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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족보의 탄생
목차
1.족보 역사..중국.한국
2.벽진이씨 최초 족보 임진보탄생
3.족보의 발간이력(7간)
ㅡ 갑진대동보 인터넷 족보구축
4.동강 창기 가문의 족보 및 참여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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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족보의 역사.
족보는 옛날 중국에서 왕실의 계통를 기술한것이 근원이며 , 사가(私家)에서는 한(漢)나라의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만들어 후보인물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에 위(魏)나라와 진(晋)나라 때를 거쳐서 남북조시대 (南北朝時代) 에 비로소 학문으로서 보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족보는 고려조가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것이 시작이며, 고려중엽의 의종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등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신라말기에 귀족 계급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해서, 고려초기까지 이어 오다가 11대 문종조 (1047-1082)에 이르러 서는 성씨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 못하게 하는제도가 만들어져서 성씨가 갑자기 많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최초에 발간된 족보는 1423년(세종5)의 문화유씨 영락보이나 서문만 전할 뿐 현존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1476년(성종7)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이다. 그 후 1562년(명종)에 발행된 문화유씨 가정보는 내외 자손이 상세히 기록되어 현존하고 있다.
이밖에 강릉김씨 을축보(1565), 능성구씨 만력보(1576)등이있다.
임진보 서. 식. 발문
2.벽진이씨 족보 탄생
당시에는 사대부 가계 즉 양반 계층만이 족보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문중도 이에 해당하며, 전체 인구 대비로 양반계층은 6%에 불과하던 시대였다.
1)임진보(壬辰譜) : 1652년
1652년(효종3)인 임진년에 간행한 우리 문중 최초의 한문본 창간족보이다. 이 대동보는 1635년(인조13)에 충숙공 상길(尙吉)선조님께서 완산 부윤으로 계실때 단자를 수집하여 족보를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직책이 바뀌고, 1637년 (인조15)에 병자호란으로 순절하심에 따라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10년후 진주목사로 부임한 그의 종제 감사공 휘 상일께서 이를 완성하기 위하여 준비하든 중에 영남지방에 계파가 다른 일가가 많은 사실을 알고, 함께 단자를 모으고 비용을 부담하면서 효종 임진년에, 성주벽진이씨세보 라는 판각 목판본의 단행본 족보를 간행하였다.
특징은 2남인 대장군공파가 먼저 수록되고, 장남인 산화공파가 다음으로 수록되어 있다.
원본은 유일본으로 전승되고 있었는데, 1983년 증간위원회를 결성하여 간행한 100질의 한정, 영인본이 효종 임진 벽진이씨 세보 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서문(序文) : 이상일(李尙逸)
식 (識) : 이수억(李壽億)
발문(跋文) : 조시량(曺時亮)
1)임진보서(壬辰譜書)(1652年),
星州에 李氏가 三姓이 있으니 碧珍將軍이 곧 우리의 始祖이다, 新羅末期에 碧珍郡을 保全하니 高麗太祖가 公을 碧珍將軍으로 除授하였다, 아들 諱 永은 知京山府事를 지냈고 그 뒤에 諱 芳華 諱 殷 父子가 모두 光祿大夫로서 벼슬이 代代로 世上에 빛나 그 아름다움을 中世에까지 이어왔고 나의 五代祖인 平靖公 諱 約東에 이러러서는 淸白과 剛正으로서 朝廷에서 뚜렸하였으니 門閥과 官爵이 가히 盛大하다 할수있으나 族譜가 아직 世上에 刊行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크게 哀惜하지 않으리오?
나의 從兄인 尙書公이 일찍이 完山府尹으로 계실 때에 支派의 單子를 蒐輯하여 譜冊을 發刊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事情으로遞職되어 成就하지 못하여서 平素에 歎息해 마지 않았다. 不肖한 이사람이 祖上의 蔭德을 입어서 晉州牧使로 왔는데 일가들이 南方에 사는이가 많았다, 우리 宗人인 進士 見龍과 秀才 壽檍이 이에 傷心하여 宗中에 發議해서 옛 合族하는 禮를 본받아 後世에 傳할 바를 계획하니 이는 宗族을 誇示하고 존중하는 議論이라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오 ? 생각큰데 내가 비록 보잘 것 없으나 감히 門中의 큰일에 힘쓰지도 않고 平生의 뜻인바 所願을 이루고저 하겠는가 ! 오직 親屬이 이미 다함에 가지가 나누어지고 갈래가 달라지며 服이 끝나고 戚分이 다하여 吉凶事에도 서로 방문하지않고 路上에서 만나도 人事하고 지나가는 이 조차 드물게 되었다.
禮記에 이르되『同姓은 宗家를 따른다』라 하고 또 이르되 『宗家를 恭敬하기 때문에 族親을 뫃이게한다』 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飮食으로 族親을 모으는 禮節이 생기게 되었으니 君子는 드디어 이 일을 所重히 여겼다, 신령스르운 椿나무가 茂盛하게 잎이 퍼저도 그 根本은 한뿌리이며 大姓이 아무리 繁昌해도 그 처음은 한몸이라 動作하고 呼吸하는 元氣가 어버이에게 通했거늘 子孫끼리 남과 같이 지낸다면 이 또한 슬픈일이 아니리오 ? 官俸의 餘分으로 이 일을 마치게되니 우리 氏族의 譜冊이 비로소 只今이나 以後에 流布될것이므로 以後에 나는 子孫들은 모두 注意깊게 보고 敦睦孝悌하는 氣風으로 서로 힘쓴다면 나의 責任은 다한것이되고 諸君들의 일을 繼承하는 道理도 또한 다함이 되리라.
