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1코린 15,1-11; 루카 7,36-50 /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2024.9.19.
추석 명절 연휴가 끝나고 본격적인 가을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선선한 기운을 느끼며 차분하게 우리네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여유를 맞이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교회 안에서 교우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좌표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한 여인이 귀한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어 드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는 향유를 부어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사도직을 회고하면서 부활 체험을 고백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두 말씀에서 우리는 부활 신앙이 과연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흠결 많은 우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나서, 말씀 안에서 서로 빵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공동생활로 새로이 거듭나는 부활을 체험한 계시의 체험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죄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한 옥합에다 값비싼 향유를 준비해 와서는 아낌없이 예수님께 사용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미처 살펴볼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일만이 관심사였듯 싶습니다. 어떤 사정인지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그 여인은 그분에게 아주 큰 용서와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그 후 그 여인은 남은 일생을 다 바쳐서 예수님을 전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실로 다시 태어난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지요.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은 자격이 아니라 오로지 은총으로 거저 받은 선물임을 고백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주신 선물임을 긍지로 간직하고 있음을 아울러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발현의 상황은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번개와 함께 벼락을 맞은 것이었고, 그 바람에 그는 사흘 동안이나 눈이 멀어야 했으며, 그 벼락 소리가 그에게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하는 말씀으로 들려왔으며, 눈이 멀 정도의 번개 빛을 받아 혼비백산할 지경이면서도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사도 9,5ㄱ) 하고 되물었으며, 다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ㄴ) 하는 말씀을 듣고 회심하여 십여 년 간 구약성경을 샅샅이 훑어가면서 자신이 신봉해 온 율법을 총검토한 끝에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살아 계시다는 결론을 얻고 투신한 사정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예수님께 대해서 우리가 보여드릴 수 있는 사랑의 크기와 우리가 거듭 날 수 있는 삶의 활력은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 깨달음의 크기에 정비례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을 받았어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직의 동기는 불의와 사회악에 대한 분노로부터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준으로 그분으로부터 받은 용서나 은총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네 신앙의 동기가 그분께 대한 감사로부터 나오는 현상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이끌어 주신 것이 감사하면, 그 감사의 정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혹시 이제까지 그분께 소홀했던 점 등은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리지요. 속죄의 기도보다 감사의 기도가, 감사의 기도보다 찬양의 기도가 한 수 위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역사적인 시민사회운동에서 많이 발견되다시피, 불의와 사회악에 대한 정당한 분노에서 촉발되어서 시작되고 확대된 움직임이 없지 않습니다. 시작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또 그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삶을 바꾸어 놓고 세상의 역사도 한 단계 진보시킬 수 있으려면 진리나 정의라는 가치에 정조준된 더욱 순수한 동기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나 정의라는 가치를 하느님에게로까지 최대한으로 승화시킨 존재로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 또 그분께로부터 받은 용서에 대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가톨릭적이고 영성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예수님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고 그분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정해서 시작한 일은 이른바 사도직이라고 불리우면서 우리네 혼자 힘으로만 이룩할 수 있는 힘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한 힘을 위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복음과 독서에 나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의 동기에 관한 매우 강력한 교훈을 얻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직의 동기는 반드시 종교적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살면서 선택한, 혹은 우연히 이러저러한 계기로 부여받은 어느 분야에서든지 진리와 정의, 사랑과 평화라는 가치를 위한 투신은 예수님이라는 인격적 존재를 거쳐서 또는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과해서만 최고도의 영적 충전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조차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사도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교 최고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을 오늘날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가 전해 받았고 우리에게 전해 준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며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나 에페소의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체험한 빵 나눔에 이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그 사랑을 전한 행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이 가능했음을 체험한 일로서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이 땅에서도 그 엄혹한 백 년 박해시대에서 전국 백여 곳에 흩어진 교우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러니 일상의 무기력함을 떨치고 우리네 삶과 활동을 사도직의 기운으로 채우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은, 그리고 사도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가을입니다.