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신앙, 나라와 교회
예레 1,17-19; 마르 6,17-29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2024.8.29.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레미야나 세례자 요한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거역하는 무리들과 맞서야 하는 운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시며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예레1,18)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예언직 소명을 주신 의인들의 등을 무작정 떠밀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예레 1,19)이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언자의 운명에는 박해라는 어려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행운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더 큽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로서 활약했던 시기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야 했던 암울했던 때였으므로, 지도자들의 죄악 탓으로 큰 불행을 겪게 된 백성을 위로하는 일이 먼저이긴 했지만, 그러고 나서는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백성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결국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 이어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드디어 메시아께서 오실 때가 임박했음을 알렸고, 죄악에 대해 단호한 결별을 호소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만, 이 역시 예레미야처럼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백성에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이 요르단 강물로 죄를 씻는 세례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회개에 대한 호소를 외면하고 여전히 죄악을 저지르던 자들, 특히 헤로데 영주에게는 추상같은 어조로 단죄하며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다시피, 억울한 죽임을 당한 요한과 의인을 잔혹하게 죽인 헤로데는 아주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요한은 믿음이 깊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독신 사제들의 수도원으로 알려진 에세네파 공동체에서 사제로 살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유다인이 아닌 이두메아인으로서 로마로부터 통치권을 받아 유다인들을 다스리던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두 형제와 더불어 통치권을 나누어 받아 영주로 살았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즈카르야요 어머니는 엘리사벳으로서 늘그막까지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아들을 낳으리라는 전갈을 받고 요한을 낳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아기가 자라서 장차 어떤 인물이 될까 하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아버지였던 헤로데 대왕이 난폭하고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정을 보며 자랐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의심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비극의 가정사 속에서 보고 배운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악일뿐이었습니다. 너무도 극심한 선과 악의 대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요한과 헤로데가 대비되는 지점은 탄생 과정이나 성장 과정보다 성장해서 보여준 활약상입니다.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낙타 털옷 같은 거친 옷을 입고 들꿀 같은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독신으로 예언자의 삶을 살다가, 요르단 강으로 나와서는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갈릴래아와 페레아를 위임통치하는 영주로 임명받아서는 느보산에 있던 왕궁에 살면서 호사스런 생활을 한데다가 자기가 정략결혼했던 나바테아의 공주를 내쫓아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살았습니다. 그러자 과거의 장인이었던 나바테아의 왕으로부터 침공을 받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요르단강으로 찾아온 유다인들에게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하면서 하느님을 믿고 죄를 끊어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래서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래 끊겼던 예언자의 맥을 이었습니다. 이런 요한이 부도덕하고 엉터리로 외교하는 헤로데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부도덕한 사생활과 엉터리 외교를 비판하던 요한을 체포하여 참수해 버렸습니다.
본시 요한은 세례를 베풀며 진리와 정의를 외치던 와중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이렇게 대중에게 그분을 소개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리고는 데리고 있던 제자들을 주저없이 예수님의 제자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계시다는 소문을 듣자 자신이 참수해 죽여버린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힐 정도로 소심한 인물이었습니다.
희대의 악인 헤로데로 인해 더욱 돋보인 요한의 면모는 진리와 정의를 외친 예언자의 그것입니다.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러했듯이,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권력자와 백성 앞에서 전달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던 예레미야는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 같은 권력자들은 물론 이들을 추종하여 죄에 물들었던 백성과도 맞서 싸웠습니다. 요한 역시 이 노선을 따라 비록 육신을 죽일지언정 그 뜻은 꺾을 수 없었던 헤로데에 맞섰습니다.
이렇게 요한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의 억울하고 의로운 희생을 슬퍼하시면서도 그 뒤를 이어 백성들에게는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시면서 불의한 권세가들에 대한 서슬 시퍼런 경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당신 제자들에게는 의로움 때문에 받는 박해를 각오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왜냐하면 박해를 받을 각오로 의로움을 행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이어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고 격려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도록 교회가 가르치는 직무가 세 가지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고 이를 전례에서 봉헌하는 사제 직무, 가난한 이웃에 대한 봉사를 실천하는 왕 직무, 그리고 사회악에 맞서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또 말씀대로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예언자 직무입니다. 이 세 가지 직무에서 모두 희생이 뒤따릅니다만, 그 중에서도 예언자 직무로 말미암아 권세가들에 의해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박해가 두려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고 하시면서 십자가의 영성을 일러주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어쩌다가 재수없이 권세가들에게 밉보인 예언자들이 예외적으로 치루는 희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단언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십자가를 걸어 두는 것이며, 기도를 시작할 때면 십자 성호를 먼저 긋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하다가 대사제들에게 불들려 가서 매를 맞고 모욕을 당했을 경우에도,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 5,41)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모욕을 당해서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를 보속할 수 있었던데다가 드디어 자신들도 스승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된 바로 그 점을 두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마만큼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예레미야나 세례자 요한은 그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솔선수범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십자가 희생과 수난으로 사제 직무의 봉헌과 왕 직무의 봉사도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희생과 수난 속에는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구원의 영적 효과도 있고, 지나쳤거나 어긋났던 점을 바로 잡아주는 정화의 효과도 있으며, 의로웠으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주눅들었던 비겁한 자세를 강화시켜주는 수련의 효과도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당시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에 살던 유다인들은 요한이 증거한 정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가 외쳤던 진리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처럼 정의로움을 사회적으로 증거하지 못하면 진리의 메시지는 가신성을 입증받지 못합니다.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 역시 천주님만을 믿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조정이 박해하니까 재산은 물론 신분상의 특권이나 명예도 다 버리고 신분상으로 천했던 이들과 ‘교우’라고 부르면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공동체의 삶을 사회적으로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존귀하다는 믿음을 실천으로 입증했으며, 남존여비와 빈부차별 같은 불의한 이데올로기도 내팽겨치고 남녀동등과 빈부나눔의 정의를 증거해 보인 세월이 무려 백 년입니다. 이 한반도 땅의 문명을 앞당긴 예언자적 면모가 이 교우촌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진리를 믿고 어떤 정의를 증거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 선조들에 비해서 오늘날의 천주교 신자들은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정의로운가요? 헤로데의 불의한 권력에 분연히 맞섰던 요한의 수난을 기념하는 오늘은 114년 전 나라의 국권을 빼앗긴 국치일입니다. 식민통치에서 해방이 된 오늘날에도 일본은 강제병합을 정당했다고 강변하는 역사 왜곡을 자행하면서, 이에 동조하는 친일매국세력을 통하여 독재와 분단극복 노력을 방해하는 등으로 일본의 부당한 영향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권 자체가 친일매국 행각을 대놓고 하는 형편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표적이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