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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 根松 우목 대부 書
벽진유림 碧珍儒林
벽진유림은 벽리종인의 유림을 말한다.
벽진이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공은 신라말기 858년에 태어나서,
고려 초기인 938년 별세를 해서 향년 81세수를 누리셨다.
금년이 시조기로 1167년이 되는 해로서 오랜 세월를 거쳐오는 동안에 그 후손들이 시조공및 선조님의 벽리 얼과 정신을 잘 받들어 오고 있다.
벽진장군 이총언에 대한 사실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및 동국여지승람 등에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 더이상 언급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공의 후손으로서는 세월이 더해가면서 더욱 번성해서 우리나라의 대성이 되고, 고려조와 조선조에 명현과 거공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를테면, 대제학 견간, 문정공 극송, 도원수 희경, 전서 존인, 정간공 맹전, 평정공 약동, 판서 승원, 성산군 식, 대사성 철균, 좌찬성 승언, 정도공 장곤, 승지 언영, 참의 석경, 복재 후경, 노파 흘, 충숙공 상길, 충강공 상급, 감사 상일, 현령 세옥, 효헌공 세환, 봉조하 세근등이, 혹은 문장이나 학행으로 드러났고, 혹은 청백이나 절의 또는 사업으로, 명망이 당시에 나타나서 성문이 후세까지 널리 전해지고, 그밖에도 명현과 석학이 또한 많이 배출되었다고, 1865년 화서 이항로선생이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에 기록되어 있고. 근대에서도 사회의 저명 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덕망과 명망있는 대성의 가문으로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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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의 종당인 경수당기에 대한 내용은
벽진장군의 옛 봉토였던,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1826년 지금의 자리에 작은 집을지어 시조공 단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준비와 숙소용으로 사용했다.
재사가 소박하여, 감 한채와 당 한채가 있는데, 서감은 두 칸 장방으로 운곡의 곁 이천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 한 자의 편액도 없으니, 동감은 화수헌 이라 현판을 달고, 서감은 경수당 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 두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이라, 크게 써 붙였다.
그후에 1864년 고종 원년인 갑자에 본당에 보소를 설치하고, 다음해 甲子譜 17권의 족보를 완간하고, 그 여력으로 시조공의 유허비와 표갈을 세워 경수당이 벽진이씨의 성지임을 대내외에 표방 하였다.
이에 후손 일하정 이학준공께서 족보 편찬일로 오래동안 경수당에 머물면서 시조공및 선조님의 얼과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기서 경종수족의 마음으로 경수당기를 찬술하였다.
이후로부터 200여년 동안 경수당을 가꾸고 발전을 시켜서, 현재의 번듯한 시조공 종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수당은 1당, 1각, 2사, 1청, 2재, 2문의 건조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명칭은 유허비각, 비현사, 세덕사, 전사청, 양정재, 근성재, 숙정문, 숭상문 이다.
유허비각은 좌측에 유허비를, 우측에 사마구가 안치되어 있는 비각이며, 진입로 양측에는 석등, 장군석, 사자석등을 각 쌍으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비현사는 으뜸을 나타내며, 시조공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이고, 세덕사는 대대로 쌓은 아름다운 덕이란 말로, 2세에서 10세까지의 선조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전사청은 향사를 위해 준비한 제수를 봉하는 곳이고, 숙정문은 사당권역에 출입하는 문이며, 양정재는 동재로 제관이 머무는 장소이고, 근성재는 서재로 대종회 회의장이며, 숭상문은 경수당 정문이다. 이들 건조물 전체를 경수당이라 한다,
매년 음력 10월 3일 제향를 지내면서, 시조공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종중의 구심점으로 삼아 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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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경수당기를 기술할 당시의 두분 공에 대한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기술된 경수당기는 1864년에 평정공계 승지공 후손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이 연세 66세때에 벽진이씨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를 기술하고, 그후 7년뒤인 1870년에 경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촌에서 별세했다.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는 1865년에 평정공계 직장공 후손 27대 화서 이항로선생이 연세 73세때에,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경종수족의 마음으로 기술하고, 그 마음을 고이 간직 한채로 3년뒤인 1868년에 경기도 양평군 서정면 통정골에서 별세했다.
두분 공께서는 일생의 모든 삶이 마무리되어 가는 가장 원숙한 시기에 벽리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고, 또한 경종 수족의 마음을 담아서 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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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를 기술한 화서 이항로선생은 당대에 명문대가의 성리 학자요, 후학으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는등, 국가에 많은 공헌을 함으로서 역사적으로 훌륭한 명성을 받아오고 있다,
화서 이항로선생은 1792년 출생해서 1868년에 사망했으며,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로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출생이며.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초명은 광로(光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3세때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다. 1808년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를 단념 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1840년 학행(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64년 조두순이 천거하여 장원서별제, 전라도사, 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사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가 되어 주전론을 적극 주장 하였고,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경연관 으로서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및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재건한 삼대가 이시다.
화서 이항로선생의 사상(思想)은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주리론(主理論)을, 우주론(宇宙論)에 있어서는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에 반대하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 섰다. 즉 理와 氣를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하여 理가 主가 되고, 氣가 役이 되어야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요, 한국 역사상 보기드문 민족교육자 (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들에게 역설, 춘추대의 (春秋大義)를 주장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내세워 민족 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양헌수(梁憲洙). 유중교(柳重敎). 박문일(朴文日). 유중악(柳重岳). 박문오(朴文五). 이근원(李根元). 유홍석(柳弘錫)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로서 이외에도 훌륭한 후학을 많이 배출했다.
