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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교훈, 로마화의 교훈
1코린 11,17-33; 루카 7,1-10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24.9.16.
1. 로마의 교훈
오늘은 아직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카다콤베(Catacombe. 지하무덤) 교회 시절에 교황으로서나 주교로서 이단을 거슬러 신앙 진리를 지키다가 치명한 성 고르넬리오와 성 치프리아노, 이 두 분의 초기 교회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두 분 다 이단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순교하였는데, 치프리아노(Cypriano, 200/210?~258)는 고르넬리오(Cornelio, +253)의 교황직을 옹호하다가 치명했습니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북아프리카에서 출생하여 문학과 수사학 등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고 나서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었으나, 서품 전에 배운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라틴 문학의 대가로서 신앙과 교회를 옹호하는 수준 높은 호교론 작품을 많이 남긴 교부입니다. 여기에는 환경과 상황의 배경이 있습니다. 3세기경의 서북 아프리카 교회는 로마 교회를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아우구스티노(Augustino, 354~430)와 테르툴리아노(Tertuliano, 160~220) 등이 그 대표적입니다. 이 신학자들은 당시의 교회를 이끌어간 아버지라는 뜻에서 오늘날까지도 ‘교부(敎父)’라는 경칭(敬稱)으로 불리웁니다. 이들은 당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에 고대 그리스의 정신적 유산들에다가 로마인들이 계발해 낸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합하고 자신들의 자부심까지도 발휘해서 고대교회를 풍요롭게 가꾸어 나갔습니다.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펼치던 치프리아노는 255년 경에 마뉴스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가 열교(裂敎)나 이단 교회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았다가 나중에 가톨릭교회에 되돌아오려 할 때 다시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에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답장을 써 보냈습니다. “이단자들이 가톨릭교회 ‘바깥’에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세례는 목욕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 ‘바깥’에서는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바깥’에는 성령도 없고, 유효한 세례도 없으며, 세례의 은총도 없고, 그 열매인 구원도 없다. 곧, 노아의 방주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멸망했듯이,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 ‘바깥’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반드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 이후 ‘교회 바깥에 구원이 없다’는 치쁘리아노의 말은 격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격언이 로마법을 본받아 제정된 가톨릭교회법에 들어와서는 법적인 조문이 되어버리더니, 나중에는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받지 못한 모든 영혼은 지옥에 갈 것이라는 확신(?)으로까지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선교사들이 그 오지에서 평화스럽게 살던 원주민들을 목숨 걸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던 동기가 바로,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주어서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8세기까지 유럽 가톨릭교회의 영성이 그 지경이었습니다. 그 영화에는 그처럼 나름 고귀한 선교사명을 띠고 목숨 바쳐 헌신한 선교사들만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가톨릭 신자라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대표한다는 외교관들이 잔학하게도 원주민들을 사냥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악행을 버젓이 저지르는 장면도 나오고, 또 그들 나라의 힘에 비해 교황청의 힘이 약했는지 기껏 현지에 파견된 추기경은 진실을 뻔히 확인하고도, 또 그들이 사악한 노예사냥꾼들에게 희생당하다가 끝내 몰살당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도 교황청에 달랑 편지 한 통 써서 보냅니다. “선교사들은 용감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원주민 아이들은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금도금한 십자가와 바이올린을 강물에 내버린 채 밀림으로 들어가 버렸지요. 원래 밀림에서 살던 그들을 나오게 한 사람들은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강물에 내버려진 십자가와 바이올린처럼, 이 어처구니 없는 ‘확신’의 만행도 강물에 쳐박혔고 더불어 유럽 백인 우월주의를 반영한 제도주의적 교회관도 쓰레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는 이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씁니다. 제도적인 의미의 교회만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모든 이들을 다 품은 영적인 의미의 교회라는 뜻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치프리아노의 말은 틀림이 없으되, ‘교회’라는 영역을 더 넓게 보게 된 것이지요. 교회를 복음적 가치가 실현되는 영역으로 이해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치프리아노의 말이 현실성을 얻으려면 그 교회는 사도직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기복신앙이 대세인 공동체로는 어림없지요.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은 교회를 현존시키는 활동이요 복음적 가치를 증거한다는 점에서 교회를 확장하는 활동입니다. 이미 사도직을 행하는 사도들의 삶 자체가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청이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사도직을 행하는 모든 현장이 다 교회의 중심들입니다. 마치 수많은 동심원들이 호수에 얼마든지 가능하듯이 그렇습니다. 사랑의 돌멩이를 세상이라는 호수에 던지기만 하면 사도직이 생겨나고, 사도직이 생겨나기만 하면 그를 중심으로 사랑의 파문이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사도직이 교회의 중심입니다. 사도직을 행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간판에 ‘교회’라고 써 붙였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직이 행해져야 교회입니다. 또 그 사도직을 행하기 위한 성체성사가 봉헌되어야 예수님의 유언을 계승하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성체성사야말로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서로 섬기는 자세로 세상에 진리를 증거하라고 세우신 부활의 성사입니다. 서로 섬기는 자세와 세상에서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 십자가일 수도 있겠으나, 그 십자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불어 넣어주시는 부활의 힘으로 능히 짊어질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와 사도직이 있는 한, 교회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의 교훈입니다.