譜役이 完成될 무렵에 諸君이 다시 나에게 請하여 이르되『序文이 없으면 後嗣들이 어떻게 볼것인가 願컨데 번顚末을 적어서 族譜의 끝에 添附케 하소서』 하기에 義理上 拒絶할수없었다. 또한 생각컨데 우리 宗族이 예로부터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오늘에 이러러 비로서 編纂하였으니 어찌 運數가 있음이 아니랴. 또한 諸君이 없었다면 參考,校正해서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또 諸君에게 付託하노니 이제 見龍,壽億君이 能이 이 役事를 맡아서 尊祖 敬宗의 義理를 다 알게되었다고는 하나 그르나 先代를 빛네고 祖上을 나타나게함이 이것만으로 다헸다고 할수 있으리요 ? 詩經에 이러기를 『너의 祖先을 生覺하지않으랴 그 德을 닦을지어다』라 하였으니 이 族譜가 있드라도 이 德이 없으면 사람들은 오히려『先祖를 辱되게한다』 고 할것이니 우리가 取할바 아니로다. 아 ! 諸君들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 이에 참남(僭濫)함을 해아리지 않고 드디어 序文을 쓰노라.
後孫 通訓大夫 晋州牧使兼 春秋 編修官 尙逸謹書
2)壬辰譜識(임진보 식)
오호라 이것은 碧珍李氏의 世系인데 年代가임이 멀어저서 分派와 系譜가 분명하지 못한 중에 未詳處가 있으서 간혹 疑心스러운 것이 없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우리 祖父(諱 屹)께서 오래되면 될 수록 더욱더 그 眞實을 잃게 될까바 두려워해서 舊聞을 蒐集하여 世系를 編敍하여서 뒷날의 子孫에게 이어주려하였다. 叔父께서 父母의 喪을 당하여 孝養하지 못하게 된 것을 슬프한 以來 깊이 思慕함이 날로 절실하여 求함이 있어도 얻지 못하였다. 일찍히(본인은) 가르침을 받은것에 바탕을 두고 內外譜를 追成하되, 文獻으로 밝혀지기(徵)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지금바로 宗叔 *昌一氏 (註1) 가 居昌 文氏家의 舊譜를 얻어보게 되었다, 文氏는 李氏의 外孫이라 李氏의 系譜로서는 그 중에있는 것을 참고하였는데 大將軍 諱 成幹은 곧 樞密院事 諱 雍의 次子로서 이 분이 保勝郞將 諱 晟을 낳고 晟이 中郞將 諱 桓을 낳았으니 平靖公(諱 約東)은 그의 玄孫이다.
여기서 이 族譜를 祖父께서 기록하신 바와 비교한즉(서로) 符合되고 다름이 없어 한편으로 先代의 根源과 系統이 詳細하여 기쁘고 또 한편으로 祖父님의 祖上을 追慕하는 정성에 감격하여 더욱더 흥겹게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아 ! 여기서 系統의 詳細함이 그 族譜에 실려 있어서 우리들이 오늘날에 비로서 알게되니 의문이 남아 있을수 있겠는가. 그간 古語에 이러기를『마음속으로 그것을 정성껏 求하면 얻어진다』 는 것이니 그 말은 믿을수 있도다. 子孫되는자는 거의 걱정이 없겠도다. 어찌 하늘이 장차 李氏의 家門을 열고자 이 族譜를 굳게 간직하여 잃치 않도록 해서 우리들의 눈에 덜어오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先祖께서 여러 代 쌓은 蔭德으로 子孫이 끊임없이 이어저서 百代의 後에 크게 울리게한 것이 아니겠는가. 叔父께서 悲感한 나머지 檍에게 命하여 騰書하게 하였음으로 쓰기를 마치고 또 序文을 써서 다른날 出刊하기를 바라노라.
後孫 幼學 李壽檍 삼가 적는다.
이수억(李壽檍 1613-1670), 德老 梧潭 碧珍 三嘉 桐溪門人林汝栢撰狀 有文集
* (註1) 昌一氏
23대 이창일(李昌一)1611 ~ 1653. 과거급제. 승문원박사. .
평정공 후 20세 감천(鑑川) 건의 증손(曾孫) 이고,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의 손자이며. 승지공 2남이다.
자(字) 융보(隆甫), 호(號)는 동곡(東谷), 광해군(光海君) 3년 신해(辛亥 1611) 3월 8일 생이며,
인조(仁祖) 26년 무자(戊子 1648)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며,
인조(仁祖) 27년 기축(己丑 1649)에 문과(文科) 정시(庭試) 을과(乙科) 2인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 보안찰방을 역임(歷任)중 효종(孝宗) 4년 계사(癸巳 1653) 12월 13일 임지에서 졸(卒)했다.
거창군 동쪽 안양산 할아버지 묘 우측 신좌(辛坐)에 있고 묘갈명(墓碣銘)에 현감(縣監) 서호(徐琥)가 찬(撰)했다.
3)壬辰譜跋(임진보 발)
벽진이씨(碧珍李氏)는 대성(大姓)이다. 그 시조가 신라말엽에 일군(一郡)을 보전했고, 고려조에 들어와서는 공신의 으뜸이 됐음은 국사를 상고해 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그후 평정(平靖, 주: 이조참판 이약동)공(公)이 청백과 충직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공의 후손인 상일(尙逸,1600~1674, 경상감사, 현재 영정 있음)이 진주목사(1650~1654)가 되고, 나(주: 조시량) 또한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니 모두 공의 내외손(內外孫)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종족의 신수(神秀)함이 요요(遙遙: 멀고 아득함)하나 오히려 상고할 보첩이 없으니, 이 어찌 흠사가 아니겠는가. 나(주: 이상일)의 종형(從兄)인 상서(尙書)공(公)이 일찍이 이 일에 뜻을 뒀으나, 직사(職事)에 심력을 기울이다보니 능히 편수하지 못하고 평소 일가자제들에게 개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일찍이 종형(從兄, 이상서)이 뜻을 이루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진실로 이 일을 주관함으로써 종형의 뜻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국은을 입어서 다행히 이 고을(주: 진주목사)을 맡게 되자 동종(同宗) 몇 사람과 더불어 보첩을 편찬하여 그대로 인쇄하게 됐으니, 종형의 평생 뜻이 오늘에야 이뤄져서 여한이 없게 됐다. 그대(주: 조시량)가 마침 이 고을에 와서 이 일을 함께 의논하게 됐으니, 이 또한 다행이다. 이 보첩의 서문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했다.