저서로는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 60권, 벽계아언(蘗溪雅言)12권,
화서집 편저에 화서선생아언 문인어록 8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70권,
주자집차(朱子輯箚)20권,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등 270여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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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경수당기를 찬술한 일하정 이학준공에 대한 내용이다.
경수당기를 기술한 일하정 이학준공은 1798년에 경남도 거창군 가조면 동례촌에서 태어나 1870년 별세해서 향년72세 수를했다.
과거급제 하고 성균관의 승문원박사인 21대 찰방공 이창일선조와
증조부이신 26대 유산 이정매 학자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아서,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 학문을 하고 지낸 조선후기 학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았다. 자라서는 금곡 송선생의 중용강론을 들었는데, 금곡이 여러번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모에게 처음으로 중용의 심오한 뜻을 들었다 하고, 또 홍매산과 이화서 제현을 좇아 교유하였는데, 다들 장려하고 칭예하여 허교하였다.
어진 경재 공경사대부들과 사귀는 인연이 되어, 선현과 조선의 미적을 강론하고, 포장함으로 모든 공들이 몸을 낮 추어 굽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살고있는 고을에 용호원이 있으니, 동계 정온선생을 제사하는 곳으로서, 공이 일찍부터 힘을 다하여 관리경영하고, 그 院에 主講이 되어, 엄숙한 규약으로 여러 학생을 창도하고, 인솔하여 유풍을 진흥케 하니, 향중이 공을 의뢰하였다. 항상 고상한 풍채를 가져 연연하여 머뭇거리고, 아첨하는 태도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때 청고를 지키고 자처하는 몇 분의 인사도, 반드시 공으로 수반을 삼았다. 일찍이 경학과 유행으로 향천과 도천, 그리고 수의어사의 천거가 여러번 있었으되, 마침내 처사로 돌아가셨으니, 공의는 애석해 하지마는 공의 심사는 어찌 손상함이 있었으리오. 화산 세칭유종 권용현이 지은 묘 갈명에서.
공이 여덟살 때 어른들이 조선으로 제목하여 시를 지으라 명령하니, 문득 지어 말하기를 일월의 밝은 빛이여 아침마다 거듭되도다 하니 좌중이 다 경탄하였다。이로써 공의 재지가 뛰어났음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일찍이 학덕이 높은 선생의 문하에 경례를 갖추고, 명현과 공명의 반열에 종유 하였으니, 용전 송내희 제주께서 추증하 여 허교하시고 말하기를 독서 한지 四十년만에 들어보지 못한 중용의 심오한 뜻을, 처사 이모는 의문나고 어려운 것을 해부하여 풀어주니 진실로 경학의 유사로다. 사람들이 묻지 않은 바를 물었다 하고 홍매산 직필은이모는 단아한 선비로 더욱이 선현을 포미하는데 부지런 하다 고 말씀하셨으며, 종중의 어른이신 화서 항로께서 일하정기문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유행은 도에 근접하고, 곤궁을 겪어도 안연히 처신함이 옛날의 현 인들도 이에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본 고을 부사인 매곡 송계수공도 말씀하기를 이모의 말은 아름답기가 문장고, 시율같아 시로 꾸민 것이 아니로되 자연히 우러나는 음성이라 일렀더라. 관부에서 천거한 요지는 명문세족으로 유행이 있고, 타고난 성이 효우하다 고 하였고, 도에서 천거한 요지는 경학에 침잠하여 주옥이 못물에 잠겨있는 것 같다 고 하였으며, 비단옷 입은 암행어사도 임하 자연에서 독서하고 안빈낙도하는 유사라는 요지로 공을 천거하였었다.
공은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 안빈낙도 하면서, 일생을 학문을하면서 지낸 조선후기 학자이다,
일하정문집 4권이 전하고있다,
권1은 詩 159수가 수록되어있고,
권2에는 書 37편과 問目이, 권3에는 序 7편, 기 11편, 상량문 2편, 제문 6편이 기록되어 있고,
권4에는 묘지 7편, 묘갈명 3편, 행장 4편, 사적2편, 부록으로 기· 만사· 행장· 묘갈명· 차운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홍석주· 홍재철· 이항로 등에게 보낸 증여시, 김경선· 김수근등에게 준 송별시,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 탄적상산성황폐난지·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등이 있다.
書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은 송내희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喪에 喪期와 服制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은 이기연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에 대한 기록 이다.
경종수족에 관한 글로서는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 청백리 평정공 노촌 이약동선생의 일대기 요약본인 노촌실기를 편찬하고, 합천입향조 판서공 승원선조님의 재실인 영모재실을 신축건립해서 영모재기를 찬술 현판을 만들어 걸어셨다, 또한 거창입향조 감천공 이건 선조님의 재실에 경수당기를 찬술해서 그 글이 1987년 10월 세자손의 총회를 거쳐서 편찬한 오담재 연혁집과 일하정문집에 전하고있다.
