚)에 있는 것을 상장(上章)이라 하고, 신(辛)에 있는 것을 중광(重光)이라 하며, 임(壬)에 있는 것을 현익(玄黓)이라 하고, 계(癸)에 있는 것을 소양(昭陽)이라 한다.” 했으며, 《이아(爾雅)》 〈세양(歲陽)〉에 “태세가 인에 있으면 섭제격(攝提格), 묘에 있으면 단알(單閼), 진에 있으면 집서(執徐), 사에 있으면 대황락(大荒落), 오에 있으면 돈장(敦牂), 미에 있으면 협흡(協洽), 신에 있으면 군탄(涒灘), 유에 있으면 작악(作噩), 술에 있으면 엄무(閹茂), 해에 있으면 대연헌(大淵獻), 자에 있으면 곤돈(困敦), 축에 있으면 적분약(赤奮若)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11) 유산儒山 : 일하정의 증조부의 호가 유산거사이다.
가조면 동례촌 남쪽 박유산에서 유래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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