나(주: 조시량)는 이에 두 손을 마주잡고 말하기를 “벽진이씨가 대대로 현달한 이가 여러 사람이 있어도 이 일에 뜻을 둔 사람이 없었는 데, 당신(주: 이상일)께 이르러서 비로소 족보가 편찬됐으니, 상서(尙書)공이 아니었다면 보첩 편찬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요, 상일(尙逸)공이 아니었다면 상서공의 뜻을 이어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보첩을 이룩한 것은 상일(尙逸)공이 아니라 곧 상서(尙書)공이라 할 것이니, 대체로 이씨 가문의 복이 다하지 아니한 것이다. 후손들이 이 보첩을 보면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서 그 가풍을 추락시키지 아니함이 상서(尙書)공과 같고 상일(尙逸)공과 같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고 했다.
외손 통훈대부행성균관전적 조시량 근발
임진보
최초 발의..한림공후 충숙공 상길
임진보 편찬에는 한림공후 감사공 상일. 판서공후 승지공 언일. 감정공 신일. 노파공 수억등이 참여 했으며.
당시 과거급제하고, 승문원 박사인 승지공 2남 창일은 현직 재임으로 족보 편집에 직접참여는 하지못하고 계보파악등 자료 수집에 적극 지원했다.
23대 이창일(李昌一)1611 ~ 1653. 과거급제. 승문원박사. .
평정공 후 20세 감천(鑑川) 건의 증손(曾孫) 이고, 가조입향조 21대 통덕량 이난서의 손자이며. 승지공 2남이다.
자(字) 융보(隆甫), 호(號)는 동곡(東谷), 광해군(光海君) 3년 신해(辛亥 1611) 3월 8일 생이며,
인조(仁祖) 26년 무자(戊子 1648)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며,
인조(仁祖) 27년 기축(己丑 1649)에 문과(文科) 정시(庭試) 을과(乙科) 2인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 보안찰방을 역임(歷任)중 효종(孝宗) 4년 계사(癸巳 1653) 12월 13일 임지에서 졸(卒)했다.
거창군 동쪽 안양산 할아버지 묘 우측 신좌(辛坐)에 있고 묘갈명(墓碣銘)에 현감(縣監) 서호(徐琥)가 찬(撰)했다.
3.벽진이씨 족보 발간이력사.
벽진이씨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7번의 大同譜를 발간했다.
2025년에는 인터넷으로 활용하는 전자족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 내용을 이력별로 살펴보면,
역대 보(歷代譜)
임진보(壬辰譜) : 1652년
경인보(庚寅譜) : 1710년
경인보(庚寅譜) : 1725년
경인보(庚寅譜) : 1726년
병술보(丙戌譜) : 1826년
갑자보(甲子譜) : 1864년
임자보(壬子譜) : 1912년 -
을미보(乙未譜) : 1955년 -
신축보(辛丑譜) : 1961년 -
병자보(丙子譜) : 1996년 -
1.효종(孝宗) 임진보(壬辰譜)
2.숙종(肅宗) 경인보(庚寅譜)
숙종 36년 경인(庚寅) 1710년에 왕자사박(王子師傅)효헌공(孝獻公) 世근선조님께서 주관하여 노원 하계 충숙공 영하에 보소를 설치하고 판각한 5 권인데, 이 족보는 판각을 서두르는 바람에 족보의 범례서문 발문을 함께 인각하지 못했고 또 오자가 많아 본격적인 간행을 보류하여 하계리 보소에 그냥 두었던 것을 지례현감 (知禮縣監)으로 부임한 효헌공의 종제 세윤(世玧)선조님께서 그 판각을 김천 직지사로 옮기고, 그의 록봉(祿俸)을 출연하여 1725년 영조(英祖) 을사(乙巳)에 교정한 족보를 을사교정(乙巳攷正) 그 다음해인 1726년 병오(丙午)에 교정한 족보를 병오교정(丙午攷正)이라하여 보소를 설치한 후 16년 만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 판각은 직지사의 화제로 모두 소실되었다.
3.순조(純祖) 병술보(丙戌譜)
순조 26년인 1826년 병술 금산 경렴서원 지금의 하로서원(賀老書院)에 보소를 설치하여 활자로 간행한11권의 대동보입니다.
4.고종(高宗) 갑자보(甲子譜)
철종 12년인 1861년에 발의하여 1863년 경수당에 보소를 설치하고 그 다음해인 서기 1864년갑자甲子에 본격적으로 보사를 추진하여 그 다음해인 을축년에 간행 완료한 17권의 대동보를 말하는데, 이 족보에서부터 6세(世) 차손(次孫) 보(寶)선조님의 후예가 입보를 시작하여 후에 문정공파(文靖公派)를
이루게 되었다.
5.임자보(壬子譜)
1911년 신해(辛亥)에 성주 명곡 문곡정사에 보청을 개설하여 그 다음해인 임자(壬子)에 본격적인 보사를추진하여 간행한 18권의 대동보 인데, 편집 과정에 생긴 견해차로 평정공파(平靖公派)가 중도 탈퇴한 험을남겼지만 대동보로 공인하여 다음 대동보인 신축보에 그 서문을 올렸다.
6.신축보(辛丑譜)
1961년 서울 화수회 석상에서 발의하여 1963년 10월에 완성한 甲 乙 2 권과 부록으로 사진첩을 덧붙였는데, 새로운 많은 일가들이 발굴되어 수록 되었고, 금릉공파 또한 이 족보에서 부터 입보하게 되었다.
7.병자보(丙子譜)
1996년 병자丙子 2월 25일 종회에서 대동보 발간을 결의하고, 1998년 간행 배포한 대동보인데,이 족보에 는 96개 지파의 남 여 모두 84291인의 생존 인원이 수록되어 있다.
위에서 열거한 7간(刊)의 대동보 이외 각 중 소 계파 단위로 발간한 파보는 많이 있다.
8.갑진대동보 및 인터넷족보
2024년부터 대종회 결의로 갑진대동보 및 인터넷 전자족보를 구축하다.
그동안 대동보 족보는 서책으로 발간되어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아서 족보의 활용도가 낮아 아쉬움이 만았다
또한 한자로 편찬이이 되어 있어서 젊은 후손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한글 한문병용의 서책과 인터켓 전자족보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열람할 수 있고. 한자와 족보를 잘 모르는 젊은 후손들에게도 효(孝)와 뿌리교육, 인성교육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게 될것이다.