29대 일하정 학준공께서 생전에 사용하던 호패와 직인 (현물 가문에서 보관중)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의 일하정문집 과 합천 숭산의 일하정 묘소
(일하정문집은 현손 33세 동강 이창기공이 26대 유산 이정매공의 유산집과함께 1956년에 편찬)
경수당이 있는 성주 벽진은 동례촌 고향에서 합천 가야산을 사이에 두고있어 자주 왕래를 하며, 대동보 족보 편찬등 벽리 종인의 종사에 많이 참여하며, 벽리 종인의 후손으로 평생을 경종수족의 정신으로 살았다.
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의 관계에 대해서는, 화서선생은 경기도 양평으로 기호지역 이고, 일하정공은 경남도 거창으로 영남지역으로 천리가 넘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때로는 논쟁을 했던것으로 서신내용에 나타나있다. 한편으로는 청백리 노촌 이약동선생의 같은 후손으로 서로간에 애정어린 내용이 서신왕래를 통하여 깊은 유대관계를 해온 흔적이 이항로선생의 화서집과 이학준공의 일하정집에 여러건의 서신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내용을 보연, 1862년에 화서 이항로 선생이 6년 연하의 종인인 일하정공에게 보낸 봉화 일하정주인 이라는 서신과 1865년 3월에 이학준공에게 일하정 이라는 휘호와 일하정기를 기술해준 내용이다.
화서선생 유적 유묵집에 실려있는 일하정 휘호 와 일하정기 및 종씨 일하정주인 서신
1862년 화서선생이 봉화 일하정주인에게 보낸 서신내용이 화서집에 전하고, 서신은 현손 동례촌 동강 이창기가 보관하고있다,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율곡선생은 “理는 만물에 통하고, 氣는 개체에 국한된다.”는 “理通氣局說”을 주장했었고, 화서선생은 心傳主理論을 주장했다.
여섯 살 연상의 일가 할아버지인 화서 선생과, 예순다섯의 족손이 태극을 논하다 가 의견이 갈리자, 화서 선생께서 일하정주인에게 효성 깊은 그대가 내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야 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것같은 내용이 있다.
이런 사항을 종합해 보면 이학준공도 나름대로 학문을 정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렇듯이 화서선생도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서로의 종인간에 때로는 동조하여 합심하고, 때로는 첨예한 대립을 통해서 각자의 학문을 주장하기도 했다,
서신내용에 "연원에서는" 라는문구는 일하정의 증조부인 26대 이정매공 유산거사(儒山居士)가 스승인 민진원(閔鎭遠)과 더불어 태극도설을 강론 했다.(一何亭主人曾王考儒山居士。與閔丹巖論太極圖云)”는 것을 말한다. 화서집(華西集).
또한 가문의~ 이었다네 는 본문의 당구(堂構)는 가학을 계승한다는 말이다. 유옹은 일하정(一何亭) 이학준(李學峻)의 증조부인 이정매(李挺邁)를 가리키는데, 1701년 출생해서 1767년 사망한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호는 유산거사(儒山居士),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문하생으로 저서로 유산집(儒山集)2권을 남겼다.
권1은 詩 140수, 부록에 제인창수운32수,
권2는 書 10편, 부록으로 내서첩이라는 제목 아래 서 2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詩는 소박하면서도 청절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때로는 한가롭고 탈속한 선경을 노래하여, 고상한 취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유원학동에서는 절경 가운데 미몽의 세계에 도취된 신선의 꿈을 그리고 있으며, 야인행에서는 농업을 천부의 낙으로 삼아 생활하는 순수한 인간성을 묘사하였다.
서 중에는 민진원에게 보낸, 상단암 민상국진원에는 학문연구에 대한 의견을 비롯하여, 정치·시사 등 단편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정치란 仁의 道로써 시행 하여야만 민심이 복종하고, 그 결과로 태평의 덕치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 하였다.
창의격문은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이밖에 향약에 관한 글인 향약보장과 향약절목이 있다.
또한 거창부 여지승람에 영조36년 1760년에 거창부사 박종익이 유생 이정매 등으로 하여금 거창지도를 만들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1765년에는 촉성루의 삼장사관련, 송암 이로의 증시를 청원을하는 내용으로, 경상도 유생들과함께 경상도 관찰사 순상국에게 상서문을 올리기도했다.
이정매공은 말년에는 동례촌의 박유산 동쪽 끝자락에 유산재실을 지어 노년을 보냈다는 내용이, 개축된 가조입향조 통덕량 이난서공 재실인 영모재기와 거창군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유산재 현판인 유산정숙 편액이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1865년에는 화서 이항로선생이 종족인 이학준공에게 일하정 휘호와 일하정기를 직접 지어 주었다.
화서선생은 일하정의 의미를 알고, 그 뜻을 쫓아 학문에 매진하기를 기원하는 애정어린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일하정 휘호 끝말에 증조부인 26대 유산 이정매의 종인인 일하정에게 라고 기술함으로, 학자 유산 이정매의 유산집 문헌을 통해서 학문이 높다는것을 알고 있으며, 장차 가문이 학문에 더많은 발전이 있음을 생각하여, 종족인 학준에게 일하정호와 일하정기를 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두가문의 깊은 유대 관계를 짐작할 수있다.
