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영과 더러운 영
1코린 2,10-16; 루카 4,31-37
성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연중 제22주간 화요일); 2024.9.3.
서늘한 기운과 함께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섭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와 손길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그분의 존재와 손길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온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영에 이끌려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는 이들은 의외로 적었습니다. 오직 예언자들이 알려준 대로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소수의 아나빔들만 그분을 알아보았고 따랐을 뿐, 다수의 군중은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기는 했던 다수의 군중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에 크게 놀라면서도 이를 듣고 회개하고 믿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그저 병을 고치고 마귀로부터 해방되는 기적에만 관심을 보였을 뿐입니다. 이런 세태는 일찍이 코헬렛의 저자가 간파한 진실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2.9)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 사람들 안에 들어가 있던 마귀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영적인 위계질서에서는 자신들보다 월등하게 높은 계급에 계신 분이시기에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고 꾸짖는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기에 가능했던 영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렇듯 마귀를 쫓아내는 행동은 과거에 활약했던 어떤 예언자들은 물론 당대의 어느 율법 학자도 감히 하지 못했었으므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소문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치유 기적을 목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구마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권위와 그 안에 담긴 힘에 대해 놀라면서도 그에 대해 믿으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인이 되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그들은 단지 기적에 놀라 그 소식을 전하는 구경꾼이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다가 벼락을 맞고 나서 예수님의 권위와 힘을 체험한 바오로는 이 현상을 깊이 숙고한 끝에, 코린토 교우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1코린 2,14-15).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현세적 인간’이란 현세와 내세를 모두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과 이를 소유할 수 있는 권세와 재물의 힘만 알고 있는 무신론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 무신론자들이 그 시대에 코린토에 수두룩하게 많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시는 성령”(1코린 2,10)의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하는 것”(1코린 2,11)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 자신과 그가 복음을 전한 코린토 교우들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으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1코린 2,12) 이 ‘선물’이란, 인간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하시는 사랑이며 또한 이 자비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실천하도록 이끄시는 은총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1코린 2,13)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1코린 2,14) 그들은 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은총을 받지 못했고 현세적인 것들, 즉 물질과 권세와 재산에 눈이 멀어서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코린토 교우들에게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와 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마음’(1코린 2,16)을 간직하기를 호소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더욱이 순교자와 교우촌의 거룩한 전통 유산을 물려 받고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을 수 있는 표지를 다섯 가지나 전해주면서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표지는 말씀과 성찬,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 형성하는 공동체,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영성, 공동으로 경청하고 합의하는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 다섯 표지를 통해 만난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제 직무에서나 왕 직무에서나 또 예언자 직무에서 선포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 살던 유다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믿어 왔으면서도 정작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이 많았던 것과는 달리,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 무신론자를 자처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던 그리스인들처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하느님을 믿지 않은 무신론자,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불가지론자, 자기 머리로 납득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성숭배자, 현세적 이익을 좇아 종교를 상품처럼 사고 파는 기복신앙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알아본 그분의 정체를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며 그리스도의 권위와 힘을 알아봅니다. 교우 여러분! 더러운 영에 물들지 말고 하느님의 영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사람으로서 주변의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