4.우리가문의 족보참여 이력
1.벽진이씨 최초 임진보 1652년 편찬.
평정공2남 판서공후 승지공 2남 23대 창일선조님과 4남 언일 선조님이 임진보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있다.
2.1864년 고종 갑자보 편찬
평정공2남 판서공후 승지공 29대 일하정 이학준공께서 족보 편찬에 참여하시고, 벽진이씨 시조공 종당인 경수당기를 찬헀다.
3.1996년 병자보 편찬
평정공2남 판서공후 승지공 33대 동강 이창기공께서 병자보 편찬에 참여했다.
4.2025년 갑진 대동보 인터넷족보 단수위원...34세 유진 선동
벽진이씨 시조공
에서 33세 동강 창기 가문 족보내역
시조공 .1세
▶子 李忩言(이총언)
生신라(新羅) 헌안왕(憲安王)2년戊寅858년
卒고려(高麗) 태조(太祖)21년戊戌938년7월임자일(壬子日:7일) 壽는 81세(歲)였다
벼슬은 고려삼중대광개국원훈벽진장군(高麗三重大匡開國元勳碧珍將軍)을 지냈다 신라말(新羅末)에 태수(太守)로써 벽진군(碧珍郡)을 보전(保全)하고 있었는데 당시(當時) 도적(盜賊)의 무리가 충만(充滿)하였으나 공(公)이 성(城)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百姓)들이 그 덕화(德化)에 힘입어 평안(平安)하였다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사람을 보내어 함께 협력(協力)하여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할 것을 효유(曉諭)하니 공(公) 또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고려태조(高麗太祖)에게로 돌아감을 깨닫고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태조(太祖)를 쫓아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는 정토대업(征討大業)에 공(功)을 세웠다 이에 고려태조(高麗太祖)가 공(公)을 벽진장군(碧珍將軍)에 봉(封)하여 방읍(傍邑)의 229정호(丁戶)를 더 주고 또 충주(忠州)·
#74
원주(原州)·광주(廣州)·죽주(竹州)·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石)과 소금 1785석(石)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親書)를 보내면서 김석(金石)같은 신의(信義)를 표시(表示)하여 이르기를『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變)치 않으리라』 고 서약(誓約)하였다 공(公)은 이에 감격(感激)하여 군정(軍丁)을 단결(團結)하고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여 고성(孤城)으로써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가 서로 쟁취(爭取)하려는 지역(地域)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屹然)히 동남(東南)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이 사적(事績)은 고려사(高麗史)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명환편(名宦編)에 실려 있다
墓성주군(星州郡) 서(西)쪽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에 있다고하나 壬辰1592년에 병난(兵亂)으로 인(因)하여 실전(失傳)하고 영조(英祖)46년庚寅1770년에 상수촌(上樹村) 매적산(梅跡山) 동쪽산기슭(東麓)에 설단(設壇)하여 10월15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한 것은 대개 옛날부터 묘(墓)를 바라보고 설단(設壇)하는 의의(意義)를 본딴 것이다 그 뒤 순조(純祖)26년丙戌1826년 경조수족(敬祖收族)의 뜻을 담아서 지금(只今)의 수촌(樹村)에 경수당(敬收堂)을 창건(創建)하였으며 고종(高宗)원년甲子1864년에 경수당(敬收堂) 서(西)쪽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고종(高宗)15년戊寅1878년에 단(壇)을 영봉산(迎鳳山) 남쪽산기슭(南麓) 이천(伊川) 부근(附近)으로 옳겼다가 고종(高宗)18년辛巳1881년에 다시 유허비(遺墟碑) 옆으로 이설(移設)하여 10월初3일로 세일제(歲一祭)의 정일(定日)을 바꾸었다 고종(高宗)23년丙戌1886년에 단소(壇所)를 중수(重修)하고 戊午1918년에 경수당(敬收堂)을 중창(重創)하였다
丁未1967년에 단각(壇閣)을 창건(創建)하고 甲寅1974년에 경수당(敬收堂) 서편(西便) 송림(松林)에 사적비(事蹟碑)를 수립(竪立)하였다 壬申1992년에 경수당(敬收堂) 경내(境內)에 동서재(東西齋)와 비현사(丕顯祠)를 창건(創建)하여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陰2월중정일(中丁日)과 10월初3일에 춘추(春秋)로 봉향(奉享)하다
2세 영
子 永(영)
고려태조(高麗太祖)를 좇아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는 정토대업(征討大業)에 공(功)을 세웠다
時永十八年 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
벼슬은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에 이르렀다 그 사적(事蹟)은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 있다
墓수촌(樹村)의 이천(伊川)위 태극봉(太極峰)아래
#54
에 있다고 하나 壬辰1592년 병란(兵亂)으로 인(因)하여 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壬申1992년에 경수당(敬收堂) 경내(境內)에 세덕사(世德祠)를 창건(創建)하여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陰10월初3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
3세 방화
子 芳淮(방회)
一諱는 방회(方淮)
또는 방준(方準)
또는 방준(芳準)
벼슬은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지냈다
墓대남봉(大南峰)아래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4세 경석