두글의 내용에는 화서선생의 높은 철학이 깃들어있어 두사람의 학문적 깊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화서선생의 친필인 봉하일하정 주인 서신과 일하정의 휘호와 일하정기는 우리가문에 대대로 보관해 왔으나, 2001년에 화서학회에서 화서선생 유집유묵을 발간했는데 이들 내용 게재되어있고, 지금은 서종면 노문리에 화서기념관이 건립되면서 부친인 33세손 동강 이창기공께서 화서기념관에 위탁 전시함으로서 사회의 공공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
화서기념관에 화서선생과 함께 중앙벽면에 전시되어있는 일하정 휘호와 일하정기(아래왼쪽 2번째)
끝으로 벽진이씨 시조공이신 고려 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 사실기와 그종당인 경수당기가 찬술된 배경을 알아보고, 찬술자인 화서 이항로선생과 일하정 이학준공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두 가문간에는 학문적으로나 벽리종족 및 평정공의 후손으로서 서로간에 깊은 유대감을 였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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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이영은 고려 태조를 도운 공신으로 대제학을 지냈고, 4세 이경석은 평장사, 10세 이옹은 판공부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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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11대 중문지후 대장군 이성간.
이성간은 지추밀원사 옹의 아들로 어릴때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기사에 뛰어났으며, 충선왕및 충숙왕때에 중문지후, 대장군을 지냈는데 충성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백형 견간은 문장 학행으로, 성간은 무예 병법으로 전세하니, 세상사람들이 문무겸전의 집이라 불렀다.
고려 충렬.충선왕조에 중문지후를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기골이장대하고 총명하여 맏형을따라 뜻을세워, 학문하던중 당시시대상이 외환내우하여 위기에 처함을 직시하고, 외구를 물리쳐 흥국안민을 위하여 무예병법을 정확히 연구하고, 투필집궁하여 북쪽의적과 섬의 오랑캐를 정토하는데, 종군하며 병사를아껴 자식처럼대하며 상명을 하늘처럼하며, 많은공을세워 충선왕초에 대장군에올라, 왕정을 보좌하여 폐정을 바르게하고, 백성의고충을 해소하기를 도모하려 했으나, 관료들의 반대로 관직을 버리고 남으로 낙향해서, 지례 삼도봉 대금산 구남천등에서 은거자정 하였다.
북천송악을 바라보고 홀로 슬픔의 눈물을 흘리니, 세상사람들은 절의군자라 칭했다.
순조 병술년(1826년)에 대금산 중간쯤에 단을만들어, 매년 10월8일에 제향하였다.
경술년(1970년) 설단사적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전주이은상이 지었다.
경신 1920년에 단산에 묘원당을 세워서 단소를 옮겨 제향을 받들었다. 계유 1993년에 한송정을
서북편 와야곡 남쪽기슭에 옮겨 중건하여 매년 10월초4일에 봉향한다.
병자1996년에 당앞에 유허비를 세웠는데,비문은 성군관장 경주 최근덕이 짓고. 글씨는 철학박사 진성 이완제가 서했다. 같은해에 사적비를 세우고 비문은 외후손 문학박사 청송
심제완이 짓고, 글씨는 외후손 창원시장 평산 신상철이썻다. 매년 10월4일 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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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17대 평정공 노촌 이약동. 평정공 노촌 이약동은 1416년 태어나서, 1493년 별세해서 향년 78세수를했다.
조선전기 김천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벽진, 호는 춘보, 노촌, 평정이며. 특히 평정은 임금께서 하사하신 시호이며. 초명은 이 약동이다.
할아버지는 군기소감을 지낸 이존실이고, 아버지는 남해현령을 지낸 이덕손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고흥 유씨이며, 외할아버지는 공조전서를 지낸 유무이다.
부인은 정부인 완산 이씨이며, 장인은 안변부사를 지낸 이지명이다.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첨지 이경원, 통정 이승원, 좌랑 이소원이고, 사위는 상장군 김순성, 여윤성, 사직 김예강, 현감 강효순이다.
이약동은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인, 하로촌에서 금오산의 정기를받고 태어났다. 초명이 약동인 이유는, 아들을 얻기위해 금오산 약사암에서, 정성을 드린것에서 유래한다. 어려서 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절개가 곧 았으며, 김종직, 조위등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1441년 세종 23년, 진사가 되었으며, 36세가되던 1451년 문종1년에, 증광시 정과로 과거 급제하여, 사섬시 직장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을 거쳐, 황간 현감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면서 청백리의 기틀을 다졌다.
1458년 세조4년, 유장으로 천거 되었고, 특별히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459년 세조5년에 부모님이 연로하여 사직 하였으나, 청도군사로 봉양을 허락받고, 지극한 효성을 보여, 주위로부터 명망을 얻었다. 1461년 세조7년 부터는, 청도 군사직마저 사임하고, 부모님 약을 직접챙기며, 모시기를 한결같이 하였지만, 다음해에 돌아가셨다.
1464년 세조10년에, 상기를마치자 선전관으로 복직 되었고, 이해 종부시정을거쳐 당상관이되어, 귀성 절제사가되었다.
1467년 사대를이끌고, 이시애 토벌에 참여하여, 종고대 북청에 주둔하면서, 전공을 세웠다.
1468년 세조14년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1470년 성종1년에 제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산천단을 이설하게하고, 제주의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불법을 중심으로 민폐를, 말끔하게 제거하였으며, 공진하는 물건의수량을, 감하는등의 선정으로, 목민관의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 칭송과 명성을얻었다. 제주도민은 그의 행적을, 기리기위해 곰솔공원에, 사적비를새겨 지금도, 은공을 기리고 있다.
