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계시 종교 관념과 강생의 신앙 생활
1코린 4,1-5; 루카 5,33-39 /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2024.9.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고 말씀하셨고,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새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를 통해 복음을 선포하던 자신과 선교사 동료들을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으로 생각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복음과 독서에서 들은 이 말씀이 지닌 의미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 이래 유일신을 믿고 섬기는 유다교가 다신교와 우상숭배밖에 모르던 중동과 유럽 사람들에게 계시 종교의 혁명을 일으켰다면, 그 유다교 안에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혁명적 변화는 인간 사랑 그것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강생의 신앙을 심어준 일이었습니다. 다신교를 신봉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유일신을 섬기는 계시 종교에 대해서 받았던 문화적 충격 이상으로, 인간 사랑을 하느님 사랑과 동일시하는 강생의 신앙은 유일신을 섬겨온 유다교의 신봉자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 충격을 표현하는 물음이 이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ㄴ)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유다교를 신봉해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항의하며 던진 질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이 일으키신 후 이를 기뻐하는 이들, 특히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가난한 이들과 율법상 죄인들에게 찾아오신 하느님을 함께 기뻐하고자 벌이는 잔치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 선포의 산물인 이 잔치를 먹고 마시기만 즐기는 무리의 행태라고 막말로 비아냥거렸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존재와 활동에 담긴 신성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유다교 신봉자들이 보인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요?
세월이 흘러 사도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생활양식을 삼위일체 신앙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동일시하신 예수님도 하느님이시며, 그분을 믿는 이들도 예수님처럼 인간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성령도 하느님이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 신앙을 하느님의 신비로 받아들여 전하면서 관리했습니다. 하느님 신비의 관리가 선교의 다른 표현이었던 겁니다. 이후 서방의 백인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신앙의 고백에 담긴 그 뜨겁고 인간적인 사연에는 눈감은 채로 차갑고 교조적인 독단으로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 다른 대륙의 이방인들에게 선교하였고, 그 결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자 수를 늘리는 데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신앙의 가치를 전파하기에는 대단히 미흡했고 심지어 아시아 대륙에서는 박해를 자초하는 바람에 5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신앙의 가치를 알리기는 커녕 신자 수에서도 미흡하여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선교 현실은 어떠했을까요?
삼위일체 신앙이 이 땅에 전래되었을 때에도 문화적 충격은 불가피했습니다. ‘깨달은 자’라는 뜻의 부처가 하느님처럼 여겨지는 불교와는 계시의 종교적 충격이, 충효(忠孝)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도덕적 가치로 현세적 인간사회를 이상적으로 질서 짓겠다고 하면서도 신분질서로 인간 존엄성을 제한하며 사실상의 국교처럼 군림하던 위선적인 유교와는 인간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동일시하는 문화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충격이 불가피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신앙 선조들은 신분질서를 넘어서서 양반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건설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전국의 심산유곡에 형성된 이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 공동체를 교우촌이라고 부릅니다. 제사금지령에 의한 박해가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 신자들은 배교하여 신앙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재산과 신분과 명예를 버리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스스로 깨달았다는 부처를 섬기는 불교와 다르게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하셨다는 종교 관념, 신분질서로 사람을 불평등하게 차별하는 유교와 다르게 인간 사랑을 하느님 사랑으로 실천하는 신앙 관념을 직접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섭리의 역사는 이렇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심산유곡을 찾아가 교우촌을 건설한 천주교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어 연명하면서,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의 전통을 세웠습니다. 뜻하지 않게 박해가 일어나 치명한 이들의 자녀들은 교우촌에서 함께 키웠습니다. 특히 대부와 대모, 대자와 대녀의 관계가 이 경우에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교우촌의 복음 실천의 전통이 이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마저 감복시켰습니다. 그래서 교우촌은 비밀리에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서양 선교사 신부들은 교우촌끼리 구축된 연락망에 따라 신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순방하며 성사를 집행하였고, 교우촌들 가운데 중심이 되는 교우촌에 세워진 공소가 성사 집행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공소에는 신부들로부터 임명된 공소회장이 있었는데, 회장은 신부를 대신하여 신자들의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돌보는 교우촌의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박해도 종식되고 산업화가 발달하면서 공소들은 본당으로 승격되고 도시에 더많은 성당들이 세워져서 교우촌은 신자들이 순례하는 신앙 유적지로만 남아있지만, 교우촌은 박해시기 치명까지도 가능하게 했던 형제애가 살아있던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요 맥입니다. 유학적 가치관이 심어놓은 바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선비정신과 함께 교우촌에서 체험했던 신앙의 형제애가 없었다면 순교행위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 나라보다 먼저 복음을 전해 받았던 이웃 나라 교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교우촌은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아있지만, 교우촌에서 이룩했던 실천이 지니는 의미는 간직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첫째는, 인간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도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둘째는 하느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도리는 인간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라는 것, 셋째는 인간 사랑에 있어서 으뜸은 우리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 즉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부대로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담아야 할 새 포도주의 생활양식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박해가 종식되고 교우촌도 사라졌지만, 신앙적인 증거의 소명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신앙선조들이 물려주어 우리가 믿는 바 신앙의 의미와 좌표가 이렇습니다. 오늘날 순교 선열들과 교우촌 신앙 선조들을 계승하려는 우리가 말씀과 성사 그리고 사랑의 교우촌을 우리네 현실 안에서 세워야 함을 일깨우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