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의 비유에 담긴 영성
예레 14,17-22; 마태 13,36-43 /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2024.7.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에 담긴 뜻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밀밭에야 밀씨를 뿌리기 마련이지만, 원치 않게도 가라지의 씨가 덧뿌려져 함께 자라는 일이 흔합니다. 이 때 섣불리 가라지를 뽑아 버리려 들다가는 자칫 밀까지 뽑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성장과정에서는 밀과 가라지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수확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지는 따로 거두어 불에 태우는 땔감으로 쓰고 남은 밀은 안전하게 거두어 식량으로 쓰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수확할 때를 판단하고 가라지를 가려내는 몫은 주인의 역할입니다. 일꾼들은 주인의 판단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비유 속에 보편적으로 인간현상에서 발견되고 또 유념해야 할 원칙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가라지의 숨은 역할입니다. 가라지는 그 자체로 밀의 성장을 방해하는 훼방꾼이기는 하지만, 밀의 뿌리는 흙 속의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려는 보이지 않는 경쟁을 흙 속에서 가라지의 뿌리와 해야 하고, 이 경쟁을 통해서 밀의 뿌리가 튼튼해집니다. 이런 이치로, 우리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가라지들은 우리 마음의 선함이 진정으로 선한지를 검증해 주는 마찰효과를 냅니다.
마찰이란 두 물체가 접촉하여 서로 맞닿아 움직이는 것으로서, 마찰력은 물체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저항 에너지를 말하고 마찰 효과란 이 저항 에너지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작용입니다. 우리가 걸어 갈 때 지면에서 작동하는 마찰의 힘을 느끼지만, 이 마찰력 덕분에 몸의 무게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마찰의 힘이 없거나 아주 미약한 곳, 예를 들면 아주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라면 걷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산에서라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적당한 마찰력은 우리가 하려는 운동을 안전하게 도와줍니다. 우리가 만나는 가라지들도 그러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내 편이라면 우리는 당장은 편할 수 있지만, 우리가 더 노력하게 만드는 자극요인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반대편도 있고 비판도 당하고 훼방도 당하기 때문에 이 모든 반대요인을 조심하고 극복하느라고 더욱 노력도 하고 조심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라지는 마찰 효과를 유발하는 요소라는 것이고, 이로 인한 적당한 마찰력이 무게중심을 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카리옷 유다를 제자단의 회계와 섭외 업무를 맡기시고 신임해 주셨습니다만, 어느 날 악마가 유다에게 배신의 마음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걸 아시게 된 예수님께서는 매우 마음이 힘드셨을테지만 내색하지 않고 지켜보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 때에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비록 유다의 밀고로 촉발된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의 살인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빌라도까지 엮여서 당신의 죽음이 결정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인성으로야 예수님께서도 차마 피하고 싶은 십자가요 고난의 잔이셨을 것이기에 게세마니 동산에서 밤새 그렇게 힘든 기도를 바치신 것이겠지만 신성으로서는 달랐습니다. 유다가 더 앞당겼을 수는 있지만, 이미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는 이래저래 진행되어 오던 일이었기 때문이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는 메시아로 파견되신 당신의 희생이 불가피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유다가 저지른 가라지 역할은 하느님 나라의 밀 역할을 하신 예수님의 운명이 결정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이 운명을 받아들이시려던 예수님의 결심을 더욱 굳혔을 뿐이었다는 뜻입니다.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그리고 빌라도가 수행한 역사적 악역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악은 선을 더욱 굳세고 강하게 하는 발판이었습니다. 인간 현상에서나 사회 현상에서나 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이나 우리 마음에 생겨나는 가라지에도 심리적이고 영성적인 이유와 의미가 숨겨져 있으니, 이는 십자가의 영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가라지를 경계하시되 억지로 없애려고 애쓰지 마시고 때가 차면 하느님께서 수확하시도록 맡겨 드리십시오. 하느님께서 수확 때에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고 싶은 의인들은 오로지 밀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라지가 밀을 튼튼하게 만들어줍니다.
이민족의 우상 숭배 풍조에 물들었던 동족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고백하며 제발 용서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탄원하는 예언자 예레미야도, 오히려 그 사악한 죄악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백성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었습니다. 죄악 때문에 받은 동족이 받아야 했던 벌은 참혹했지만, 그 때문에 그는 심판주이신 하느님의 엄정한 정의를 동족에게 일깨워 줄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때는 시간적인 종말만이 아니라 악을 종식시킬 수 있는 선이 행해질 바로 그 때입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타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들과 악인들이 치열하게 선과 악으로 대결하는 우리네 현실을 예언자의 눈으로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행하시는 심판의 엄정함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에서 의인이라는 좋은 씨를 지금도 뿌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수 있도록 의로움을 보호해 주시고 길러 주십니다. 의인들이 예수님께서 길러 주시는 의로움을 행할 때마다 악의 종말이 앞당겨 집니다. 수확 때가 당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사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