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으로 가는 문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이사 50,5-9; 야고 2,14-18; 마르 8,27-35 / 연중 제24주일; 2024.9.15.
추석 명절을 앞두고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의료대란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정겨운 가족이 함께 모여 명절을 지내는 일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처럼 한데 모인 가족이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고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해 연도를 바치는 일이야말로 아름다운 풍속입니다. 가족이 한데 모이면 집안의 이러 저런 대소사를 대화로 나누기 마련인데, 그 가운데에는 걱정스런 우환거리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어느 집안에서도 기쁘고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십자가를 짊어진 가족에게 격려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는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와 천국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추방된 일도, 셋째 아들인 셋의 후손들이 첫째 아들인 카인의 후예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일도, 결국 세상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은 악을 없애려 하지도 당하지도 말고 그 악을 피하든지 또는 피할 수 없으면 그 악이 주는 십자가를 견디어 내며 선을 향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세상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보편성 교리이며, 세례성사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 원죄를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보편적으로 악의 공격에 대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윤리를 가르치는 교리의 근거입니다. 세상에서는 악인들이 의인들보다 더 많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착한 사람이 더 고생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의인들과 착한 사람들이 짊어지는 십자가의 공로가 하느님의 진노를 자비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데 있어서 한층 더 야무져야 하고, 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데 지치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더디 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위한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천국의 문을 여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섭리를 깨우치게 하시느라고 삼 년 동안이나 가르치셨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아나빔들에게 메시아의 영광이 아니라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했었습니다. 마치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는 것처럼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한 이사야는 아마도 당시 숱한 아나빔들이 민중으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정을 익숙하게 보고 나서 메시아의 수난 역시 선명하게 예고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표현이 이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5-6)
천국을 위해 믿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기에 야고보 사도는 무척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이 말씀이 믿음으로 의로워 질 수 있다는 성경 말씀(로마 4,1-3; 갈라 3,6-9)과 흔히 대비되어 인용되곤 합니다만, 야고보 사도나 바오로 사도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십자가의 믿음을 전하려던 것이기 때문에, 믿음 속에는 당연히 실천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수난의 실천 없이 얻어지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믿음이요 싸구려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수난이란 흔히 굳이 잘못이 없어도 악마의 간계 때문에 주어지기 마련인 고생인 것이요,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이 주는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우리는 그 효과가 매우 확실한 기도 지향을 얻은 셈입니다. 자기 탓 없이 고통 받는 이들과,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도록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물러 터지지 말고 야무지게 착하도록, 의로운 이들이 악한 이들의 공격에 대해 슬기로울 뿐만 아니라 인내로이 그 의덕을 간직하고 발휘하도록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다가 자칫 한 두 번 넘어진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이나 넘어 지셨습니다. 매를 맞고 고문당해 약해지고 지친 몸으로 짊어지기에는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이나 마음이 약해서, 또는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넘어질 수 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받아야 하는데, 혼자 기도하는 힘만으로는 모자랄 수 있으니, 깨어 있는 영혼을 지닌 이들이 기도로 통공하며 연대해야 합니다.
이 순교자 성월에, 오늘날에도 옳은 일과 거룩한 일로 박해를 당하고 있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작금 나라의 정치 현실이 대단히 어지럽기 때문에 옳고 거룩한 지향으로 희생을 바치고 있는 의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바쳐야 할 기도가 오늘 화답송의 후렴으로 나와 있는데, 그들과 기도로 통공하려는 지향으로 이 기도를 우리가 함께 바쳤으면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시편 116,9)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딛는 걸음 하나가 신앙 고백이요, 그들을 위해 통공하는 기도 한 마디가 또한 신앙 고백이며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몸짓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살아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한 구원을 확신하며,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하는 그 삶이 바로 부활의 삶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세상이 그만큼 천국으로 변화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첫댓글 자신의 무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앞장 서 가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겠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딛는 걸음 하나가 신앙 고백이요,
그들을 위해 통공하는 기도 한 마디가 또한 신앙 고백이며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몸짓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살아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안에서 실천하는 표양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고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