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
1코린 2,1-5; 루카 4,16-30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2024.9.2.
전례력 연중시기의 복음은 마르코, 마태오에 이어 루카 복음으로 넘어왔습니다. 오늘 복음인 루카 4장은 사실상 루카 복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대주제가 ‘하느님 나라’인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선포된 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루카는 성경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알아 듣기 쉽도록 실제로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소개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라는 이 주제는 사실 구약시대의 대표적 예언자인 이사야가 3대에 걸쳐 예언으로 소개한 하느님 말씀의 핵심이었습니다. 이사야 신학의 중추를 이루는 창조 신앙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인류 역사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61,1-2)를 읽음으로써 당신의 메시아 사명을 천명하신 예수님께서는, 3년 내내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알리셨습니다. 토양이 비옥한 만큼 착취와 억압이 심했던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들에게는 치유의 기적으로, 마귀 들린 이들에게는 구마의 기적으로 도움을 주시는 한편 억눌린 백성들에게는 이 기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양치기들에게는 양의 이야기로, 주부들에게는 누룩의 이야기로, 농부들에게는 씨 뿌리는 이야기로, 상인들에게는 진주 이야기로, 어부들에게는 그물의 이야기로 말씀하시는 등 듣는 이들의 직업적 경험을 고려한 사회적 소재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연을 압축한 대목이 이렇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주어진 부와 권세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던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던 부자 청년이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듣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가야 했던 사정이 이를 대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셨고, 이 십자가와 부활 예고를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러한 복음, 즉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눈 앞에서 그분이 하느님의 권능에서만 나올 수 있는 능력으로 수차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고도 이 복음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군중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이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이를 상징적으로 알려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마지막 시기에는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셨고 십자가와 부활 예고는 그 백미였습니다. 종말에 관한 설교를 하시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에 따라서 우리의 내세 운명이 달라지리라는 최후 심판 이야기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파스카 축제일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드시면서 성찬례를 제정하는 한편 당신을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당부 역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로 하느님의 역사를 계승하라는 유언이었습니다.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사 소명을 받게 된 바오로 역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라는 계시를 잊지 않았기에, 당시 그리스에서 번영하던 도시 코린토에 가서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찾아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즉,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1코린 1,26)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 오던 이스라엘에서 유다인들조차도 부와 권세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착각하던 차에,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다신교 풍습에 젖어 우상을 숭배하던 그리스 이방인들에게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가 하느님의 역사임을 깨우쳐 주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고”(1코린 2,1)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백은 자기 자신도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했던 것처럼 배척과 몰이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마음 먹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도 사도 바오로는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생활비와 활동비를 천막 만드는 노동으로 충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막심한 고생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현지 이방인들로부터 공동체를 이루게 될 만하면 바리사이파 유다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현실에서부터 복음 선포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마치 천지가 창조될 때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는 창세기의 진술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영은 심연을 덮고 있는 어둠 속에서 감돌다가 복음선포자의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3-4)
복음을 선포하시는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도구로써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힘이 복음 선포의 전체에 99%나 되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자 짊어지는 십자가의 무게가 복음 선포의 일부인 1%에 지나지 않는 적은 비중이라도 이것이 없으면 복음은 선포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는 하느님의 영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영을 받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고, 바오로 역시 그러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문명입니다. 변화무쌍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기후와 기상을 비롯한 자연 현상인 것처럼, 힘과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류의 패권 역사 현상 역시 선과 악이 뒤섞여 충돌하는 가운데 끊임없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나지막한 선의 영향력을 향하여 나선형처럼 아주 조금씩 나아갑니다. 이는 하느님 없이 살아가려는 보통 사람들의 본성이 선과 악이 뒤섞여 모순과 갈등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말씀과 궤를 같이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며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교우 여러분! 이 말씀에 덧붙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