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의 빵이다”
1열왕 19,4-8; 에페 4,30-5,2; 요한 6,41-51 / 연중 제19주일; 2024.8.11.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나무가 많이 심어진 곳에서는 한결 시원한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에게 식물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새삼 알게 되는 이즈음입니다. 식물의 입사귀들이 강하게 내려 쬐는 햇볓을 가려줄 뿐 아니라 뿌리와 줄기에 수분을 저장했다가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공기 중에 증발시킴으로써 식물 자신의 체온도 일정하게 유지하는 반면에 기온도 내려가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유용성은 이뿐이 아닙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작용은 광합성 작용입니다. 뿌리에서 끌어올린 수분과 입사귀에서 빨아들인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합성해서, 식물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양분과 더불어 공기 중에 발산하는 산소 덕분에 식물을 먹이로 하고 산소로 호흡하는 동물과 인간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실로 광합성 작용은 생명들이 살아가는 전체 생태계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현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19주일의 복음 말씀도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매우 다양한 비유로 설명해 주셨는데, 이 생명의 빵에 관해서는 직설법 어조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 말씀을 풀이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에너지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힘을 받은 이들이 그 힘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설적으로 말씀하시고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하셨으며, 교회가 계승하고 있는 성체성사의 진리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이치를 영적인 광합성 작용에 비유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의식의 진공 상태에서 성체를 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체를 할 때 신자들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온갖 체험과 거기서 얻어진 깨달음을 마치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뿌리에서 물을 끌어올리듯이 끌어올립니다. 그 체험과 깨달음이 선으로 가득 차고 하느님의 은총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신자들은 영성체를 하면서 기쁨과 감사의 은총을 받게 되고, 그 체험과 깨달음이 회개와 반성으로 가득 차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면 멀어졌을수록 신자들은 영성체를 하면서 용서받은 마음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성체이지만 매번 그 느낌이 같지 않은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 때문입니다.
영성체를 하는 신자에게 다가오는 성체에는 예수님의 온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영성체를 하면서 신자들은 예수님의 빛을 받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고갈되지 않는 빛으로 예수님은 성체로서 우리에게 들어오십니다. 이 순간의 예수님 역시 그때마다 다릅니다. 다른 이유는 그날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말씀을 듣고 떠올린 묵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또 어떤 때는 부활의 위로로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어떤 경우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느냐고 야단치시는 질책으로도, 또 어떤 경우는 내가 세상을 이겼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으로도 다가옵니다. 사순시기가 다르고 부활시기가 다릅니다. 대림과 성탄 그리고 연중시기에 다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미사를 집전하면서 강론하는 사제는 영성체를 하는 신자들이 그날 미사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말재주와 글솜씨로 봉사합니다. 이 빛이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하늘의 기운이 이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자신만의 성화 노력으로 그치지 않도록 재촉하십니다. 당신 자신도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오셨고, 그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셨거니와 당신을 성체로 영하는 신자들 역시 세상의 죄를 없애는 대속적인 대열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이는 마치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입사귀에서 공기 중의 빛을 빨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이산화탄소까지 흡수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인체에는 해로운 이산화탄소가 식물에는 전혀 해롭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섭리입니다. 그래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식물이 인체와 동물에게 필요한 산소를 배출하듯이, 영성체를 통해서 힘을 얻은 신자들은 자기의 탓이 없이 생겨난 세상의 죄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받아들일 힘을 받아서 고귀한 희생을 감내해 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체를 통해 거룩하게 변화된 신자들이 세상에 발산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치명이나 임종을 앞둔 신자들에게는 이 성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노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죄인들을 자녀로 받아들이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교회는 바로 성체성사의 이 영적인 작용, 즉 대속적인 세례, 십자가의 세례, 성령의 세례를 역사 안에서 계승함으로써 예수님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 앞에서 거부당해야 하는 그 어떠한 죄도 없습니다. 죄를 받아들여 희생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힘,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매우 중요한 사명입니다.
오늘 미사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우들에게 보낸 권고가 바로 이 사명에 딱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이렇게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적인 광합성 작용처럼 자신의 체험과 깨달음을 성화시켜주고, 세상의 죄까지도 받아들여 희생할 용기를 주는가 하면, 빛처럼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주신 기운으로 세상에 나아가 그분의 제자요, 하느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향기를 발산하며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는 그리스도교 활동의 정점입니다.
카르멜산에서 바알신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후, 이제벨 왕비의 군대에게 쫓겨 호렙산까지 가는 동안 꼬박 굶은 엘리야 예언자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하느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열왕 19,4ㄷㄹ) 이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빵과 물을 주셨습니다. 이로써 기력을 되찾은 엘리야에게 천사가,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 19,7) 하고 재촉하자, 엘리야는 밤낮으로 사십 일 동안 걸어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사십 일 동안 그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음식으로 살아간 것이고, 그 결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이야기는 오늘날 성체성사의 은총, 즉 하느님을 위하여 세상의 악과 맞서고 기진맥진한 믿는 이들에게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까지 인도하는 은총을 서사적으로 일깨워 주는 고사(古事)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는 제목의 회칙을 펴내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그 회칙의 말미에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참된 성체성사 신심의 위대한 해석자들인 성인들의 학교에 우리도 자리를 잡읍시다. 그들 안에서 성체성사 신학은 생생한 실재의 빛을 얻습니다. 이 빛은 전염되며, 이를테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특히, 그 누구보다도 성체성사의 신비가 빛의 신비로 드러나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귀 기울이도록 합시다.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 있는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게 됩니다. 성모님 안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새로워진 세상을 봅니다. 육신과 영혼이 하늘에 들어가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이 지상에서 성체성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며, 어떤 면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선취입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의 소박한 표징 안에서, 우리 여정의 힘과 양식이 되시어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신비 앞에서 이성은 한계를 느끼지만, 성령의 은총으로 빛을 받은 마음은 요청된 응답을 명확히 이해하고, 무한한 사랑과 흠숭에 빠져 듭니다. 탁월한 신학자이며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노래한 정열적인 시인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희망을 가지고, 기쁨과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 마음의 목적지를 바라봅시다.
착하신 목자, 참된 빵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오소서, 천상의 빵이시며 착한 목자,
저희에게 자비의 표지를 보여 주소서.
저희를 길러 주시고 지켜 주시어,
불멸의 나라에서 당신의 빛나는 영광을 보게 하소서.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현세의 양식이시며 후세의 안식이신 주님,
오셔서 저희가 주님의 초대된 손님,
주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과 사는 성인들과 함께
영복을 누리는 벗이 되게 하소서.”
첫댓글 아멘,알렐루야~~^^
오랜 만에 오셨군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