1474년 성종5년 경상 좌도군 절도사가되어, 제주도를떠날때 평소 착용하던, 의복과 기물을 그대로두는 것은 물론, 말채찍 조차도 관물 이라는이유로, 성을떠나면서 성루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이 일은 후임자들에게, 아름다운 경계가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채찍이 없어진 후에는, 백성들이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 이를 기리고자하였다. 그 바위가 바로 괘편암이며, 이 일화는 지금도 제주도민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주도를떠난 배가, 갑자기 풍랑으로, 파선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약동은 이것이 하늘을속인 벌이라여기고, 배 안을 살펴 자신도 모른채, 실려 있는 갑옷을 찾아냈다. 갑옷은 부하들이 전별, 선물로 몰래실은 물건이었다. 이약동은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갑옷을 강물에던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투갑연으로 상세한내용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실려전한다.
1477년 성종 8년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법제적인 언론활동은 물론,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제주도의 말을훈련시켜, 봉진하게 하였고, 수령을 문무로 교차하게 하였다. 선군의 역을 덜어 주게하였고, 경상도의 군량비축과, 중국물건의 무역 금지와 하삼도의 축성과 경상도의 군수확보,방안등은 그의 덕택이었다. 첨지 중추부사가 되어, 천추사의 직임을띠고, 북경에 다녀왔다.
1478년 성종9년에, 귀국하여 경주부윤이 되었고, 1482년 성종 13년에 호조참판으로, 중앙정계에 돌아왔다.
1485년 성종16년에, 동 지중추 부사가 되었으나, 나이가 70세가 되어 치사하기를, 여러차례 간청하였으나, 성종은 허락하지않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제수하였다. 이때 수적을 체포하는등, 민폐를 제거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1487년 성종 18년에, 한성 부좌윤이 되어, 한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성종의 특지로, 이조참판이 되었다.
1489년 성종 20년에, 이조참판의 임무가 가볍지 않고, 70세가 넘어 정신이 흐려질 뿐만 아니라, 용렬하고 어리석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직급이올라, 개성유수가 되었다.
1490년 성종 21년에는, 자헌대부로 직급이올랐으나, 나이가 개성유수의 직임을 감당하기에 어려움이많아, 결국 병을얻은끝에 1491년 성종 22년에 사직이 허락 되었다.
이에 이약동은 곧바로, 고향 김천으로 돌아왔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청렴 결백하였고, 은혜로운 정사가,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았고,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으나, 유유자적한 생활을하였다.
78세가되던 1493년 성종 24년에, 세상을떠났는데, 여생을 마치기를 이약동같이, 한사람도 세상에 드물다고 평가하였다.
저서에는 노촌실기가 있다.
묘소는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묵방골 끝자락에 있다.
이약동이 세상을떠나자, 성종은 정무를 중지하고, 시호 평정과 함께 부의를보내, 예로 제사를지내게 하였다. 1514년 중종 9년에 ,좌의정 정광필이 청백리를 천거하였다.
평정공의 후손으로는,
통정 이승원의 후손인 현감 이후경과 세마 이홀, 유산 이정매, 경수당기를 지은 일하정 이학준은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좌랑이소원의 후손으로는 판서인 충숙공, 이상길이 절의로 이름을 날렸으며, 평사 이상철, 참지 이상급, 감사 이상일, 지사 이경, 승지 이인이 있다.
김천시 성내동에 있었던, 경렴서원과 제주도 귤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제주도의 곰솔공원에, 사적비가 세워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영혜사[제주]와 청백사도 세워졌다.
하로서원은 벽진이씨 집성촌인 양천동 하로마을에 있는 서원으로, 노촌 이약동을 배향 하기 위해 1984년 노촌당 옆에, 청백사를 건립하면서 하로서원으로 개창했다.
하로서원의 근원은, 1648년 인조26년 감천면 금송리 원동마을에 세워진, 경렴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이약동, 김종직, 조위등 3인을 제향했다.
1673년(현종14년) 인근의 이아리로 옮기면서 최선문, 김시창을 추향하고, 1758년(영조34년) 김천 자양산 현 김천시 성내동 161번지로 이전하고, 1778년(정조2년) 매계의 후손인 조유를 추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었는데, 훗날 서원복원을 위해 오랫동안 논의를 해왔으나, 성사되지 못하다가 양천동 하로마을의 벽진이씨 문중에서, 1983년 하로마을 노촌당 옆에 이약동의 위폐를 봉안한 청백사를, 준공한 후에 하로서원이라 이름했다.
노촌당은 하로서원의 강당으로 후손들이 1845년, 이약동이 관직에서 물러난후에 말년을 보낸, 유허지에 건립하고 문중 구성원의 회합장소로 이용했다.
1983년 사당인 청백사와 동·서재가 세워져 서원의 면모를 갖추기 전인, 조선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는 서당으로 운영되었고, 양천 초등학교가 개교되기전인 1940년대 말에는, 임시 초등학교로 사용되기도 했다.
청백사는 하로서원의 사당으로, 평정공 노촌 이약동을제향하고 있다.