子 慶錫(경석)
벼슬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墓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5세 증
子 曾(증)
벼슬은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일작(一作)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고도 한다
墓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6세
▶子 實(실)/星州 樹村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일작(一作)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고 한다
墓적산동(積山洞) 하원(河源) 동향원(東向原)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7세
子 芳華(방화)
벼슬은 광록대부(光祿大夫)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일작(一作)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고 한다
墓호음곡(戶音谷)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8세
子 殷(은)
벼슬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일작(一作)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고 한다
墓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9세
子 唐揆(당규)
벼슬은 주부동정(主簿同正) 우사랑중(右司郞中)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다
墓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10세
子 雍(옹)
벼슬은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판공부사(判工部事)에 추봉(追封)되었다
配진주강씨(晉州姜氏) 父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향(珦) 또는 순(珣) 또는 구(玽)이고 祖는 정(靖)이며 曾祖는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원감(元鑑)이고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의 후손이다 그러나 강씨보(姜氏譜)에 이옹(李雍)이 없으니 자세(仔細)히 알 수 없다
墓성주(星州) 경계상(境界上) 부상(扶桑) 서쪽산기슭(西麓)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하고 경수당(敬收堂)에서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다가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하다
11세
子 成幹(성간)
벼슬은 고려(高麗) 충렬(忠烈)·충선왕조(忠宣王朝)에 중문지후(中門祗侯)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고 총명(聰明)이 과인(過人)하더니 백형(伯兄)을 따라 입지독학(立志篤學)하던 중(中) 당시(當時) 시대상(時代相)이 외환내우(外患內憂)로 위기(危機)에 처(處)함을 직시(直視)하고 숭무(崇武)로 외구(外寇)를 물리쳐 흥국안민(興國安民)을 위(爲)하여 무예병법(武藝兵法)을 정구(精究)하고 투필집궁(投筆執弓)하여 북적도이(北狄島夷) 정토(征討)에 종군(從軍)하여는 애병여자(愛兵如子)하고 상명여천(上命如天)하며 임전무퇴(臨戰無退)로 수공(樹功)하여 충선왕(忠宣王) 초(初)에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왕정(王政)을 부좌(扶佐)하고 폐정광정(弊政匡正)과 민고해소(民苦解消)를 도모(圖謀)하였으나 권신(權臣)의 반대(反對)로 기관낙남(棄官落南)하여 지례(知禮) 삼도봉(三道峰) 대금산(大禁山) 구남천(九男川) 등에서 은거(隱居) 자정(自靖)하였다 북천송악(北天松岳) 바라보고 홀로 한루(恨淚)를 흘리니 세인(世人)들은 절의군자(節義君子)라 칭(稱)하였다 순조(純祖)丙戌1826년에 대금산(大禁山) 중등(中嶝)에 설단(設壇)하여 매년(每年)10월8일에 제향(祭享)하였다 庚戌1970년에 설단(設壇)하고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전주이은상(全州李殷相)이 지었다(撰) 庚申1920년에 단산(丹山)에 모원당(慕遠堂)을 세우고 단소(壇所)를 옮겨 제향(祭享)을 받들었다 癸酉1993년에 당(堂)을 한송정(寒松亭) 서북편(西北便) 와야곡(瓦也谷) 남쪽산기슭(南麓)에 옮겨 중건(重建)하여 매년(每歲)10월初4일에 봉향(奉享)하다 丙子1996년에 당(堂) 앞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성균관장(成均館長) 경주최근덕(慶州崔根德)이 지었고(撰) 글씨는 철학박사(哲學博士) 진성이완재(眞城李完栽)가 썼다 같은 해(同年)에 사적비(事蹟碑)를 세우고 비문(碑文)은 외후손(外裔)인 문학박사(文學博士) 청송심재완(靑松沈載完)이 지었고(撰) 글씨는 외후손(外裔)인 창원시장(昌原市長) 평산신상돈(平山申相墩)이 썼다 매년(每年)10월初4일에 당(堂)에서 봉사(奉祀)한다
12세
子 晟(성)
벼슬은 신호위보승랑장(神虎衛保勝郞將)이며 모원당(慕遠堂)에서 매년(每歲)10월初4일에 봉향(奉享)하다
13세
子 桓(환)
벼슬은 정용위중랑장(精勇衛中郞將)이며 모원당(慕遠堂)에서 매년(每歲)10월初4일에 봉향(奉享)하다
14세
子 希牧(희목)
벼슬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냈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증손(曾孫)인 평정공(平靖公)의 귀(貴)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叅議)에 증직(贈職)되었다
配농서이씨(隴西李氏) 父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현문위상호군(玄門衛上護軍) 벼슬을 지낸 천식(天植)이다
墓성주(星州) 적산(寂山)에 있다고하나 실전(失傳)하였다