2. 로마화의 교훈
오늘 복음의 상황은 로마총독의 관할 아래에서 유다인들을 통치하던 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로마인으로서 유다인들을 통치하면서도 유다인들의 관습을 존중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예였던 유다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예수님께 유다인의 원로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기 노예를 살려달라고 간청을 해 왔습니다.
그는 유다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에 금지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급질서에 투철한 군인정신에 따라서 질병을 일으키는 악령보다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훨씬 더 높은 지위에 계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위를 존중하여 이렇게 청했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 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7) 이렇게 해서 상황은 유다인들을 식민통치 하고 있는 로마의 정치적 권위가 예수님의 영적 권위에 순종하는 모양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유다인보다 더 큰 믿음을 고백한 그 로마인 백인대장을 칭찬하시며 그 노예를 살려 주심으로써 로마인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로마인 백인대장의 믿음 어린 고백을 미사 중 영성체 기도에 들여 왔습니다.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들어 교우들에게 보여주면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선언하면, 교우들은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하고 응답하는데, 그 유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로마인 백인대장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의 모범을 로마인 백인대장에게서 찾을 뿐 사실 우리는 주님을 감히 우리 몸에 모십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찾아오신 그분의 힘으로 우리가 살아갈 힘을 얻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몸이 됨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성체를 영할 때 성체를 분배하는 이와 성체를 영하는 이 사이에 오가는 기도의 대화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이렇게 교회는 로마인 백인대장의 믿음까지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노예까지도 치유해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그가 보여준 성의는 전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 로마인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다가 진정 어린 고백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다가 그분께서 숨을 거두실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지진까지 일어나는 등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재판에서 무죄한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로마법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주장하며 빌라도 총독에게 항변했다든가, 자신의 지휘 하에 있던 로마병사들이 그분을 채찍질할 때에 만류했다든가 하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다인 노예를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와는 딴판입니다. 이것이 로마의 이중성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에 이 못된 이중성을 빼닮았습니다. 탄압받던 지하교회에서 제국교회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의 칭호를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붙일 정도로 권력을 탐하는 교회로 바뀌었는가 하면, 오직 사랑과 섬김의 법만을 당부하신 예수님의 유언성 당부를 받던 교회에서 통제와 처벌을 위주로 하던 로마법을 도입하여 교회법으로 통치하는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법 조문의 수사가 외교적으로 교묘하게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수백 년 동안 자행된 종교재판입니다. 무수한 숫자의 억울한 약자들을 죽임으로 몰아내면서 수 세기에 걸친 종교재판에서 교회는 빌라도와 카야파를 흉내내기에 급급했습니다.
우리가 로마인 백인대장의 믿음 어린 고백을 본받아야 하지만, 이런 못된 이중성까지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의 가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이왕이면 가톨릭교회가 그 복음적 가치를 담보하기를 바란다면, 우리 교회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권위에 걸맞는 책임을 행사하도록 바라야 합니다. 성직자들이 권위주의를 버리고 평신도들에게 섬기기를 바란다면 평신도들도 현실도피주의를 버리고 말씀과 성찬과 사랑에 대해 섬기는 책임을 이행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경우에 저항권의 행사는 어디서부터도 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종교재판이 극성을 부리던 15세기 스페인에서 이 모든 참상을 지켜보며 기도하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런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 인간입니다. 사후에 그의 묵상 메모를 발견한 후대의 신앙인들이 이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불멸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어뇨 네 두려움이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니
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 무얼 더 원하리
사랑하고 사랑하여 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차지하리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한 나라의 정치질서를 책임진 이들이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할 경우에는 권위가 발생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저항권이 발동되어 권위가 추락할 수 있듯이, 한 나라의 종교질서를 책임진 교회와 신앙인들이 공동선에 대한 관심은 커녕 하느님을 제대로 증거하지도 못할 경우에는 권위가 추락함은 물론 신앙인들이 떠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자발적으로 세례 받은 신앙인들의 열에 아홉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을 모든 사람이 믿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실은 다 위선입니다. 이것이 로마화의 교훈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 무얼 더 원하리
사랑하고 사랑하여 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차지하리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