노촌실기에 1648년 노촌의 현손으로 수군첨절제사를 역임하고, 감천면으로 낙향한 이홍명의 후손들이 선조인 이약동을 기리기 위해, 청백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백사는 훗날 김종직, 조위와 함께 이약동의 위패를 봉안한, 경렴서원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에 오랫동안 서원 복원운동이 전개되던 중, 1983년 벽진이씨 문중에서 이약동의 위패만을 모신 청백사를, 선생의 출생지인 양천동 하로마을 노촌당 옆 에 세웠다. 강당앞에 설치된 외삼문을 통해 진입한 후에, 다시 내삼문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서원건물 배치 양식과 달리, 하로서원은 사당으로 진입하는 영은문이라는 별도의 외문 과, 숙경문이라는 내삼문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염수료는 하로서원 기숙사인 동재로서, 1981년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에 있던, 재실을 이전해 건립했다.
필유재는 하로서원 기숙사이다.
평정공 노촌 이선생유허비는
강당인 노촌당과 사당인 청백사 사이에 있는 유허비는, 양천동 하리 199번지 노촌선생 의 생가터에 1846년(헌종12년) 세워졌던 것을, 198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비각을 세웠다. 이약동의 외손으로 형조판서를 제수받은 홍직필이 찬하고, 이조참의 이석찬이 글을 썼다.
노촌 이약동 신도비는 후손 봉조하 이세근이 지었는데, 하로서원과 더불어 김천 지방문화제로 등재되어 노촌 이약동의 청렴결백한 청백리 정신을 받들고있다.
노촌기념사업회는 노촌 선생의 연구 자료의 수집, 발간, 학술경연회 개최, 노촌 선생 유적지 복원 및 관리사업, 노촌 청백리 상 제정과 표상을 위한 사업, 노촌 청백리 백일장 대회 지원, 청백리 테마파크 조성을 위한 사업, 청소년 교육과 수련 사업, 노촌선생 제주목사 재임시 선정에 따른 행적과 산천단 관련 제주지역과의 협력사업, 노촌 춘향제의 전통 제례 방식 전래 사업, 기타 부대 사업 등을 진행하게 된다.
이러한 사업을 통하여 공직자 사회에는, 공무원 개개인에게 청렴결백 정신을 고양시켜, 부정부패를 배척함과 동시에 국민의 공복으로서, 봉사와 희생정신을 진작시키고, 자라나는 청소년들 에게도 청백리 정신을 일깨워 주고, 체험토록 교육하여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동량으로 육성하는데 일조하기 위하여, 사단법인 노촌기념사업회를 설립해서 운영하고있다.
매년 3개부문에서 청백리 인재를 선발하여 청백리상을 수여하고,또한 백일장 글짓기대회도 진행하고있다.
필자와 관련에서는 평정공 2남 승원의 후손이며, 선조 29대 일하정 이학준공은 이약동의 노촌실기를
편찬에 참여했다고 기록에있고, 부친께서는 하로서원 중건위원으로 참여했다고 중건비에 기록되어있다.
매년 10월3일 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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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판서공 승원 (평정공2남)
유명 조선국 자헌대부 병조판서공 신도비문 병서.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오이도 총부부총관,
이인고 삼가지음.
공의 휘는 승원이고,자는 선부이며,성주의 벽진 이씨인데,
벽진 장군 총언으로 부터 시작하여 벼슬이 이어지면서 고려조에 빛났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희목은 참의를 증직 받았고,군기소감 휘 존실은 참판에 증직을 받았으며,
남해 현령 휘 덕소는 판서에 증직을 받았고, 휘 약동은 이조 참판으로서,
지중추부사에 올라 청백리로 녹훈되어, 평정의 시호를 받았으니,
맑은 덕과 편안한 마음으로, 은퇴 함으로써 바르고, 깨끗한 인망을 일세가 복축했으니,
이는 공의 고증조를 칭찬하는 말이다.
어머니는 완산이씨로, 부사 지명의 따님인데,
공의 생존 년월과 관직 이력은,세대가 약간 멀어 상세하게 규율함이 없지만,
초계 이복로가 지은 우우정기와, 처사 신성중과 지평 이명기가 지은,
여현정 행장의 서말에 한두 가지의 다양한 근거가 있으니,
공은 1474년 성종 갑오에 장재로 천거되어,
무과에 올라 이십년을 출입 하여, 병조판서의 지위에 올랐다.
계축 1493년 선고에 상을 당하였고, 갑인 1494년에 애달픈 그리움과,
슬픔으로 복을 마친 후, 불행히도 연산군이 임용을 가려서 하는, 피해를 입어 무리로부터,견책을 받아 선전간에 강등 부처 되었다.
그러니 벼슬자리가 즐겁지 못하여, 합천 상가의 장단동으로 물러나, 자취를 숨기고,
두문 불출하여 9년이 지난, 임술 1502년 수직으로 통정 대부에 올랐다.
가정 정해 중종 22년인,1527년 집에서 돌아가시니,사는마을 뒷산, 계좌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공의 장자 유온의 우우정기와, 공의 현 손 여현정 도순에 대한 초계 이복로와,
처사 신성중과 지평 이명기 등, 당시의 덕망 큰아들이 이와같이 찬술한바 있으니,
의당히 증빙되어 믿을만하다.
배위는 진산 강씨로 장사랑인 우성의 따님이고, 묘는 공과 더불어 쌍분으로 하였으며, 사남 삼녀를 두었는데, 유온은 통정대부 이천부사이며, 유량은 호군이고, 유검은 도사이며, 딸은 노적 오죽헌 박생화이다.
유온은 3남인데, 건은 첨중추이고, 엄은 부호군이며, 우는 호군이다.