처음 대금산(大禁山)에 설단(設壇)하여 단향(壇享)하고 그 후(後) 단산(丹山)에 모원당(慕遠堂)을 짓고 단(壇)을 옮겨 봉향(奉享)하였다 당(堂)을 한송정(寒松亭) 서북편(西北便) 와야곡(瓦也谷) 남쪽산기슭(南麓)에 옮겨 중건(重建)하여 매년(每歲)10월初4일에 봉향(奉享)하다
15세
子 存實(존실)
벼슬은 조산대부(朝散大夫)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증직(贈職)되다
墓금산군(金山郡)남쪽 묵방산(墨坊山) 건좌(乾坐)이다
配성주배씨(星州裵氏) 父는 봉선대부(奉善大夫) 소부소윤(小府少尹) 벼슬을 지낸 희보(希補)이고 祖는 감찰원지평(監察院持平) 벼슬을 지낸 중경(仲勁)이며 曾祖는 합문지후(閤門祗侯) 벼슬을 지낸 유(裕)이다
墓금산군(金山郡)북쪽 왜유현(倭踰峴) 축좌(丑坐)
16세
▶子 德孫(덕손)
벼슬은 승의랑(承議郞) 남해현령(南海縣令)을 지냈다
아들 약동(約東)의 추은(推恩)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兼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
墓금산(金山) 남쪽 옛 가대면 하로촌(賀老村:현재 김천시 양천동(陽川洞)) 안산(案山) 외유혈(外乳穴) 해좌(亥坐)이고 매년(每年) 10월5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드린다
配증정부인고흥류씨(贈貞夫人高興柳氏)
卒壬午1462년정월
墓상하봉(上下封)
父는 공조전서(工曹典書) 벼슬을 지낸 무(務)이고 祖는 밀직(密直)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택(澤)이며 曾祖는 좌리익조공신(佐理翊祚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고흥군(高興君) 영밀공(英密公) 청신(淸臣)이고 外祖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품계(品階)를 받은 안산안익방(安山安翊邦)이다
17세
子 約東(약동)
字는 춘보(春甫)
號는 노촌(老村)
生태종(太宗)16년丙申1416년10월
강호(江湖) 김숙자(金淑滋)에게 수업(修業)하였다 세종(世宗)辛酉1441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문종(文宗)辛未1451년에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及第)하여 5조(五朝)를 내리 섬겼다 성종조(成宗朝)에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때는 괘편(掛鞭) 투갑(投甲) 등의 이적(異跡)이 있었고 청백리(淸白吏)에 선록(選錄) 되었으며 이조참판(吏曹叅判) 兼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써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승직(陞職)되고 기로사(耆老社)에 입참(入參)하였으며 벼슬에서 물러나와서는 금산(金山) 하로촌(賀老村)에서 쉬고 있을 때 덕망(德望) 염조(廉操) 염절(恬節)로써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生성종(成宗)24년癸丑1493년6월13일 壽78세
임금이 제문(祭文)과 제수를 내리고 평정(平靖)으로 증시(贈諡)되었다 정사를 행함에 제도가 있음(執事有制)을 평(平)이라하고 온유한 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함(柔德安衆)을 정(靖)이라 하는 뜻이다 생사당(生祠堂)이 제주(濟州)에 있는데 영혜사(永惠祠)라 하고 금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에서 제향(祭享)한다 실기(實記)가 있는데 서문(序文)은 대사헌(大司憲) 兼좨주(祭酒) 벼슬을 지낸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이 지었고 발문(跋文)은 판서(判書) 벼슬을 지낸 홍기섭(洪耆燮)이 지었다
墓묵방리(墨坊里) 조고묘(祖考兆) 계단 아래(階下) 건좌(乾坐)이고 신도비명(神道碑銘)은 팔세손(八世孫)인 봉조하(奉朝賀) 세근(世瑾)이 지었고 부사(府使) 벼슬을 지낸 세윤(世玧)이 썼으며 지돈녕(知敦寧) 벼슬을 지낸 세환(世煥)이 전자(篆字)를 썼다 매년(每年)10월5일 세일제(歲一祭)를 드린다 하로촌(賀老村) 유허비문(遺墟碑文)은 좨주(祭酒)인 홍직필(洪直弼)이 지었고 이조참의(吏曹叅議) 벼슬을 지낸 이 석(李 석)이 썼다 노촌당(老村堂)의 상량문(上樑文)은 대사헌(大司憲) 벼슬을 지낸 김정균(金鼎均)이 지었고 기문(記文)은 이 석(李 석)이 지었다
갑자보(甲子譜)의 부주(附註)에 이르기를 선생(先生)의 생신(生辰)이 전후보첩(前後譜牒) 및 비문(碑文)에는 모두 병신(丙申)년5월임술(壬戌)로 쓰여 있는데 이번에 선생(先生)의 현손(玄孫)인 교관(敎官) 벼슬을 지낸 희선(喜善)이 손수 쓴 선생(先生)의 연보(年譜) 초고(草稿)를 살펴본즉 여기도 임술(壬戌)로 되어있는고로 이번 것을 따른다고 하였다
配정부인전주이씨(貞夫人 全州李氏)
忌12월23일
墓쌍분(雙墳)
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안변부사(安邊府使) 벼슬을 지낸 지명(知命)이고 祖는 삼기군사(三岐郡事) 벼슬을 지낸 방(邦)이며 曾祖는 이조판서(吏曹判書) 벼슬을 지낸 보(保)이고 外祖는 전의이 종(全義李 悰)이다
갑자보(甲子譜)의 부보(附譜)에 이르기를 지돈녕(知敦寧) 벼슬을 지낸 세환(世煥)이 편집(編輯)한 것인 팔고조(八高祖) 도표(圖表) 및 전주(全州)의 본보(本譜)를 살펴보니 이씨(李氏)의 4조(四祖)가 위와 같이 되어 있는데 구보(舊譜)에는 직계(直系) 고조(高祖)인 귀을(歸乙)이 증조(曾祖)로 쓰여 있는고로 이제 고치어 바로 잡았다 하였다
19세
子 承元(승원)
字는 선부(善夫)
성종(成宗)5년甲午1474년에 장천(將薦)으로써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고 연산조(燕山朝)에 참소를 당(當)하여 강등되어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이어서 삼가(三嘉) 장단동(長湍洞)으로 물러나 지내면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卒중종(中宗)丁亥1527년
墓장단동(長湍洞) 계좌(癸坐)이고 비문(碑文)은 찬성(贊成) 벼슬을 지낸 이인고(李寅皐)가 지었고 후손(後孫)이 교리(校理) 벼슬을 지낸 상준(翔峻)이 글씨를 썼다