유량의 아들은 통인데 참봉이고, 유검은 2남인데, 준과 운이며, 운은 참봉이다.
건은 삼남인데, 구서는 어모장군이고, 붕서는 참의이며, 난서는 통덕량이다.
엄은 3남인데, 석경은 정유에 창의한 부사과로, 참의의 증직을 받았고,
후경은 세마와 음성현감을 지내고, 참의를 증직받았으며, 우의 아들은 천전이고,
통의아들은 진사 희생과 사과 하생이며, 준의 아들은 매생이며, 운의 아들은 진생인데,
현손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지만, 그중에 제일 존숭할 사람을 짚어보면, 음사로는 감찰 효남, 동추 도일,
참봉 도보와 세마 흘, 승지 무, 사용 봉일, 감찰 신일, 참봉 후엽, 감찰 수장, 찰방 진원, 동추 흡, 첨추 능화, 진사 회일과 종성이고, 문과로는 박사 창일과 학유 정화가 있고, 무과의 시매와 시운은 경력이고, 시학은 주부이며,
통정인 도유와 도진과, 광잠과 세엽과, 숭정과 정곤은, 다 수직으로서 승질되었다.
도자, 도희, 속은 학술이 저명하였으며, 수억과 현진이 있다.
정매의 증손인 학준이, 묘에 이끼가 심하게끼고, 글자가 훼손되어 알아볼수 없음으로, 앞으로 비를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께서, 성종조에 지위가 높은신하인데,
연산군을 섬길때와서, 견출을 당하여 직위가 강등된것은, 바로 악한일을 못하게 거역하여, 바로 잡고자하는 뜻 때문이지만, 사세가 이미 멀어 상고하지는 못하고,
다만, 아부하여 비굴하게 순응하지 않은, 사적을 추측하여 알수가 있다고 하였다.
묘표의 짦은 글에는 통정이라 쓰지 않았지만, 성종조에 대사마, 병조판서 이칭의 높은 벼슬을 하지않았다면,
어찌 공사에 이런 유감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금번, 묘도에 세상에 들어난, 병조판서의 원래 직위를 쓰는 것은, 성종조의 성세를 맞아 숭상해야 할, 사려한 직함을, 내가 새겨서 후세에 밝게 하고자 함이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건데, 그런 사람들이 아니면,그뜻을 돌아보기가 어려울 것이기에, 우와같이 주워 모우고, 이어서 찬양하노니.
붓을 놓고 무과에 등단하니. 무용이 헌걸차고 의연하였다.
장군으로 유업 남기고, 용퇴하여 검광의 자취 남겼네.
한가롭게 생을 마치니. 평정공의 가법이네.
발부를 봉하여 집을 삼으니.금성의 기슭이라. 여기가 유택이니.
선량한 후손들은 의탁함이 있을것이다.
내가 지금 찬양글을 지으니. 그기에 여러가지 비적이 나타날 것이다.
라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오이도 총부부총관, 이인고가 삼가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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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거창 입향조이신 20대, 휘는 건, 자는 맹강, 호는 감천 또는 오담선조 께서는. 평정공 청백리 노촌 약동의 증손이요, 합천 판서공 승원의 종손 이며, 이천부사 우우정 유온의 장자 이시다.
공은 1502년에 태어나서, 1589년에 별세를해서 향년 88세 수를 하셨다.
공의 슬하에는 장남 구서는 어모장군, 2남 붕서는 증공조참의 , 3남 난서는 통덕량이고, 여는 하나이다.
1541년에 장남 귀서는,조부와 같이 합천 장단에 살게하고, 세자녀를 데리고 거창으로 이거해서 살게되어,
거창 입향조가 되었다.
당시 공의 외가 문화유씨는 아들이 없어, 외가 일도 도왔다.
3남 난서는 가조로 분가시키고, 녀는 동래정 응두에 출가시키고, 2남과 함께 거창 오류동에 살면서,
선조들의 누명이 안가도록,자손 교육은 물론 인근 청년 교육에 만 힘쓰고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안했다.
이 사실을 조정에서 알고, 통정대부 지중추부사, 은칙이 내리셨다,
문헌록에는
공께서는, 천성적인 자질이 순수하게, 아름답고 자상하고 개제하였으며,
봉양 함은 그 효도를 다하였고, 우애는 그 즐거움을 다하였으며,그 마음을 처리함은 바르고, 사람을 대우함은 화목 하였으며, 일을 논의함에 이르러서는, 뜻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니, 향당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
부사공이 이천의 임지에서, 세상을 떠나자,공은 부음의 소식을 듣고 치상하려,
달려가다가 길에서 여러 도둑을 만났으나, 지극한 정성으로 애통하고, 호곡하니, 도적이 말하기를, 이는 부사의 아들이 로다 라고 하고는 물러가고 감히 범하지 않았다.
공이 만약 벼슬에 뜻이 있었더라면, 높은 벼슬을 하던, 선세의 주손으로서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였겠느냐 마는, 구원에서 분수를 편안히 여기면서,하늘이 정한 연세를 마치셨으니,
공의 청렴함과 단단함을 가히 볼 수 있으리라.
고집스러운 품성을, 부여받아 효도와 우애는, 천성적으로 완전하였네.
전원에서 진심을 보전하였고, 명리에는 완전히 잊으셨네.
울창한 저 소나무와 추나무는,교산의 남쪽이요,
천만년토록 그것이, 영원히 무강 하리라. 라고 임진부가 묘비에 기술했다.
오담재 연혁(1987년10월. 오담공 종중서류)에는, 오담공 후손으로 3자손의 지파, 총571세대의 명단과 생년을 기록 했다.
장남 귀서 어모장군의 후손은 장단에 57세대가 살고, 차남 붕서 공조 참위공은 개화에 178세대 살고, 3남 난서 통덕량은, 가조. 성기에 336세대를 이루고 살았다.
오담, 감천공의 재실은, 오류병사, 경모재, 오담재의 3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오담제사 연혁으로는,
1841년 8월에 지금의 대성중학교 뒤에, 3칸 즉 방2, 대청1의 제실을 신축하고, 이름을 오류병사라 지었다.
그러나 우기때 마다, 자주 침수가 되어, 1882년에 대성 고등학교 뒤편, 엉덕밑에 그대로 이전 했는데,
가조 통덕량, 난서공의 10세손 승휴공의, 큰 찬조가 있었고, 난서공의 9세손, 일하정 학준공이 경수당기를 근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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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21대 이난서선조께서 거창 가조 동례촌의 입향조 이시고,평정공의 후손이시다. 동례촌 남쪽으로 박유산이 있는데,
옛성현의 충절의 정기가 서려있는 유서깊은 산이 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신윤지(愼胤智)가 사직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예 를 숭상하므로 예곡(禮谷) 또는 예동(禮洞)이라 하다가 박유산 동쪽 마을이라 하여 동례라 하였으며, 일명 동유골(東儒谷)이라고도 한다. 속칭 학당동(學堂洞)과 사량동(士良洞)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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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당동(學堂洞)은 조선 인조때 과거급제 등제한 23대 성균관 승문원박사 이창일(李昌一)이 강학한 학당이 있어 이름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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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이정매선조께서는 시조공 과 고향의 성현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유산이라는 아호를 지으시고, 박유산 끝자락에 유산재실를 짓고, 유산정열 이라는 현판을 걸고, 노년을 보내시며, 유산집 문헌2권을 남기셨다.
이뜻을 이어받아 29대 이학준선조께서는 벽진이씨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를 찬하시고, 청백리 평정공 노촌 이약동선생의 2남이신 합천 판서공 휘승원공의 재실인 영모재를 창건하시고, 영모재기를 찬하셨고, 노촌 이약동선생의 노촌실기 편집, 거창입향조 20대 감천공 이건재실에 경수당기를 찬하시는등, 일생을 초야에 묻혀서 경학을 깊이 하시었다, 그학덕을 높이평가 해서, 직장공 대성리학자이신 화서 이항로 선생으로 부터 일하정호를 지어주시었다. 일하정집 문헌 4권을 남기셨다.
부친이신 33세 동강 이창기님은 선조님의 업적을 받들어 일생을 경종수족의 정신으로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에 느티나무 한그루를 기념식수하시고, 대종회, 대장군, 평정공, 판서공, 감천공 그리고 동례촌의 난서공까지 두루 살피시며, 크고 작은 종사에 참여하시었다.
이에 시조공과 선조님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기위해서 벽리종인의 유림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 가문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동례촌 박유산 아래 태어나신 유산선조와 일하정선조의 학덕을 이어가고, 벽진이씨의 혼을 담아서 호를정한다.
장남 이선숙은 유벽儒碧 (선비유 푸를벽)
차남 이선동은 유진儒珍 (선비유 보배진)
.1. 송월 선숙............부산
동아대 대학원석사.
국민훈장 홍조장
전 부산 북부교육청 교육장 , 고등학교교장,
입학사정관(동아대 총장)
부산검찰청 형사조정위원회 조정관(검찰총장)
2. 동석천 덕명 선동.....서울
동아대 대학원석사 / 박사과정수료 ,
기업 연구소
벽진이씨 승지공 가조회장
벽진이씨 서울 벽산회 회장
벽진이씨 서울화수회 부회장
벽진이씨 평정공파 종회 이사
벽진이씨 대장군 종회원
동례촌의 선조님의 얼을 이어받고, 벽진이씨의 혼을담아서
3남 이선수는 동벽東碧.......거창
4남 이선규는 동진東珍.......가조
이라 호를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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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뜻 풀이
儒자는 ‘선비’나 ‘유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儒자는 人(사람 인)자와 需(구할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선비란 학식이 있는 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이 유교를 이념적 기반에 둔 이후 유교나 선비는 조선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됐었다. 儒자에는 그러한 의미가 잘 담겨있다. 儒자에 쓰인 需자는 ‘필요하다’나 ‘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필요하다'라는 뜻을 가진 需자에 人자가 더해진 儒자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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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자는
‘푸르다’나 ‘푸른빛’, ‘푸른 옥’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碧자는 珀(호박 박)자와 石(돌 석)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호박이란 소나무 송진이 화석화된 것을 말한다. 고대부터 호박은 보석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보석을 뜻하는 珀자에 石자를 더한 碧자는 ‘푸른 옥’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로 ‘푸른빛’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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珍자는
‘보배’나 ‘보물’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珍자는 玉(구슬 옥)자에 㐱(숱 많고 검을 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㐱자는 머리의 숱이 많고 윤기가 흐른다는 것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러니 珍자는 반짝이고 윤기가 나는 ‘보물’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珍자는 본래 보배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지만 맛있는 음식을 보배에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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