구보(舊譜)의 부주(附註)에 이르기를 공(公)의 벼슬이 구보(舊譜)에는 다만 무과(武科) 선전관(宣傳官) 통정대부(通政大夫)만 쓰여 있을 뿐이고 또 표덕(表德)도 쓰여 있지 아니한 것을 이번에 수찬(修撰) 벼슬을 지낸 이복로(李福老)가 지은 우우정(友于亭)의 기문(記文)과 처사(處士) 신성중(辛性中) 주서(注書) 벼슬을 지낸 이명기(李命夔)가 지은 여현정(與賢亭)의 행장(行狀) 및 서문(序文) 발문(跋文)에서 공(公)의 사적(事蹟)에 매우 소상하게 쓰여져 있는고로 요점만 추려서 기록에 올렸다
配정부인진주강씨(貞夫人晉州姜氏)
墓쌍분(雙墳)
父는 장사랑(將仕郞) 품계(品階)를 받은 우성(遇成)이고 祖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사(判事) 벼슬을 지낸 세윤(世胤)이며 曾祖는 유(洧)이고 문공(文功)으로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封)해진 기(耆)의 8세손(世孫)이다
19세
子 有溫(유온)
字는 백아(伯雅)
號는 우우정(友于亭)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천부사(利川府使)를 지냈다
忌6월25일
우우정(友于亭)의 기문(記文)은 수찬(修撰) 벼슬을 지낸 이복로(李福老)가 지었다
配숙부인문화류씨(淑夫人文化柳氏)
墓아버지묘(先考塋)위 계좌(癸坐) 쌍분(雙墳)이고 비갈(碑碣)이 있다
父는 군수(郡守) 벼슬을 지낸 수장(壽長)이고 祖는 군수(郡守) 벼슬을 지낸 훈(纁)이며 曾祖는 목사(牧使) 벼슬을 지낸 한생(漢生)이고 영의정(領議政) 벼슬을 지낸 문성부원군(文成府院君)에 봉(封)해진 량(亮)의 현손(玄孫)이다
20세
子 健(건)
字는 맹강(孟强)
號는 감천(鑑川)
벼슬은 壬戌1502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중추(僉中樞)를 지냈다
卒선조(宣祖)己丑1589년정월18일 壽88세
配초계정씨(草溪鄭氏)
忌2월12일
墓거창 향교동(鄕校洞) 해좌(亥坐) 쌍분(雙墳)인데 갈명(碣銘)은 사부(師傅) 벼슬을 지낸 임진부(林眞怤)가 지었고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정시수(鄭時修)가 썼다
父는 철견(鐵堅)이고 祖는 초계군(草溪君)에 봉(封)해진 준(俊)이다
21세
碧珍李氏大同譜 卷之五 平靖公系 承旨公派
▶子 鸞瑞(난서)
字는 정지(禎之)
통덕랑(通德郞) 품계(品階)를 받았다
生중종(中宗)丁酉1537년
卒壬辰1592년4월27일
墓거창 부동(府洞) 안양산(安陽山) 유좌(酉坐)
配의인농서이씨(宜人隴西李氏)
墓합분(合墳)
父는 참봉(叅奉) 벼슬을 지낸 분(芬)이다
22세
子 懋(무)
字는 덕이(德而)
號는 예재(禮齋)
生선조(宣祖)丁亥1587
벼슬은 병절교위(秉節校尉) 사과(司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兼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에 증직(贈職)되었다
卒癸卯1663년10월14일
墓성기역(聖基驛)뒤 상고현(上高峴) 송곡(松谷) 묘좌(卯坐)이고 비석(碣)이 있으며 갈문(碣文)을 7세손(世孫)인 학준(學峻)이 지었고 사적비(事蹟碑)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방후손(傍後孫)인 재기(在基)가 짓고 은진송뇌용(恩津宋雷用)이 글씨를 썼다
配숙부인밀양변씨(淑夫人密陽卞氏)
墓쌍분(雙墳)
父는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 좌승지(左承旨) 兼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 벼슬을 지낸 청(淸)이고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중량(仲良)의 후손이다
23세
子 昌一(창일)
字는 융보(隆甫)
號는 동곡(東谷)
生광해(光海)辛亥1611년3월8일
인조(仁祖)戊子1648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己丑164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오두인(吳斗寅)이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 을과(乙科) 제3인으로 급제(及第)하여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로서 보안찰방(保安察訪)을 지냈다
卒癸巳1653년12월13일 임소(任所)에서 卒
墓안양산(安陽山) 조고영(祖考塋)오른쪽 신좌(辛坐)이고 갈문(碣文)은 현감(縣監) 벼슬을 지낸 서 호(徐 琥)가 지었다
配숙부인남평문씨(淑夫人南平文氏)
生己酉1609년
卒己丑1649년3월19일
墓조고영(祖考塋)오른쪽 한 내를 건너 신좌(辛坐) 育1男
父는 몽호(夢虎)이다
配숙부인영천최씨(淑夫人永川崔氏)
生戊辰1628년
卒丁酉1657년4월7일
墓전배(前配)와 상하분(上下墳)
父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린(轔)이고 祖는 죽헌(竹軒) 항경(恒慶)이다
24세
子 珍翰(진한)
字는 희문(希文)
號는 태평당(太平堂)
통덕랑(通德郞) 품계(品階)를 받았다
生효종(孝宗)辛卯1651년11월26일
卒己亥1719년12월13일
墓합천 상현(霜峴) 봉수곡(烽燧谷) 간좌(艮坐)이고 행장(行狀)은 연안이 돈(延安李 敦)이 지었으며 당(堂)의 기문(記文)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곽창만(郭昌萬)이 지었다
配의인오천정씨(宜人烏川鄭氏)
生甲午1654년10월16일
卒己亥1719년5월9일
墓조비묘(祖妣塋)아래 신좌(辛坐)
父는 진방(震邦)이고 祖는 덕승(德升)이며 曾祖는 유성(維城)이고 外祖는 선전관(宣傳官) 벼슬을 지낸 일선김 직(一善金 직)이다
25세
子 馦華(혐화)
字는 실겸(實兼)
生숙종(肅宗)戊午1678년3월2일
卒壬申1932년5월29일
墓영산 부곡(釜谷) 사창(社倉) 숙모의 묘(叔母塋)아래 사좌(巳坐)
配옥산장씨(玉山張氏)
生庚申1680년11월27일
卒壬子1732년5월9일
墓어사동(御史洞) 건좌(乾坐)이고 묘지(墓誌)는 현손(玄孫)인 학준(學峻)이 지었다
父는 최(最)이고 祖는 우운(羽운)이며 曾祖는 참봉(叅奉) 벼슬을 지낸 학(澩)이고 外祖는 현감(縣監) 벼슬을 지낸 수원백여규(水原白如珪)이다
26세
정매
27세
子 可臣(가신)
字는 성필(聖弼)
號는 삼수정(三樹亭)
生영조(英祖)己未1739년12월26일
卒정조(正祖)戊午1798년10월 약추사(若樞事)로서 소수(疏首)가 되어 소청(疏廳)에 나아갔었다.
卒순조(純祖)乙亥1815년3월24일
墓안금촌(安今村)뒤 신좌(辛坐)이고 행장(行狀)및 묘지(墓誌)는 손(孫) 학준(學峻)이 지었다
配문화류씨(文化柳氏)
生丁巳1737년9월1일
卒乙丑1805년12월3일
墓증조고묘(曾祖考塋)아래 간좌(艮坐)이고 묘지(墓誌)는 손(孫)인 학준(學峻)이 지었으며
父는 영춘(永春)이고 祖는 사심(思沈)이며 曾祖는 수(洙)이고 충경공(忠景公) 양(亮)의 후손이며 外祖는 은진임동헌(恩津林東軒)이다
28세
子 克均(극균)
字는 사평(士平)
生영조(英祖)己卯1759년12월7일
卒순조(純祖)甲午1834년9월6일
墓가북(加北) 어사동(於賜洞) 미좌(未坐)이고 묘지(墓誌)는 子 학준(學峻)이 지었다
配양천최씨(陽川崔氏)
生庚辰1760년6월17일
卒癸酉1813년5월26일
墓부좌(祔左)
父는 화악(華岳)이고 祖는 경삼(慶三)이며 曾祖는 재정(載挺)이고 부제학(副提學) 벼슬을 지낸 숙정(淑精)의 후손이며 外祖는 순천박득봉(順天朴得鳳)이다
29세
子 學峻(학준)
生父克珍
字는 덕오(德吾)
號는 일하정(一何亭)
生정조(正祖)戊午1798년11월18일
卒庚午1870년6월13일
墓합천 숭산면 황령촌(黃嶺村) 안산(案山) 임좌(壬坐)
여러번 도천(道薦)에 올랐는데 천거의 요지에 이르기를 경학(經學)에 심잠(沈潛)함은 옥(玉)이 못속에 있는 것과 같다하고 또 임하(林下)에서 독서(讀書)를 하고 안빈락도(安賓樂道)하였다고 하였다. 정기(亭記)는 일참판(逸叅判) 이항로(李恒老)가 지었고 액자(額子)는 족질(族侄)인 참봉(叅奉) 승악(承岳)이 쓰고 행장(行狀)은 족증손(族曾孫) 우형(愚亨)이 지었으며 갈명(碣銘)은 화산권용현(花山權龍鉉)이 지었다. 문집(文集)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配밀양박씨(密陽朴氏)
生庚申1800년11월29일
卒庚申1860년7월2일
墓동례촌(東禮村)앞 신좌(辛坐)
父는 중원(重元)이고 祖는 우춘(遇春)이며 曾祖는 기정(基정)이고 충정공(忠靖公) 숭원(崇元)의 후손이며 外祖는 경주이팽룡(慶州李彭龍)이다
30세
子 承周(승주)
字는 희심(喜心)
號는 단파(檀坡)
生순조(純祖)壬午1822년3월27일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종유(從遊)하였다
卒丙戌1886년6월14일
墓가북(加北) 어사동(於賜洞) 병좌(丙坐)
配밀양변씨(密陽卞氏)
生甲申1824년9월2일
卒庚辰1880년6월11일
墓동례촌(東禮村)앞 유좌(酉坐)
父는 유신(兪臣)이고 祖는 사요(師堯)이며 曾祖는 구산(龜山) 종벽(宗璧)의 후손이고 外祖는 의성김치영(義城金致榮)이다
31세
子 宇和(우화)
舊名은 치화(致和)
字는 응천(應天)
生철종(哲宗)壬子1852년4월4일
卒고종(高宗)丁亥1887년5월3일
墓안양산(安陽山) 계좌(癸坐)
配김해김씨(金海金氏)
生철종(哲宗)丁巳1857년3월16일
卒戊寅1938년5월8일
墓안양산(安陽山) 아전양지(芽田陽地) 임좌(壬坐)
父는 명상(命桑)이고 祖는 택선(宅善)이며 曾祖는 봉서(鳳瑞)이고 外祖는 연안차일종(延安車日宗)이다
32세
子 愚德(우덕)
字는 예윤(禮允)
生고종(高宗)乙亥1875년2월8일
卒壬申1932년8월17일
墓안양산(安陽山) 임좌(壬坐)
配김녕김씨(金寧金氏)
生고종(高宗)壬午1882년정월6일
卒癸卯1963년8월20일
墓안양산(安陽山) 아전양지(芽田陽地) 공상하분(公上下墳)
父는 재구(在九)이고 祖는 이규(爾奎)이며 曾祖는 두순(斗順)이다
33세
子 昌基(창기)
字는 문재(文才)
生戊午1918년정월28일
配흥해최씨(興海崔氏)
生壬申1932년3월16일
父는 상세(尙世)이고 祖는 봉철(鳳哲)이며 曾祖는 삭진(朔鎭)이고 평촌(坪村) 숙양(淑梁)의 후손이며 外祖는 성산이우동(星山李佑東)이다
34세
동강 이창기옹은 슬하에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선숙은1951년 11월6일생이고,배는 밀양변씨 변필효 1954년생 7월 27일생이고, 부는용국이고, 조는원식이며, 증조는 영근이고, 외조는김섭이고 김녕인 이다. 장남 선숙은 대학교학사,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부산 북부산교육청 교육장 및 교장을 역임하고 부산에서 거주하고있다. 슬하에 정원,광원이 두자녀를 두고 있다,
2남 선동은 1954년 6월14일생 이고,배는 인동장씨 장정숙이고, 부는 도안 조는 갑술 이다.
2남 이선동은 대학교 학사,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졸업후에 구미에있는 반도체기업에 근무했으나 임원 승진후에는 본사근무를 하게됨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게되었다.
슬하에 1남 이성원,2녀 이주연 ,이지현을 두었다.
3남 선수는 1956년 11월15일생 이고, 배는 배경전 1959년 6월17일생이고, 부는 만원, 조는 붕기이다.
가조 동례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자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슬하에 1남 이인원,1년 이은정을 두었다.
4남 선규는1965년1월17일생이고, 배는 전주최씨 최지영 19681년 10월17일생 이고, 부는 성림이고, 조는 인준이고 외조는 송대현 은진인이다
이선규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서 어르신을 돌보는 복지 요양 센터를 운영하면서 사회 봉사 활동을했다.
슬하에 2녀 이소진, 이소연을 두었다.
녀 선자는 1962년1월21일생이고, 부는 하재룡 진양인 학사 이다.부는 우성이다. 슬하에 2남 하종욱, 하선일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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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
子 善東(선동)
生父昌基
生甲午1954년6월14일
공학석사
配인동장정숙(仁同張貞淑)
生丙申1956년8월27일
父는 도안(道安)이고 祖는 갑술(甲述)이다
35세
子 誠源(성원)
生壬申1992년12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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